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침묵 끝에 그가 한 말은 나를 상처 입히기에 충분했다.
"많이 생각해봤는데.. 성향이란 거 쉽지 않은 거 같아"
출장을 다녀온다더니,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내 말에 할 대답이 겨우 그것이었을까.
성향을 포기하고 더 보고 싶은 쪽이 지고 들어가는 거라던 그의 말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을까.
처음엔 '그래. 이렇게 또 나를 길들이려 하는 건가' 생각도 했다.
차라리 그런 것이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별의 의사.
그러면서도 모든 결정은 오롯이 내 몫으로 주어져 있었다. 잔인하게도.
'성향'을 거부할 수 없는 그와 그런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
사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설렘으로 점철된 우리의 만남이, 필시 이러한 결말을 예정에 두고 있었음을.
"ㅇㅇ씨 마음 잘 알겠어요. 우리 그만 해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은 그 따위 것이었다.
'잠시나마 그가 나와 자신의 성향 사이에서 망설인 것에 의의를 두자.'
'그가 나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하면서도 내 말투는 신경질적이었다.
"그럼 그 간 연락 없던 건 전부 그런 뜻이었겠네요. (그럼 차라리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요) "
날이 선 내 물음에 그는 그간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 같은 것을 퍼부어 댔다.
그런 그에게서 이제 빛이 다 바랜 배려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 결국 끝에 다다랐음이 명백했다.
사실 그가 조금 더 자신을 학대해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성향을 원망하면서도 끝내 관철하지 못하기를,
일반 관계라는 말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희생하기를.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잘 알면서도 모르는척..
결국 길들이려 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디엣은 이제서야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는 이제 그만 목줄을 잘라 줄 것을 청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자상한, 너무나도 매력적인 그는,
배려할 수는 있으나 결코 길들여질 수는 없는, 어쩔 수 없는 돔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진정한 의사란 자신에 대한 진심을 확인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게 가능할지는 스스로도 의문이었던지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개 같은 날의 오후,
우리는 서로를 서로의 방식으로 길들이는 것 대신 서로를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