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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란 Mar 14. 2017

이야기의 시작 /

오늘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 대해 말하려고 해요. 이 이야기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예요.


나는 그 무렵 꽤나 황폐한 상태였어요

메마르고 메마른 가슴은 생기를 잃은 채, 몇 해를 보내었고 나는 결국 낭떠러지 앞에 서 있었지요. 

많은 사색의 시간이, 덧없는 삶의 미련 같은 것 속에서 아 춥다 라고 생각해버렸는데, 그때 그를 만났어요. 나처럼 천 길 낭떠러지를 보고 있던..


우리 둘은 우습게도 서로를 마주 보며 픽 웃었고, 혹여 마치지 못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의 마지막을 미루어두기로 하고는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불어오는 봄바람..

여름의 햇살, 가을의 향기..

그리고 마침내 내가 다시 살고 싶어 졌을 때,

그의 부고를 듣게 되었답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하자는, 내가 불행할 때, 그가 불행할 때에는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 있겠단 약속은 그렇게 모두 허망해졌어요. 그렇게 다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그 이후 아흔아홉 번째의 날..

그가 떠나고 난 후에도 내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그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갈 거라 생각했지만 전부 그대로였지요.

봄바람도, 여름 햇살도 가을의 향기도..여전히 너무 아름다왔죠.

달라진 거라고는 그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덕분에 많은 질문을 해야했습니다. 


나는 그가 그리워 수많은 시를, 노래를 그림을 그렸으나 점점 더 허무해져가고 있었어요.

나는 정말 몰랐거든요.

낭떠러지의 우리 둘, 만난 그 날.

이제 더 이상의 절벽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계속 혼자서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에요.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에도,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쭉...

그래요 내가 있어도 그는 여전히 슬펐고, 끝내는 내가 있어서 그는 여전히 슬펐던 거예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그의 손을 누가 잡아 줄 수 있을까요.

그 애는 너무 어렸는데, 너무 여려서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지금 나를 모두 버리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시간은 야속하게도 자꾸 흘러만 갑니다..


이 길을 걷고 또 걸어 언젠가 그곳에 내가 닿는다면, 

그를 품에 안고 그 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모두 전할 수 있겠지요.


'너의 이름..

아름다운 것은 모두 나에게만

안겨주려던 너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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