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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미 Jun 01. 2020

05. 잔잔한 소리와 포옹하는 세상, 하쁠리

ASMR 유튜버 하쁠리가 전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이야기

'립스틱 가게 롤플레이 소품 후기' [출처: 유튜브 채널 'rappeler하쁠리']


송혜미(이하 ‘송’):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하쁠리(이하 ‘하’): 유튜브에 ASMR 컨텐츠를 올리고 있는 크리에이터 하쁠리다.


송: 운영하고 있는 채널 ‘rappeler하쁠리’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하: ASMR 컨텐츠를 업로드하고 있는 채널이다. 2015년 7월에 정식으로 시작했으니 이제 5년이 다 되어간다. ASMR은 시청각 등의 감각으로 반복되는 자극을 받을 때 얻게 되는 편안한 느낌을 뜻한다. 사물의 좋은 소리를 들려주거나 귀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귀청소, 귀마사지 소리 등을 들려주기도 한다. 피부과나 네일샵 등의 상황을 설정해서 간접적으로 그곳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송: 아직 ASMR이 생소한 독자를 위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한다면.  

하: 엄마가 귀를 파줄 때, 피부 마사지를 받을 때, 혹은 미용실에서 디자이너 선생님이 머리를 만져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한 느낌이 있다. 단순히 졸음이 밀려오는 느낌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딘가 몽롱하면서도 좋은 기분, 편안해서 잠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느낌. 어떤 때는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지기도 하는 느낌. 사전에 나와 있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시청각적인 요소로 자극하는 방식이 ASMR이다.


ASMR에 관하여
'바스락 귀청소 2020 ver.' [출처: 유튜브 채널 'rappeler하쁠리']


송: ASMR 컨텐츠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하: 한때 불면증이 있었다. 그래서 잠이 오는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ASMR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듣자마자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직접 소리를 내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그때 당장 시작하게 되었다.


송: ASMR 컨텐츠가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기 이전부터 시작했는데, 심리적인 어려움은 없었는지.

하: 전혀 두렵지 않았다. 2015년 당시 내가 보는 유튜브라고는 영국남자, 그리고 이름 모를 초등학생 분들이 미니어쳐를 만드는 영상이 전부였다. 유튜버들의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수익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해서 전혀 정보가 없었다. 내가 직접 좋은 소리를 내서 나도 누군가에게 ASMR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 단순히 이런 마음들에서 시작했었다.


송: '좋은 ASMR 컨텐츠'에 대한 개인적인 가치관이 있는지.

하: 사람들이 ASMR 영상을 보는 이유는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ASMR 영상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고요한 영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하루의 일부를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 먹곤 한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불편한 의도를 갖지 않는 것이다. 불편한 의도란, 영상을 통해 많은 돈을 벌겠다는 의도, 하기 싫지만 억지로라도 하니 고마움을 강요하는 태도, 우월의식 등이 있을 것 같다. 마음이 복잡한 사람이 화면에 나오면 시청자도 다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영상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유튜버를 하다 보면, 보통의 직장인보다 많은 수익이 생긴다. 또 하루에도 수백 개의 칭찬 댓글을 읽기도 한다. 그러면 거만해질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ASMR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기에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늘 복잡해지지 않도록, 순수한 의도만 갖고 촬영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고 있다.


컨텐츠에 관하여
'시간을 파는 가게 상황극' [출처: 유튜브 채널 'rappeler하쁠리']


송: 늘 창의적이고 기발한 시도로 다양한 컨텐츠를 제작한다. 특히,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시청하고 있다.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는지.

하: 매 순간 순간 영감을 받는다. TV를 보다가 어느 연예인이 한 말에 우연히 영감을 받기도 하고 책의 어느 한 구절에 꽂히기도 한다. 여행 중에 영감을 얻기도 하고 인생이 힘들 때 느끼는 감정들도 모두 영상을 기획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송: 개인적으로 '시간을 파는 가게' 라는 컨텐츠가 인상 깊었다. 당시 구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

하: 당시 스스로 시간을 많이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소중하고 누군가는 1분 1초가 간절할 텐데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에서 출발했다.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돈이 귀한 줄 모르고 펑펑 쓰다가 은행이나 대부업체에 돈을 빌려 달라고 하게 되듯이, 시간 귀한 줄 모르고 허송세월 하다가 시간을 구걸하는 때가 오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시간은 너무 소중하니 우리 모두 시간을 귀하게 쓰자’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만들었다.


'우울증 치료 ASMR' [출처: 유튜브 채널 'rappeler하쁠리']


송: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컨텐츠가 있는지.

하: ‘안녕, 나는 너의 우울이야’ 라는 제목의 영상을 애정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앓고 있던 우울증이 사라질 때쯤 서운하면서도 후련한 마음이 들어 만든 영상이었다. 그 영상을 만든 이후로 정신과 약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 같은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영상을 만들고 나서 실제로 내 안의 ‘우울이’가 떠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에겐 가장 의미 있는 영상이다.


“…그날 너(하쁠리)는 웬일인지 오늘의 나(우울이)처럼 갑자기 여행을 가겠다고 나섰었지. 신나게 드라이브를 하면서 차창밖에 보이는 바다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잖아.

네가 좋아하는 땅콩을 먹으면서 너는 웅얼거렸어. 이 정도면 행복한 거라고. 그때 행복해하는 너를 보며 결심했어. 너의 곁을 떠나주자고.

미안해. 우린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그동안 나의 손을 놓지 않아줘서 고마워. 나는 너의 행복을 하나 하나 느끼려 해. 행복을 느낄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작아지겠지…”

–‘안녕, 나는 너의 우울이야’ 中-


영향력에 관하여

 

'추운 겨울, 차디찬 보호소에서 태어난 보스 이야기' , '나른한 유기견 보호소 ASMR' [출처: 유튜브 채널 'rappeler하쁠리']


송: 최근 '여수 여미지 보호소'에서 적극적으로 유기견 봉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큰 개를 무서워했는데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기도 전에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하: ‘제보자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여미지 보호소’를 알게 되었다. 보호소 소장이 후원금을 들고 잠적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미지 보호소가 여수에 있었다.


여수에 이사온 지 일년이 조금 넘었다. 살았던 시간 이상으로 여수를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여수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버려진 강아지들이 욕심 많은 인간 때문에 또다시 버려지고 방치되었다는 짠한 마음도 있었다. 그 안타까움이 무서움을 이긴 것 같다.


송: 매선침 롤플레이 같은 몇몇 컨텐츠를 통해서, 소신껏 의견을 표현하는 데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지닌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는지.

하: 사실 영향력을 펼치겠다는 의도로 찍은 영상은 없다.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다. 당시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넘쳐서 영상을 만들었다. 용기가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마음에 관하여
'나의 흑역사 "샤넬백" 상처내기' [출처: 유튜브 채널 'rappeler하쁠리']


송: 별도로 운영하는 채널 ‘하쁠리 Vlog’에서 아무 일도 없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는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정말 천국 같은 하루다.' 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많은 공감이 되었고 하쁠리의 안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가치관이 있다면.

하: 감정 기복이 조금 심한 편이었다. 요즘엔 명상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많이 나아졌다.


예전에 정신과 선생님이 한 말이 있다. “당신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람이네요.” 그 말이 딱 맞았다. 누가 나를 때리지도 않고 괴롭히지도 않는데 감정 기복 때문에 인생이 너무 고달팠다.


그러다 보니 이제 감정이 비교적 일정한 날이 있으면 그렇게 뿌듯하고 행복하다. 잔잔한 파도를 지나고 있는 평화로운 기분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그런 하루를 평범한 날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하루 하루가 너무 소중하다.


좋은 삶은 신의 마음과 최대한 가까워져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조건이 없어지는 것이다. 인간세계는 ‘조건’이 있어서 꽤나 퍽퍽하지 않은가. 마치 닭가슴살 처럼.


“네가 내가 이걸 해준다면, 나는 네게 그걸 줄게.” 라는 기본 공식이 늘 존재한다. 연애할 때도, 회사 계약을 할 때도,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어디에서나 조건이 있다. 물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 살아가는 데에 사랑이 덜 느껴지는 것 같다.


나도 완벽히 신의 마음을 따라갈 순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대할 때 ‘최대한 조건을 없애자. 그냥 사랑해보자.‘ 라는 마음을 갖는다. 대가 없는 베품 같은 것 말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좋은 삶인 것 같다.


송: '샤넬백 상처내기' 영상 등을 보며 ‘하쁠리’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스스로를 올바른 방향으로 다스리기 위해 다각적으로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는 점이 있는지.

하: 요즘은 비어있음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몸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의 99.9%는 빈 공간이라고 한다. 결국 에너지로 채워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비어있는 내 몸에 대해서, 언젠가는 완전히 비어있을 나에 대해서 상상하는 명상을 한다. 그런 점에서 비어있는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여전히 물욕이 있지만 늘 상기시키려고 한다. ‘넌 그저 빈 공간이다.’ 라고. 집착, 욕심, 후회 다 부질없다고 늘 스스로에게 말한다.


유튜버로서의 이야기
'3DIO 초근접 수다 ASMR' [출처: 유튜브 채널 'rappeler하쁠리']


송: 크리에이터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언제인지.

하: 나 때문에 편히 쉴 수 있었다는 누군가의 댓글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 그리고 요즘엔 ‘여수 여미지 보호소’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수익금 전액을 매달 기부하고 있다. 그 돈으로 아이들이 치료받고 밥도 먹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송: 크리에이터로서 직업적인 습관이 있는지.

하: 물건을 보면 소리부터 들어본다. ASMR 업로더 분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어떤 소리가 새롭고 좋을까.’ 이 생각이 늘 머릿속에 있다. 물건을 사면 일단 두드려보고 흔들어본다. 별 쓰임이 없음에도 소리가 좋을 것 같은 물건들은 일단 사서 쟁여 놓고 보는 습관도 있다.


송: 대중에게 쉽게 노출이 되어 있는 만큼 댓글에서 여러 영향을 받을 것 같다. '댓글'에 대한 가치관이 있다면.

하: 댓글창이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도 하고 또는 일기 같이 하루를 정리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유튜브를 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싸움을 조장하거나 눈살을 찌푸릴만한 댓글은 지웠다. 나에 대한 욕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영상 수가 너무 많고 그 만큼의 댓글창이 존재하므로 통제가 불가능하다.


댓글이 단순한 글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에너지이고 누군가의 감정이고 누군가가 잠시 존재했던 흔적이다. 그래서 시청자가 남겨주는 댓글 하나 하나 소중하다. 그래서 글쓴이의 기운을 느끼려고 한다. 그 기운을 느끼며 혼자 포옹도 하고 악수도 하고 같이 울어주고 기도해준다.


고민과 꿈에 관하여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 힘들 때' [출처: 유튜브 채널 '하쁠리Vlog']


송: 최근 고민이 있다면.

유튜버로서 새로운 컨텐츠에 대한 고민이 있다. 5년 동안 하다 보니 비슷한 레퍼토리의 ASMR 영상이 지겨워졌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다. 어디에도 없는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러면서도 가장 나다운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늘 생각한다.


개인적인 고민은 인간의 마음과 신의 마음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같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과 싸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수호천사든 뭐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내 안에도 신이 있기에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늘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송: 막연하게 나마 꿈이 있다면

하: 지금의 상태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이렇게 평온한 날들이 계속되는 것이 소망이다. 지금이 가장 좋다. 힘들었던 시절에 꿈꿔왔던 평화로운 순간들이 지금 내게 다가온 기분이다. 그래서 꿈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작가의 음악적 시선
Sarah McLachaln의 정규 앨범 'Surfacing' 앨범커버 [출처: 네이버 뮤직]


삶은 비움과 채움의 연속이다. 감정을 비우면 새로운 감정이 찾아온다. 욕심을 비우면 새로운 욕심이 찾아온다. 어떤 때는 우울하고 어떤 때는 기쁘고 어떤 때는 슬프다는 의미는 그만큼 나 자신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비우고 채우는 작업에 열심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은 화려한 보석을 찾지 않는다. 마치 잔잔한 돗단배처럼 비움을 찾아 항해한다.


하쁠리가 '우울이'와 겪은 이별에서 나는 왠지 모를 애틋함을 느꼈다. 나 또한 한때는 '우울이'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시절이 있었다. 철 없던 시절에 갖고 놀던 장난감 처럼 '우울이'는 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 해주었다. '우울이'를 통해서 많은 서적과 음악을 접했고 나의 감성을 수많은 화음과 문장으로 채워주었다. 내가 떠나 보냈는지, 스스로 떠나버렸는지 알 수도 없이 '우울이'는 이제 나의 곁에 없다. 고요하고 평온한 이별이었다.


비움은 일종의 이별이다. 그래서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아프다. 그럼에도 용감하게 이별을 마주하며 많은 것을 비워나가는 당신에게 'Sarah McLachlan'의 'Angel'을 추천한다. 상실과 이별에 대한 음악이다. 이별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울 순 있다. 언젠가 새로운 채움으로 비움을 보상 받을 때, 비움은 애틋한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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