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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란 Oct 20. 2018

줄 짓는 장인 /

나는 줄 짓는 장인

평생을 묶으며, 이으며 살아왔다

내 이름도, 출신도, 생김새도, 향기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줄을 잇고, 묶는 동안에는 늘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이 좋았다.


오늘 한 일은 책을 묶는 일이었다

언제 쓰여지게 됐는지, 누가 왜 썼는지

그런 사연 하나쯤 있겠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 눈 앞에는 흰 종이가 여러 겹 쌓여있었다

까만 글자들이 하얀 바탕 어느 지점에

마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인양

말없이 말없이 앉아있었고,

종이의 가장자리에는 누군가의 손때가 짙게 배어있었다

떨어질 듯 떨어져 지지 않은 어떤 검은 것이.


나는 그 흰 종이 위로 커다란 구멍을 내었다

그 사정없이 꿰뚫은 일격은

아마도 각각의 다른 이야기들이 모였을 그곳에

일정한 크기의 공허를 만들었다.


다음은 검은 실을 그 속으로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이음 쇄.

다른 것들을 잇기에 너무 커 눈에 띄는 그것은

터널 같은 공허를 지나, 형광등 불빛이 만발한 곳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고,

몇 초간의 외로움이 흐르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슷한 것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생경한 모습이었다

온통 흰 배경에 검은 두 실이 만나 이어지려는 것이었다

씨익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말하자면 나는 이 순간이 제일 좋았다

만나야 할 것들을 만나게 해주는 이 일이 나는 퍽 다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나는 그들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잡아당겼고

각각의 실은 세게, 더욱 세게- 끊어질 듯 이어졌다.

감은 것들은 몇 번의 꼬임 같은 교차를 지났고

나는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차,

나는 그만 마지막 표지 장을 포함하는 것을 잊었단 것이 떠올랐다

그들의 매듭은 이미 단단히 고정되었고,

푸른색 덧장이 씌워지기 전에 마감되어버린 탓에

그들이 속한 공허가 훤히 드러나버릴 터였다

그 깊고 깊은 구멍은 끝내 가려지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가위를 대 매듭을 새로 지을까 고민했다

불상사[不祥事].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 늦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편이 더 좋겠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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