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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양 Jul 18. 2023

만년필 써보셨나요?

[100일 100 글]39일, 서른아홉 번째 썰 

만년필을 쓴 지 올해로 10년 가까이 되었다. 처음에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시간이다. 워낙 문구류를 좋아했기에 그 정점에 있는 만년필까지 가게 되었건 것 같다는 희미한 기억만 남아있다. 


지금은 처음 입문했던 독일제 만년필에 정착했지만 처음 접했을 당시에는 꽤 많은 브랜드를 시필해봤었다. 하지만 다시 처음 썼던 브랜드로 돌아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만년필을 써보니 취향이 상당히 확고했다. 


펜촉은 무조건 EF촉. 가장 가느다란 촉을 선호한다. 예쁜 글씨체를 쓰는 편이 아니어서 글씨가 두꺼워지면 그 시너지로 굉장히 못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촉은 무조건 가느다란 촉을 쓴다. 촉과 종이가 닿는 느낌도 중요하다. 브랜드에 따라서 종이를 긁는 느낌이 들기도, 물처럼 흐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후자 쪽을 선호한다. 해서 무조건 시필을 해보는 편이다.


만년필의 뚜껑을 펜 뒤에 꽂았을 때의 무게중심 또한 중요하다. 전에 뚜껑이 스틸로 만들어진 만년필을 써본 적이 있다. 펜 뚜껑을 뒤에 꽂았는데 만년필이 뒤로 계속 누워서 그 중심을 잡느라 손가락의 피로도가 꽤 높았었다. 며칠 쓰지 않고 바로 중고장터로 내보냈다. 글씨를 쓰는데 손이 불편하면 바로 탈락시켜야 한다. 


같은 이유로 처음에는 플라스틱 바디의 만년필을 사용했다. 그런데 너무 가벼운 만년필은 나처럼 글씨를 빨리 쓰는 경우 글씨가 날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묵직한 만년필을 찾았고, 현재 알루미늄 바디의 만년필을 사용한다. 마냥 가볍지 않지만 손에 피로도가 느끼지 않을 정도의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만년필을 오래 써봐야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시필만으로는 딱 맞는 만년필을 찾기 어렵다.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만년필을 쓰다 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온다. 생각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어서 더 그렇다. 순수한 궁금증으로 한번 써 봐도 되냐는 물음에는 흔쾌히 펜을 넘기는 편이다. 있어 보이고 싶어서 쓰냐는 약간 짓궂은 농담은 그냥 웃어넘기고 마음에 담아두는 편은 아니다. 


왜 만년필을 쓰냐는 질문에는 글쎄. 이제는 손에 완전히 익어서 다른 펜을 쓰는 것이 더 어색하다. 그리고 종이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ASMR 같은 역할을 해서 꽤 힐링이 된다. 그래서 일부러 낙서를 할 때도 만년필을 쓴다. 


연봉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도 꼭 만년필을 사용한다. 적혀있는 금액과 상관없이 상황 자체가 비즈니스 계약을 체결하는 것처럼 특별해 보인다. 눈물 나지만, 정신승리를 위해서도 만년필은 꽤 좋은 필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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