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를 늦추다
한국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아내의 나라 독일로 온지도 2년 남짓 되었다.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이지만 물질에 덜 연연하게 되는 것은 교육비나 주거비 부담을 줄여주는 국가의 시스템 덕분일 테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비와 주거에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좋은 차와 좋은 옷, 유명 브랜드에 연연하는 것을 보면 소비라는 키워드가 한국 사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다양성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느끼는 이곳 독일의 큰 장점 중에 하나는 다양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각자가 다양한 삶을 살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비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집시처럼 떠도는 사람. 길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 공부를 하는 사람. 공부를 하더라도 졸업을 안 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 결혼을 할 나이가 되어도 결혼 안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당연히 없다.
한국에 있을 때는 경제적으로 나름 풍족한 편이었다. 외식하고 싶을 때 외식을 했고, 한 번씩 지르고 싶을 땐 지르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 부부가 함께 다니면서 연말 보너스도 두둑이(?) 받으며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지 모를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만족이 없는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행복의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거리를 나가면 나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고급 식당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타워팰리스에 있는 카페에 가면 츄리닝 차림으로 나와서, 여기 사는 사람이네 하며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저렇게 되려면 회사에서 묵묵히 버텨서 임원이 되어야 할거 같았다. 진급 시기가 되면 좋은 고과를 못 받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목표는 늘 한 가지였다. 높이 올라가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래야 내 욕구가 채워질 것 같았다. 좋은 차를 타고 싶었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삶의 잣대가 정해져 있었다. 게임을 할 때 한 판을 깨면 다음 판 그리고 또 그다음 판이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보니 순위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그러다가 삶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모두 접고 독일로 왔다.
뭔가에 홀린 듯 돈에 쫓겨 살다가 삶에 더 중요한 가치를 누리고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 더 중요한 가치를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질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렇게 삶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던 차에,
우연히 인턴을 하게 된 곳에서 일 년이 채 안 되어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회사차를 한 대 받기로 했다. 무려 메르세데스 벤츠다. 뭔가에 홀린 듯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물론 일은 재미가 있고 성취감도 괜찮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내 팀을 꾸리고, 계획을 세우고,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어렵풋이 알던 지식들을 활용하고 있다. 그런 데다가 이렇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반대를 한다. 왜?? 메르세데스 벤츠인데... 내 꿈의 자동차인데...
하루 15 km 씩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차가 생기면 차를 타게 될 것이고, 덕분에 십자인대 수술을 했던 무릎이 많이 좋아졌는데, 다시 안 좋아질 수 있고, 게다가 어떻게 깨달은 삶의 소중한 가치인데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냐는 것이다.
My precious를 외치며 반지를 갖기 위해 눈이 멀어버린 골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집을 위해 살던 나의 모습은 골룸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인가...
절대반지를 갖기 위해 전쟁을 벌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탐욕의 상징인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가. 그 절대 반지를 눈앞에서 보면 눈이 멀어버린다. 그 벤츠가 내게는 절대 반지와도 같았다. 벤츠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눈이 멀어버렸고,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에 빠져버렸다. 나는 그저 내가 하는 도전이 재미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아내의 예상치 못한 반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는 말에, 남과 비교하며 더 높이만 올라가려고 하던 때로 돌아가려고 하느냐는 말에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계속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있다. 그렇게 되찾은 건강을, 그렇게 알게 된 삶의 다양한 가치를 절대반지와 바꾸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벤츠의 아쉬움은 꽤나 오래간다. 아직도 지나가는 잘 빠진 벤츠를 보면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