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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onuk song Dec 10. 2015

타이틀에 집중하는 사회

삶의 속도를 늦추다

"사회"라는 말 까지 들먹이면, 개인적인 경험을 너무  일반화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서울역  맞은편 서울 스퀘어에 있는 독일 대사관에 비자발급을 위해 번역 확인서를 찾으러 갔었다. 건물 로비에서 정장에 셔츠를 반듯하게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봤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우르르 몰려 내려와 웃고 떠드는 이들도 보였다. 저번 주 금요일에 노트북과 사원증을 반납하고 퇴사한 후에 맞이하는 첫 월요일이었다. 주말이 끝난 아쉬움을 점심시간 수다로 달래고 있었을 월요일에, 회사가 아닌 곳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직장인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마냥 좋지 많은 않았다. 그들이 속한 곳에 이제 내 자리가 없다는...


뭐랄까... 소외감?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던 건데, 왜 그런 느낌이 들까. 뭔가 허전함. 벌거벗은 듯한...


LG 사원증을 찬 사람들도 있었고, 은행원들도 있었다. 난 후드티에 8년째 입고 있는 후줄근한 색 바랜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전에는 그렇게 대충 입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스스로 주눅 들지 않게 주문을 걸 수 있었다. '괜찮아... 나는 삼성전자에 다니잖아... 옷차림이 대수야?' 하고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회사가 없는, 그럴 방패막이가 없는 지금은, 왠지 멋지게 차려입고 지나가는 직장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며 '쟨 뭐야? 이 시간에...'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내 주변의 사람들을 겉모습이나 출신 학교로 판단을 하고, 다니는 회사와 직업으로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패막이가 되어주던 타이틀이 없는 지금, 내 스스로를 벌거벗은 것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을 판단하는데 한 가지 근거는 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타이틀에 집중하다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개성과 철학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뒤집어쓰고 있는 타이틀이라는 가면을 벗으면, 제각기 각자의 가치를 가진 그런 개개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부터 그렇게 타이틀로 사람들을 비교하고 판단하게 되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중학교 때였다. 학원에서 특목고 대비반이라고 외고/과학고반을 따로 두었다. 그 반에 들어가기 위해, 그 타이틀을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쟁쟁한 대원외고, 한영외고는 아니었지만 서울 변두리에 있는 외고에 간신히 들어갔다. 지금 돌아보면 학원의 마케팅에 홀랑 넘어간 사회분위기가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 이름이 학원 외벽 플래카드에 걸리자, 내 진짜 실력이 어디쯤인지는 잊어버리고 학교 이름에 우쭐했다. 외고 다니는 애라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 진짜 하고 싶은 건 뭔지도 모른 채 말이다. 학원들은 그 타이들을 돈벌이에 이용한 것이고, 엄마들 치맛바람은 더욱 부채질을 하였고, 사회는 갈피를 못 잡고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잘난 애들과의 경쟁에서 늘 기가 죽어있던 고등학교 3년은 내 개인적으로 그렇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저 그런 대학에 진학하고는 더 좋은 대학 타이틀을 딴 친구들과 비교하여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전국 대학생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1위 회사에 운 좋게 입사하고는, 그 타이틀이 불어넣는  우감에 빠져, 정작 그게 내가 원하는 길인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회사가 나를 왜 뽑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의사, 변호사, 판사가 되기 전에는 삼성전자보다 좋은 타이틀이 없다는 핑계로 현실에 안주했다. '삼성전자니까 야근은 당연하지... 회사가 주는 프라이드의 보상으로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 그랬다. 회사가 심어놓은 환상에 걸리기 딱 좋은, 타이틀만 주면 만족하고 열심히 일할 그런 사람을 딱 알아보고 뽑은 것은 모르고 말이다.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6명이 한 병실을 쓰고 있었는데, 모두 같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나의 얕음을 다 드러내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렇게 타이틀 없이 며칠 있다 보니,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에게 '나는 삼성전자 다녀요.' 이 말이 하고 싶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고 기어이 그 말을 하고 말았다. 결혼식 등 부모님 친구분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끔 가서 인사를 드리는데, 그럴 때면 내 타이틀이 주는 뭔가 번듯한, 떳떳한 그런 느낌을 즐기곤 했다.


내가 타이틀이 주는 힘에 의지해 왔던 것은, 그 만큼 내가 실제로 내세울 수 있던 게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만큼 나는 한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딱히 잘 하는 것도,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말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가 주는 힘에 취해 물불 가리지 않다가, 반지를 빼앗기자 무기력에 빠지는 골룸의 이미지가 겹쳐온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나이다.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진, 벌거벗은 나이다.

살짝 이제는 어찌  먹고살지 조금 걱정은 된다.


사색이란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제 조용히, 내 생각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서, 내 생각 속에 깔린 나를 발견하고, 내 주변을 살펴봐야겠다.


그 가면을 쓰고 있을 때는 결코 볼 수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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