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하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인가?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일명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법 시행 초기에는 민간 소비심리가 위축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까지 국민들의 생활에 큰 불편함 없이 잘 정착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난 1년여 동안 공직사회를 중심으로 소위 시범케이스로 걸리지 않기 위해 ‘안 만나고, 안 먹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공공기관 주변 외식업계는 매출이 줄어 울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절과 기념일을 전후로 화훼농가와 유통업계를 중심으로 매출에 직격탄을 맞았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다 결국 올해 설명절을 한 달 정도 앞두고 명절선물의 상한가를 농축수산물 가공품에 한해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높이고, 경조사비는 10만원에서 5만원으로 낮추는 것을 골자로 법이 개정되기까지 이르렀다. 법시행 1년 3개월여 만에 일이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신세를 져야 할 일이 가끔씩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한 번 신세를 지게되면 으레 보답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누군가에게 신세를 질 정도의 관계는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 온 사이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거나 부탁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친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세를 지려고 하면 아무래도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청탁하게 된다. 그리고 부정적인 청탁은 대게 금전관계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작년 이맘때 쯤 청탁금지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보면서 권력의 그늘 아래에서 부정청탁과 비리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야기하는 일부의 만행을 뿌리뽑기 위해 스승의 날 카네이션과 캔커피까지 법으로 금지하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법개정 이후 마트에서 9만원짜리 한우선물세트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기사를 보면서 겨우 10만원에 사고 팔리는 도덕적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사실 청탁하는 사회가 잘못된 사회는 아니다. 권력에 기대어 아첨하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청탁'이란 말이 부정적으로 쓰여서 그렇지 오히려 청탁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사회가 삭막하고 낯선 사회다. 흔히 대가성이 있는 청탁행위를 부정청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부정청탁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대가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상에 모든 청탁은 대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부정청탁은 정의롭지 않은 청탁을 말한다. 청탁의 의도가 아니라 청탁의 결과 즉, 대가가 정의롭지 않을 때 부정(不正)청탁이라고 해야 옳다. 10만원이 넘으면 부정청탁이 되고 9만 9천 원은 괜찮다는 인식은 법의 취지를 왜곡하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필자는 청탁을 직업적으로 일삼는 사회복지사다. 지역사회의 문제해결과 복지증진을 위해 주민들에게 자원봉사나 기부를 부탁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기 때문에 청탁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주민들뿐만 아니라 평소에 관계 공무원이나 지역구 의원들과 만나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지역의 문제와 정책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가끔씩은 새로운 정책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실제로 제안한 정책이 시행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사회복지사가 지역복지를 위해 정책을 제안하고 요청하는 것도 청탁의 한 행위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복지사들의 업무상 청탁행위를 '정의로운 청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행된 청탁금지법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정책과 제도개선을 위한 지역복지활동까지 위축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청탁금지법 제5조 2항에는 '사회상규에 위해되지 않는 청탁행위는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상규 즉, 사회적 정의에 부합하는 청탁과 그렇지 않는 부정의한 청탁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도덕감정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도덕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도록 자신을 통제하는 존재를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고 말한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던지 공정한 관찰자는 알고 있고 나 자신을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볼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 종종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가령 식당에서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았는데 그냥 가게 문 나서려고 할 때 내 등 뒤에서 '그냥 가도 돼?'라고 말을 걸어오는 존재가 공정한 관찰자다. 이 공정한 관찰자의 존재가 바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인간행동의 도덕적 기준을 법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정의롭지 못하고 삭막해 졌다는 방증이다. 인간사회는 서로의 사랑이 없어도 서로 합의된 가치평가에 따른 금전적 교환만으로도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스미스는 주장한다. 물론 전제는 인간이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정의의 규칙에 따라 행동을 했을 때 가능한 세상이다.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정의로운 사회는 어쩌면 공정한 관찰자의 물음에 화답하는 사회가 아닐까 싶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거나 청탁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마음 속 공정한 관찰자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정의로운 행동인가?'라고...
알쓸복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