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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Mar 19. 2018

사할린 동포의 눈물

아무도 모르는 대한민국 사할린동포들의 이야기

  해마다 8월이면 온 나라가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경축분위기에 휩싸인다. 대한민국 광복의 역사가 민족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지워지지 않은 아픈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구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바로 사할린영주귀국자(이하 사할린동포)들의 이야기다.

사할린주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한글신문 <새고려신문>의 사진기자 이예식 씨의 사진집 『귀환』(눈빛출판사)에 수록된 사진.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1910년 8월 일본의 국권피탈로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한 36년의 식민통치가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고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얻었다. 그리고 2013년 8월, 식민지의 아픈 과거를 고스란히 가슴에 뭍고 사는 사할린 동포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1938년 일본은 중국으로의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국가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우리나라의 인적·물적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게 된다. 이때부터 일본은 사할린으로 조선인을 집단 강제 동원하여 탄광, 비행장, 도로, 철도 등 군수시설 건설 현장에 투입하게 된다.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7만여 명에 이르며, 그 중에서 절반가까이가 극심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45년 종전과 함께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지만 강제 동원된 4만여 명의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얼음의 땅 사할린섬에 방치되어 역사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이후 1990년 한·소(현재의 러시아) 수교이래 한·일 적십자사가 주축이 되어 사할린 한인 조기귀국에 관한 논의가 이어져 1997년부터 2010년까지 안산 ‘사할린 고향마을’을 비롯해 전국 19개 지역으로 3,900여명의 사할린 한인 1세와 2세들이 영주 귀국해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충북지역에도 청원군에 72명, 음성군에 70명, 제천시에 116명 등 261명의 사할린 동포가 살고 있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 조국의 품안에 들어온 사할린동포들의 삶은 과연 행복해졌을까? 정부와 지자체가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의 안정적인 정착생활을 위해 임대아파트를 제공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거 수급자로 지정하여 생계비를 지급하고, 별도로 특별생계비를 지원하는 등 다각적인 지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실제 그들의 삶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2009년 충북에서 가장 먼저 청원군 오송읍에 40세대 80명의 사할린동포들이 영주귀국했지만, 고령으로 인한 질병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등 3년새 8명이 사망하고 현재는 72명만이 살아가고 있다.


  사할린동포들을 가장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바로 암이다. 지난 2009년부터 현재까지 청원군지역에 사망한 사할린동포 8명 중에 5명은 암으로 사망했다. 현재도 3명이 간암, 대장암 등으로 병원에서 또는 가정에서 투병 중에 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향에 와서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병을 얻어 눈을 감는 것은 여간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사할린동포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은 지역사회와의 소통의 문제다. 작년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던 사할린동포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할린동포들은 고령인데다가 수급권자에서 탈락될 것을 우려하여 마땅한 직업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한 아파트 단지에서 동포들끼리 집단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외에는 이웃과의 소통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같은 아파트 내에 있는 경로당에서 이웃주민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집안에 있거나 몇몇이 슈퍼마켓에 둘러앉아 각자내기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청원군노인복지관에서는 뒤늦게나마 2011년과 올해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응프로그램에 뛰어들었다. 사할린동포들의 일상생활 적응을 위한 교육과 외로움을 해소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나마도 외부지원기관의 1년 단위 배분사업으로 내년에도 같은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필자가 복지관에 일하면서 2년 동안 사할린동포들의 삶을 지켜본 결과, 우리 사회가 그들을 ‘왕따’를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복지관이나 일부 봉사단체 이외에는 우리 지역에 사할린 동포가 살고 있는지, 또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체 살고 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계비나 의료비 지원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빵만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한국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쳐주고, 지역사회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정서적 지원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과 함께 검은 대륙으로 끌려갔다 70년 만에 얼음의 땅에서 되돌아 온 그들을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어야한다. 우리가 그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아직 완전히 해방되지 않은 것이다.


해마다 광복절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들... 알쓸복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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