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100 글]63일, 예순세 번째 썰
오늘은 직장인을 위한 날, 월급날이었다. 금액을 확인한 후, 지난달 나의 과오를 해결하기 위해 카드사 어플을 클릭했다. 자고로 월급통장이란 들어오자마자 비워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굉장히 낯선 숫자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결코 있어선 안 될 숫자가 그곳에 있었으니 말이다. 카드사의 농간일까 3초 정도 생각했으나 그럴 리 없었다. 내역을 조심스레 확인해 보니 놀랍도록 전부 내가 쓴 것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선결제를 진행하며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나 생각했다.
나는 원래 신용카드를 쓰지 않았었다. 필요성을 못 느껴서 꽤 오랫동안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 3년 전 해외 출장을 준비하면서 부득이 신용카드를 만들게 되었다. 그전에는 거의 모든 것을 현금으로 사용한 편이었고, 신용카드를 만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용카드로는 매달 5만 원 이하로 결제를 했다.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현금을 모아 목표 금액을 만든 후에야 구매를 했다.
많은 분들이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무렵, 아빠의 사업이 좀 힘들어졌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긴 했지만 액수가 크지도 않았고 애초에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철없는 딸이 되면 부모님에게 굉장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선모금 후구매의 습관이 굳어져갔고, 자연스럽게 신용카드의 존재감은 희미해져가기만 했다. 무엇보다 굳이 나서서 빚을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별로였다.
그러다 얼마 전 기존에 가지고 있던 랩톱이 고장 났다. 회사일로 랩톱을 쓸 일이 왕왕 있었기에 조금 급하게 랩톱을 구매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신용카드가 생각났고 미래의 내가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할부로 화끈하게 긁었다. 사실 이때 할부 기간을 조금 길게 가져갔으면 좀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할부 기간을 짧게 선택한 것이 패착이었다.
현재의 내가 된 과거 속 미래의 나는 신용카드의 맛을 알아버렸다. 지금 눈 딱 감으면 미래의 내가 또 해결해 줄 테니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첫 시작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블랙카드를 지닌 재벌집 막내딸처럼 카드를 휘둘렀고, 오늘이 온 것이다. 현재의 내가 된 과거 속 미래의 내가 얼마나 씨를 뿌려뒀던지 아주 대단한 결과가 내 손안에 들어있었다.
일단 카드값부터 해결한 나는 아무래도 다시 옛날의 나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버는 직장인이니 카드값을 갚을 수는 있다. 하지만 후폭풍이 어마무시했다. 이건 나에게 맞지 않은 길이었다. 재단이 잘못된 옷을 입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불편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현금을 모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맞는 길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다수가 좋다고 손을 들어도 나에게 맞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굳이 고집부리며 따라갈 이유는 없다. 이제는 손 볼 때가 되었다. 카드값의 엄청난 기세를 꺾어야 하는 상황이다. 또 쉽지 않은 길을 가야 하다니. 올해 하반기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바쁠 예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