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를 늦추다
퇴사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2015. 2月
2월도 다 끝나가고 다음 주면 3월이다.
퇴사를 실행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 우선 나의 일자리를 아직 구하지 못 했고, 아내의 일자리도 확정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진행되고 있는 자리는 계획에 없던 스위스이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부모님에 대한 걱정은 잠시 뒤로 밀린 듯 하지만, 이런 근본적인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 지금, 나의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 줄 거리가 부족하다.
나는 어떻게든 살 수는 있다. 빵을 굽더라도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보이는 직장을, 삶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는데, 당장 할 일도 없이, 수입원도 없이는 떳떳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내게는 꽤나 불리한 문제이다.
꿈을 꾸었다.
근엄하게 앉아 있는 장인어른에게 무언가를 '보고' 하고 있다. 쭈뼛쭈뼛 서서 나는 장인어른에게 독일로 가면서 아직 직장도 구하지 못했고, 일을 할 구체적 계획이 없다고 어렵게 얘기를 했다.
쳇, 더 주눅 들게 왜 하필 보고 형식이었어야 했는지. 내가 꾼 꿈이지만...
나 혼자가 될 거라는 느낌,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격리되어 답답한 생활을 하게 될 거 같은 느낌, 그리고 뭔지 모를 죄를 지은 느낌, 불안함이 계속되었다. 감기, 황사, 미세먼지로 목도 아프지만, 이런 걱정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눈을 떴다.
스스로 위로를 해 보자면, 완벽한 계획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계획을 실천하면서 생기는 변수들에 대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계획을 수정 발전시켜 나가는 가, Contingency 계획을 어떻게 잘 만들어 대처하는 가가 Business의 성공요인이라고 했다. 내가 세웠던 계획들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근거가 필요하다.
정당성이 필요하다.
내 뜻이 회사에 없다. 무엇을 위해 회사에서 인정받아야 하는지, 의지와 방향이 없는 내 보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왜 눈치를 봐야 하는지... 단지 하나의 부속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두들 나침판 없이 가야 할 방향을 잃은 채 관성대로 하던 대로만 그저 하는 척을 하고 있는데, 왜 그 속에서 내 시간을 낭비해야 하나 싶다. 이제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거다. 출장 중에 호텔에서 라면을 먹기 위해 인덕션을 산 사장은 회사 물을 아끼라고 양치컵을 사용하라 하고 한다. 열정을 가지라고 외치던 부사장은 그 새를 못 견뎌서 회사를 나갔다. 그만두겠다던 전무는 고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방향을 알 수 없다. 그들도 모른다. 그냥 흘러간다. 배가 방향타가 망가졌는데, 아니라고만 한다. 이제 내 것을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해보자. 회사에서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면 내게 무엇이 돌아오는가? 금전적인 보수가 목적인가? 나 혼자 잘해서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잘 나가는 그(녀)는 그저 그 개인이 혼자 잘해서인가? 남을 밟지 않고 조화롭게 달성할 수 있는 성과인가? 언제까지 잘 할 수 있는가? 그다음은 무엇인가? 진급이 안 되면 그냥 나가야 하는데, 그때 가서 내게 남는 건 무엇인가? 진급이 잘 되어 임원이 된다고 한들 나가고 나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왜 눈을 감고 있는가?
그게 의미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왜 눈을 안 뜨는가?
다른 대안이 없어서... 다른 세상이 있지 않을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다른 사회가 있지 않을까? 내가 내 사회가 추구하는 그것이 다른 사회에서는 중요한 가치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보지 못하는 더 중요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설 연휴가 끝나고, 그날 따라 서두르고 싶지가 않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여유롭게 출근을 했다. 그리고는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의 아침 회의에 참석했다. 프로젝트 막바지라 크게 특별한 것이 없었다. 급할 것도, 중요한 것도, 어렵지도, 스트레스도 없었다. 이렇게라면 그냥 다녀도 되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듯이 열심히 회의를 리드하는 김 과장의 옆 모습을 본다...
매달 받는 월급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김 과장...
십 년 후에는 아마도 부장이 되어 있을 김 과장...
그래도 나는 그만 두어야 하는가... 젠장...
왜 가려고 하느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삶에 대한 다른 태도를 가진 사회에서 좀 더 나은 가치관을 누리며 살기 위함이었다.
나아가서는 내 일을 하고 내 주변을 돌보기 위함이었다.
또 잠깐 끼어드는 잡념... 생각을 좀 해보면, 구체적인 계획이 아직도 없는 것이 좀 불안한 것이지만. 살 곳도, 할 일도, 언어도 다른,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직구, 구매대행, 온라인 판매 일이 어느 정도 수익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한 번도 해본 적도 없다. Risk taking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나는 risk taking을 할 뭔가의 건더기 조차 없는데...
내가 속해있는 세계에서 조금 벗어나 나를 바라보고,
내가 느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감정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 어디쯤 있는 것인지,
나는 어디에 있는 건지..
나는...
오롯이 나를 느껴보자. 나를 정의하는 모든 것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는, 나의 성장 배경은, 내 가족들은, 내 친척들은... 이런 관계를 벗어나서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바라본다면...
구덩이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파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다. - 워런 버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