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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양 Aug 22. 2023

난생처음으로 호신용품을 샀다

[100일 100 글]74일, 일흔네 번째 썰 

난 쇼핑몰 장바구니에서 결제까지의 그 과정을 웬만해선 멈추지 않고 한 번에 해결한다. 일단 한번 사자고 마음먹으면 결제까지는 일사천리다. 그런데 이번 구매는 구매 결정도 오래 걸렸고 결제 역시 오래 걸렸다. 오랜 장고 끝에 집으로 배달된 것은 호신용 스프레이. 후추 스프레이를 사고 싶었지만 유명 브랜드의 경우 3주 이상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말이 3주지,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었다. 조금 불안했기에 대신할 수 있는 제품을 구매하기로 했다. 호신용품을 아무 거나 살 수는 없었기에 일단 후추 스프레이를 결제하고, 품절이 되지 않은 제품을 샀다. 내가 구매한 제품은 스프레이 형태의 UV 염료 스프레이. 안전한 거리에서 분사하면 공격자의 시야를 막아 공격을 중단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만약 분사에 성공한다면 뿌리고 열심히 뛰어 도망가면 되는 것이다(물론 실패해도 무조건 뛰어야 한다).


심각하게 고민을 끝내고 결제까지 마친 뒤, 갑작스러운 현타가 왔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내가 호신용품을 살 거라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나. 버텨볼까 했으나 솔직한 말로 무서워서 안 살 수가 없었다. 밤늦게 돌아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은 전혀 무관한 것 같다. 어제는 쓰레기를 버리러 밤 9시 이전에 나갔다가 거의 도망치듯 다시 돌아왔다. 동네에 가로등도 다 켜져 있었지만 그냥 혼자 무서워져서 어쩔 수 없었다. 비단 나뿐만의 일이 아니다. 주변의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고초(?)를 토로한다. 미심쩍은 사람이 보이면 일단 피하고 본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걱정 많은 성격인데 불안감이 몰려오니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그래서 유난 같아도 결국 호신용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이렇게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몇 달 동안 있었던 마음 아픈 사건들로 인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아 졌다. 밤늦게 돌아오지 않은 가족들이 집에 올 때까지 조금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출퇴근 때문에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할 때 휴대폰만 보던 예전과는 달리 주변을 살피게 된다. 뭔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물이 보인다면 대놓고 볼 수는 없고 일단 그쪽을 예의 주시한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달라졌다. 슬프지만 이것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사히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이 특별해지는 요즘이다. 그렇지만 굴하지 않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 또한 하게 된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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