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orship bias
햇살이 좋은 시월 말의 어느 일요일 오전, 아침을 먹고 다시 침대에서 게으름을 부리는 가족들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의 길목에서 점점 짧아지는 해가 아쉬워, 해가 좋은 날이면 광합성을 하러 나간다. 독일의 겨울은 해가 짧아 비타민 D가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가 늘 반갑다. 책꽂이에 꼽혀 있던 오래된 책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나왔지만, 진득이 읽지는 못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드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기록하느라, 이런 인문 경제학 책은 진도가 잘 나가지는 않는다.
사업을 시작하고 일 년이 조금 넘었다. 유럽에 한국 작가들의 그림을 파는 온라인 갤러리(artlia)인데, 예술 분야가 그렇듯 금방 성과가 날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조금씩 개선해 가며 어느 정도 성장을 하긴 했지만, 이 것만 하기에는 소득이 아직 턱없이 적다. 그러던 중 다른 사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그것도 시작을 했다. 부지런히 매달려 일을 했다. 열심히 한다고 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가슴 한켠에 조급함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일을 벌여 놓으니 성과를 내야겠다는 마음에 좇겼고, 수익을 내야 한다는 은근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야도 좁아졌다.
게다가 한 달 전에는 주 3일 일하는 조건으로 어느 스타트업 회사에 마케팅 담당으로 취직도 했다. 진행하고 있던 여러 프로젝트들 위에 또 일이 추가가 된 것이다. 벌이가 충분했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어차피 내가 하고 있는 디지털 마케팅 관련 일이었기 때문에 시너지가 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해 보자 하고 시작하게 되었다. 첫 2주는 적응하고 방향을 잡느라 스트레스도 있었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좀 적응이 되었는지 이제 나름 활력이 된다. 주 3일 다른 사무실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그동안 달려왔던 내 모습을 나름 다른 시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새로 시작한 회사는 AI로 웹분석을 하는 회사인데, 마케팅 방향을 잡기 위해, 콘텐츠를 정리하던 중 "User Segmentation에서 빠지기 쉬운 Survivorship bias"라는 블로그 글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세계 2차 대전 중 영국에서는 전투에서 돌아온 전투기에 생긴 총탄 자국을 보고 전투기의 취약한 부분을 분석하고 보강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Abraham Wald라는 수학자가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약점을 분석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살아서 돌아온 전투기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취약한 부분을 맞아서 돌아오지 못한 전투기에 대한 분석은 반영될 수가 없었다. 웹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User에 대한 분석은 (데이터를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집중하게 된다. 당연한 내용이지만 시야가 좁아져 있으면 얼마든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사실 실제 하고 있던 일에서도 그랬다. 하는 프로젝트들이 모두 비슷한 일이었기 때문에, 뭔가 머릿속으로 틀을 짜 놓고 그 틀에 맞춰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틀 밖의 것에는 그동안 눈을 많이 돌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에서 뿐이 아니었다. 삶의 속도를 늦추자 했는데, 어느새 조급함에 좁은 생각의 틀 속에 나를 몰아넣고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목표를 세워놓고,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잊고, 그 목표만 보고 밤낮으로 달리고 있었다. 궤도에서 잠시 벗어나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7여년 전, 서울에 살 때였다. 늦어버린 출근 시간, 열심히 달리면 잡을 수 있을지 모르는 마지막 수원행 통근 버스를 포기하고, 2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올라가 느긋하게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창 밖으로, 정신없이 뛰었을 그 통근길을 바라봤다. 그동안 못 보고 지나쳤던 여러 가지가 보였다. 그 속엔 정신없이 지내던 나도 있었다. 몇 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나다니던 그 궤도를 처음으로 벗어나서 내려다 본 날이었다.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기)
이제 다시 살짝 속도를 다시 늦추고, 달려 왔던 삶을 돌아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