입수 전, 홀로 전쟁 중이다.

입수 전, 홀로 전쟁 중이다.

by 보리

입수 전, 홀로 전쟁 중이다.



입수 전, 말 그대로 나 홀로 전쟁 중이었다.


무려 ‘아가 다이버’ 시절이었다.

이 나이에 아가라니, 얼마나 신선한가?

속으로 감탄하느라 바쁘다.

아니, 감탄하는 척하는 중이다.

사실은 무서워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다이버 세계의 옹알이 같은 단어들.

“마스크”, “핀”조차 모른 채, 무작정 다이빙 풀장에 따라갔다.

마스크는 가면인가?

아, 얼굴에 쓰는 거?

핀은... 머리핀? 옷핀?

“그게 뭐래?” 했다가, 바로 구박데기 신세가 되었다.


“핀 신으세요! 핀, 핀!”

신으라고 하는 거 보니 오리발인가 보다.

장님 문고리 잡듯 눈치로 대충 때우다 보니, 어리버리 실수 연발이다.


일행들은 이미 바다 위에 떠서,

홀로 전쟁 중인 나를 째려보고 있다.


있는 대로 몸에 달라붙는 슈트를 간신히 끼워 넣고,

다이빙 신발을 신다가 벌써 다리가 풀렸다.


“젠장, 또 꼴찌다.”

...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세상에,

모두가 처음 듣는 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니들은 올챙이 시절 없었냐?

속으로 씨부린다.


이건 나만의 전쟁이고,

나는 지금, 바다라는 또 다른 세계의 경계에 서 있다.


입수 전 장비 점검은 거의 공포의 수능 듣기 평가 수준.

공기통에 공기가 채워졌는지, 열렸는지,

호흡기로 숨은 쉬어지는지,

컴퓨터는 찼는지,

오리발은 신었는지,

머리카락이 마스크에 끼지 않았는지…


첫 번째 전쟁 대상은 마스크였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끼면

그 틈으로 졸졸졸 물이 들어온다.

콧바람으로 아무리 밀어내도,

눈밑까지 바닷물이 차오른다.

바닷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다시 쓸 실력이 없어서다.


그러니, 마스크를 쓸 땐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한다.

머리카락을 쓸어 후드 속으로 밀어 넣고,

귀 뒤로 넘기기 위해 오른쪽 다섯 번, 왼쪽 다섯 번.

이젠 루틴도 생겼다.

혹시나 물이 샐까 싶어 마스크 끈을 있는 힘껏 당기면

얼굴살이 밀려나가고,

작은 눈이 동그래진다.

... 뭐 어쩌라고.


무거운 공기통에 수상한 줄들(레귤레이터, 인플레이터, 보조호흡기, 랜턴 등등)이 주렁주렁 달린 20킬로가 넘는 BCD(부력조절기)를 둘러메면 철로 된 갑옷을 입은 기분이다.


bc.jpg BCD(부력조절기)


내 몸을 바다 아래로 데려다주는 이 BCD를 메면

문득 칭기즈칸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등자(鐙子)가 떠오른다.


말 위에서 균형을 잡게 해 주던 그 도구.


유럽의 군대가 하루에 겨우 20km를 이동할 때,

몽골의 기병은 하루 70~100km를 달렸다.

말 위에서 먹고 자고,

말린 육포와 농축된 술(소주)로 에너지를 충전하며

달렸다.


침략 정보를 알고도 유럽의 국가들이 속수무책 당한 이유는 그렇게 빠른 이동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등자 하나로 인류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구려가 만주벌판을 말달리며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도구 역시 등자였다.

고구려의 등자.jpg

고구려 무용총 벽화 중 수렵도에 등장하는 등자

이미지 출처(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34896)


그러니

내가 머리카락과 싸우고,

장비와 실랑이하는 이 모든 시간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한

작지만 위대한 전쟁이다.


하찮은 자존심을 뽐뿌질 해보지만

사실은,

내 안의 두려움과 전쟁 중이다.


나는 지금 바닷속에 있다.

아니,

바다 아래에서 수십 마리의 거대 만타를 만나고 올라왔다.

그럼 됐지.

뭣이 중한디?

만타 진짜 만타- Video by Suhyung



다이빙은 한 세상의 경계를 넘는 일이다.

공기에서 물로, 소리에서 침묵으로, 무게에서 부력으로.

느리게 숨 쉬며, 몸을 낮추고, 마음을 접어야 한다.


두려움을 마스크 안으로 밀어 넣고 나서도 첫 발자국은 늘 흔들린다.


경계를 넘은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는 진정 자유로울 것이다.



P9220140.JPG 아가다이버는 바닷속에서 강아지처럼 줄로 묶여 끌려다니기도 한다. - Photo by Suhyung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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