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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ssong Aug 18. 2021

세상에서 유일, 무해한 존재

반려견을 통해 내가 배운 것

  꼬치는 멕시코에서 만난 친구 반려견의 이름이다. 꼬치의 이름은 스페인어의 ‘작다’라는 뜻의 ‘Chico’를 거꾸로 해서 ‘Cochi’가 되었다. 너무 크게 자라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데 지금 생각하면 인간의 욕심으로 지은 이름 같기도 하다. 이름 때문인지 정말 같은 종의 다른 보스턴 테리어들보다 작게 자랐다. 보스턴 테리어 종 안에서도 크기가 다양하다고는 하지만 괜스레 이름 때문일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크게 아프지 않고 3살이 될 때까지 건강하게 자라준 꼬치에게 정말 정말 고맙다.

  꼬치는 2개월 만에 엄마와 떨어져 사람의 곁으로 오게 되었다. 나도 옆에서 꼬치를 자주 돌봐주다 보니 어느새 꼬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기 강아지는 사람이 아기일 때와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울고, 대소변 훈련을 해야 하고, 밥을 먹는 양도 조절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잘 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잘 못 된 것이라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 강아지는 이가 나면서 앞에 보이는 것을 모두 입으로 가져가 가늘고 뾰족한 이로 질겅질겅 물기 시작한다. 사람의 손가락도 보이면 입으로 가져가 물어버린다. ‘작은 강아지가 물면 얼마나 아프겠어’ 하겠지만 굉장히 아프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이 잘 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훈련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성견이 되어서 사람들을 무는 강아지가 된다. 강아지 강 씨 강형욱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했는데, 개들이 잘 못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주인들이 제대로 교육을 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래서 그 잘못은 주인들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가.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밖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면 ‘집안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구나’하는 말을 듣게 되는 것처럼. 부모님이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하지 않았다며 아이의 잘못을 부모님과 연관시킨다. 이 사실을 알고나서부터는 사람을 향해 짖거나 공격하려고 하는 강아지를 보면 주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눈여겨보게 된다.

  제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주인이 일 하는 평일에 꼬치는 혼자라는 것이다. 평일에는 퇴근 후 몇 시간 꼬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인데 그마저도 야근과 회식 때문에 제대로 산책을 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스턴 테리어는 특히 활동량이 많은 강아지라 매일매일 산책을 해주어야 한다. 가끔 주말에 꼬치가 뭐하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아침부터 퇴근하는 시간까지 주로 잠을 잔다. 평일 낮에 혼자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주인이 집에 있는 날에도 꼬치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찡했다.

  강아지를 3년간 봐오면서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성숙해 가는 게 보였다. 대소변 가리는 것은 몇 개월 만에 배웠고 앉아, 손, 빵야 등 몇 가지 재롱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한 자리에 가만히 못 있던 1년, 2년을 지나 3살이 된 지금은 TV 보는 주인 옆에 앉아 있을 줄도 알고, 슬며시 옆에 다가와 몸을 부비기도 한다. 무엇보다 장난감은 뜯겨 나갈 듯이 물다가도 나와 놀 때 내 손가락은 살며시 문다는 것이다. 무엇이 사람의 신체이고, 무엇이 장난감인지 구분하다는 것 자체가 정말 기특하다. 강아지는 철들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마냥 어린아이 같던 꼬치가 성숙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할아버지 꼬치가 돼서 기운 없는 모습을 상상하니 살짝 슬펐다.

  꼬치를 통해 반려견도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해야 하고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퇴근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산책은 빼먹으면 안 된다. 내 반려견을 위한 시간을 따로 가져야 한다. 그냥 예뻐서 집에만 둔다고 반려견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애정과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멕시코는 집집마다 애완견을 한 마리씩 키운다. 한국보다 애완견 수가 훨씬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주인과 산책하는 애완견의 모습을 보기는 정말 드물다. 몇 달 전에 동네 강아지가 새벽 내내 우는 바람에 잠 못 이룬 적이 있다. 집 앞에 차가 없는 것으로 봐서 주인이 주말에 집을 비운 것 같았다. 또다시 강아지들이 짖는 소리에 깨서 아침 일찍 그 집 앞으로 가보았다. 집과 담벼락 사이 좁은 통로에서 두 마리의 큰 허스키가 안절부절 뛰어다니며 꺼내 달라는 듯 울고 있었다. 뒤쪽 마당은 며칠간 방치된 배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마리는 검은색, 다른 한 마리는 갈색 털에 푸른 눈을 가진 정말 예쁜 강아지였다. 하지만 동네에서 주인과 산책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주말마다 파티를 열어 술을 엄청 마시고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주인의 행동을 보면 강아지를 어떻게 대할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미관상 좋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보여주기 용’으로 집에 두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원에서 갇혀 사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반려견을 식구로 맞이하는 것에는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하다. 단지 예뻐서 몇 번 만져보고 품에 안아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에 버금가는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지낼 때보다는 배로 부지런해야 한다. 반려견은 말 못 하는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시간을 일정 부분 할애해서 관심을 가지고 애정으로 돌보고 교감해야 한다. 반려견에게 주인은 세상의 전부와 같다. 집에서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주인과 하루 한 번 산책하는 그 시간에 가장 행복해한다. 주인이 가끔 소홀해도 강아지는 순수함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 사람을 기다린다. 세상에서 계산 없이 사랑을 주는 유일한 존재가 아닐까.

공놀이, 뛰어 놀기 좋아하는 개구쟁이. 자는 모습도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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