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지렁이

by 보리

지렁이


너와 나는

한 시절,

같은 비늘을 입고

같은 빗줄기 아래

흐르던 몸이었다.


너를 사랑했지만

너는 온몸으로

내 이름을 지웠다.


몸을 접고 또 접어

죽고도 죽지 못한 날들

살갗이 사라진 대신

비가 되었다.


숨결마저 마른 흙은

천형(天刑) 침묵이 되어

끝내

사랑을 말하지 못한 채

바람이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닿지 못한

투명한 슬픔의 대가,

전생의 기억을 찾아

흙 위를 기는

이 슬픈 기쁨에


하늘을 버리고

뿌리도 날개도 없이

너를 찾아

빠르게 추락한다.


너를 다녀간

흙냄새의 기억으로

죽어서도 돌아누울 곳 없어



비가 되어

다시 너를 두드린다.


지구의 창자 지렁이가 만든 것들





새벽 산책을 나서려 문을 여니

어젯밤 비를 머금은 축축한 공기 사이로

붉고 긴 지렁이 한 마리가

현관에서 기어가고 있다.


징그럽다.


발 없이 꿈틀거리며 몸으로 가는 존재들에게서

느끼는 습득된 거부감이 있다.


밖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가을이가 산책 가자며 짖어대는 바람에

그냥 나왔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지렁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이미 생을 다한 듯 보였다.


땅으로 돌려보내려고 강아지 방석을 들춰보니

그 아래 작은 지렁이 한 마리가 더 있다.

빗자루로 쓸어 담아 땅 위에 놓아주니

죽은 줄 알았던 지렁이가

젖은 땅 위에 내려놓자

재빠르게 몸을 뒤틀며 움직였다.

비를 만나 기뻐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

비와 지렁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이들이 전생에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비는 하늘을 버리고

지렁이를 만나러 오는 것이다.


하늘에서 추락해

땅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다시 함께하고픈 간절함,

이루지 못한 사랑의 울림 같다.

비 온 후 땅속 지렁이들이 길가로 나왔다가

해가 나면 말라죽은 것을 많이 보았다.

비가 내리면

연인을 맞이하듯 목숨 걸고 땅을 뚫고 나오는 지렁이를 보며

어쩌면

비와 지렁이가 전생에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도

가만히 허리를 좌우로 흔들어본다.

창자도 허리도 잘 꿈틀거리는 걸 보니

나도 전생에 지렁이었나 보다.




지렁이 역할

‘흙의 창자(intestine of soil)’라고 불리는 “지렁이”

지구의 살갗인 흙을 일구는 지구의 정원사이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흙을 살리고 생명을 이어주는 침묵의 생명노동자

지렁이가 껴안고 있는 흙은 살아있다.


- 토양 개량자

흙을 뒤섞어 토양의 구조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만들어 통기성과 배수성이 좋아져 식물이 잘 자란다.


- 천연 퇴비 생산자

유기물을 먹고 소화한 뒤 배출한 분변토는 영양분이 풍부한 천연 비료가 된다.


- 미생물 활성화

지렁이 뱃속을 거친 유기물에는 유익한 미생물이 활성화되어 토양 생물 다양성을 높아진다.


- 환경 정화 기능

중금속이나 독성 물질을 어느 정도 분해·축적할 수 있어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데 기여한다.


- 먹이사슬의 일부

지렁이는 새, 두더지, 개구리 등의 먹이가 되어 생태계의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찰스 다윈,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 중

다윈은 나이 들어 거실에 큰 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지렁이를 키우며 그 습성을 관찰했다.

“어떤 벌판이든 지표의 흙 전체가 몇 해 단위로 지렁이 몸통을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거쳐 갈 것이라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쟁기는 사람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소중한 것에 속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이 지구에 살기 훨씬 오래전부터 지렁이들이 땅을 규칙적으로 쟁기질해 왔고 지금도 변함없이 땅을 갈고 있다. 세계사에서 이 하등동물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일을 한 동물들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



지렁이 설화


옛날에는 지렁이도 눈을 있었고, 가재는 눈이 없는 대신 훌륭한 비단띠를 가졌다.

서로 상대방의 것이 좋아 보여 맞바꾸기로 하였다.

눈을 잃은 지렁이는 곧 눈의 소용을 깨달아 가재에게 되돌려주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분하고 부끄럼을 이기지 못한 지렁이는 땅속에서 살며 울게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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