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를 늦추다
서울 시내 아침...
6시 부터 7시 반 사이에는 수원행 삼성전자 셔틀버스만 수백대가 이동한다. 마지막 버스 시간이 다가오면,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정신없이 뛰는 사람들을 매일 어김없이 볼수 있다. 그렇게 달려와 가쁜 숨을 고르며 줄을 섰건만 저 앞에서 끊길 듯 한 기세가 보이면, 어느 한 명이 또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의 뒤를 이어 광역버스 타는 곳까지 수십명이 우르르 뒤따라 뛰어간다. 20분마다 오는 광역버스는 항상 빈차로 오는 것이 아니기에 먼저 타지 않으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 마저도 마냥 기다리지 못하는 영혼들은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이 넘도록 복잡한 전철을 졸린 눈을 비비며 서서 가야 한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수만명의 직장동료들과, 같은 궤도에 올라타기 위해 치열하게 서두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애와 씨름을 하다보니, 통근버스를 타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그리고는 그냥 아예 늦을 결심으로 천천히 나왔다. 아예 늦으면 광역버스에 자리가 있겠지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었다. 마음이 편하다. 그 시간에 집에서 광역버스 정류장으로 바로 오는 길을 걸어 본 것은 처음이다. 뛰어가는 학생들, 교문 앞에 서서 등교지도 하는 선생님, 문방구에서 준비물을 사가는 아이들, 세살배기 아들 녀석이 가는 어린이집도 지나왔다. 새로운 아침의 모습이다. 이삼십분 차이로 나의 궤도와 겹치지 않던 다른 궤도의 아침 모습을 보았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가기 바로 직전에, 또 한 번 궤도에서 이탈하여, 2층 커피숍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트루먼쇼의 짐캐리가 된 듯 마냥, 누군가 내가 가기로 되어있는 길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커피를 기다리며 창밖으로 각자의 궤도를 열심히 그리며 일터로, 학교로 가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본다.
무엇을 위해 저렇게 열심히 궤도를 따라가고 있을까...
저기 저 정류소 앞... 내가 곧 올라타게 될, 생각 없이 따라 그리고 있는, 그 궤도도 보인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니 뭔가 새롭다. 곧 다시 올라타야 하는 그 궤도이지만, 한 발 떨어져서 들여다 보니, 심호흡 한 번쯤 할만한 여유가 좀 생긴다.
일탈의 맛을 알아버린 탓일까...
나는 일상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해 버렸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한국 생활을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독일로 날아왔다.
일상을 벗어나 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일상을 벗어나서 그 일상을 들여다 보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인다.
사과를 딸 때, 사다리를 타고 나무 속에 들어가 있으면 보이지 않는 사과가, 내려와서 보면 꼭 한 두개 보인다. 어느 각도에서는 죽어도 보이지 않는 그런 것이 있는 것 처럼...
좋은 나라에 사니 좋겠다. 나도 독일에 살고 싶다. 나도 국제결혼 하는 건데... 하지만 내게도 결코 쉬운 시간은 아니었다.
그 동안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달려오다가 내 가족을 돌아보고는 갑자기 멈추어섰다.
나는 대체 왜 달리는가?
직장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부딛혀보기로 했다. 새로운 궤도를 그려야 하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 궤도나 그릴 수는 없었다. 뭔가 달라져야 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못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동안 잘못한 것은 무엇인지, 무한 고민과 번뇌에 빠져들었다. 시간을 좀 더 갖기로 한다.
그리고
어느덧 8개월이 지났다.
삶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할까
내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살아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