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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May 26. 2016

음악, 그게 뽕짝이든, 힙합이든, 걸그룹 노래든

아이들에게 클래식만 들려주려는 어른들에게


고등학교 다닐 때 오디오 회사 인켈 대리점에서 방학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당시는 우리나라 오디오 산업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던 시기여서

인켈, 태광(에로이카), 아남(나쇼날), 샤프, 롯데(파이오니아)같은 회사가 각각 대리점을 두었다.

내가 살던 소도시에도 인켈 대리점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있어서 난 버스를 기다리면서 틈만 나면 그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오디오를 구경하곤 했다.

당시 오디오 대리점은 가장 고급 모델을 행인들이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놓고

가게 바깥에도 스피커를 내놓고 음악을 틀곤 했다.


당시 나에겐 어머니가 일하시던 식당 주인아저씨에게 얻어 오신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아주 작은 스피커 한 개가 달려 있는 AM/FM 라디오였는데

건전지 넣는 곳의 덮개가 깨져서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그 라디오 소리에 비해 대리점의 오디오는 차원이 다른 소리였다.

분명히 같은 음악인데 내 라디오 소리와 대리점의 오디오 소리가 이렇게 다르다니. 문화충격이었다.


당시엔 오디오 가전제품 대리점마다 홍보용 카탈로그를 얇은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고 있었다.

난 그걸 얻어다 보는 걸 좋아했다. 그 책자에는 모델별 사양이 빼곡했다. 난 그걸 비교하는 걸 좋아했다.

당시 인켈에서 생산한 오디오들 어지간한 건 백만 원이 훌쩍 넘었다.

막 유행하기 시작한 서라운드 스피커, TV 음성이 수신되며 10개까지 저장되는 전자식 튜너, 

16밴드 이콸라이져, 오토 리턴 턴테이블, CDP, 리버브 앰프, 3웨이 스피커, 음반을 꽂을 수 있는 장식장과 헤드폰.


방학 중이던 어느 날, 나는 배달 직원을 뽑는다는 전단을 봤고, 취직이 되었다.

낮에는 매장에서 손님을 맞고 오후엔 주문받은 오디오를 싣고 가서 설치를 했다.

그때 오디오를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방이나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리점 사장님은 그들과의 친분에 꽤 공을 들였다.

당시 2200 프리 파워 앰프 시리즈, 프로 시리즈 스피커(프로 8,9,10)는 이문이 제법 남았기 때문이다.


대리점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청소와 음악 틀기였다.

대리점에서 시연하는 음악은 무조건 CD였다. 사람들은 CD 사운드에 열광했다.

LP처럼 긁히지도 않고 테이프처럼 늘어지지도 않으면서 소리도 짱짱한 CD는 당시 최신 기술의 대명사였다.

당시 인켈 대리점에는 몇 개의 홍보용 CD가 지급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난 주로 이글스와 폴 모리아, 리처드 클레이더만을 틀었다.

큰 스피커로 나오는 베이스 기타 소리가 너무 좋아서였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 계실 땐 클래식을 틀어야 했다.

명색이 인켈 대리점인데 전파사처럼 뽕짝같은 노래를 틀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주로 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 CD를 틀었다.


이 방식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오디오를 사러 오는 손님 중에는 클래식 애호가들이 꽤 있었다.

의외로 클래식 애호가들이 많다는 걸 난 그때 알았다.

사장님은 이런 손님을 극진히 대했다. 다른 손님에겐 안 주는 커피도 줬다.

그러면서 클래식을 들으려면 중급기 이상을 써야 한다며 2200을 권하면 대부분 먹혔다.



<인켈 md2200 앰프. 이 앰프만 보면 난 순식간에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유로 난 아직 이걸 갖고 있다.

그때 그렇게 나의 부러움을 사던 저 앰프가 지금은 고작 몇 만원이라니. 이미지출처 : 소리전자>



CDP에는 다른 재생매체에는 없는 기능들이 있었다. 전곡, 또는 한 곡 자동 반복 기능이다.

(당시 자동 반복 기능은 고급 데크에나 있던 오토리버스 기능이 있었지만 테이프를 매장에서 틀지는 않았다.)

그중 내가 특히 놀란 건 프로그램 기능이었다.

내가 재생하고자 하는 트랙을 순서대로 지정해 놓고 그걸 반복으로 틀 수 있는 기능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스마트폰 플레이어에는 반복, 셔플 기능은 있는데 프로그램 기능이 없는 것 같네?)

그때의 그걸 계기로 난 그 뒤로 음악과 오디오를 좋아하게 된다.



지금 내 교실에도 오디오가 있다. 오래 전에 중고로 구입한, 구닥다리 오디오다.

켄우드에서 1976년도에 생산했으니까 40년 된 리시버 앰프(KENWOOD KR-6600),

내가 대리점에서 일할 때 그렇게나 부러워하던 인켈 프로8 스피커. 그리고 오래 된 인켈 CDP. 별로 안 쓰는 EQ.

당시 그렇게 귀하던 프로8 스피커가 내게 중고로 6만원에 팔려 와 내 교실에 덩그라니 있다.

저 스피커로 듣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나 부르크너 교향곡의 현악기들은 아직 고풍스러우면서도 까실거린다.


처음 오디오를 교실에 놓을 때는 CD와 테이프 데크로 음악을 들었다.

처음엔 턴테이블도 놓았는데 아이들 등쌀에 하도 망가져서 포기했다.

집에서 CD 몇 장을 교실에 갖다 놓고 트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알려줬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음악을 틀어도 별 무반응이었지만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몇 아이는 꼭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DJ라는 감투를 주고 선곡을 하게 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에 교실에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컴퓨터 사운드 카드에 Y 케이블을 꽂고 앰프의 AUX에 연결해 들었다.

그 뒤 인터넷이 좋아지고 mp3 플레이어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CD를 리핑해서 컴퓨터 틀어주다가 요즘은 youtube의 공연 영상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그릴을 수시로 열어젖히고(안 그래도 프로 8의 그릴은 툭 건드리면 쑥 빠지는데) 심지어는 연필로 우퍼를 쑤셔 구멍을 내고

학교를 옮길 때마다 차 트렁크에 싣고 교실과 교실을 옮기면서 이리저리 부딪히다 보니

앰프는 튜닝축이 틀어졌는지 튜닝 손잡이가 뻑뻑해 돌아가지 않아 튜너는 못 쓰고 외부 입력만 이용한다.

스피커도 아이들 등쌀에 이리저리 몇 번 넘어지더니 모서리가 다 깨졌다. 우퍼 에지도 두 번 갈았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듣거나 말거나 배경 음악을 틀곤 했다.

난 그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클래식은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음악이나 어른들이 권하는 어린이 음악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사실 아이들은 짧고 직관적인 클래식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른의 착각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우선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뻐꾹 왈츠'같은 소품을 먼저 들려주려고 한다.

보통 아이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긴 한다. 사실 그 아이들은 어떤 음악이든 그냥 좋다고(안 트는 것보다는 낫다고)한다.

하지만 음악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은 조금 취향이 다르다.


어떤 3학년 아이는 유난히 오보에를 좋아했다.

그 아이는 여러 CD 중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을 좋아해서 자기가 DJ 당번이 되면

그 음반을 틀어 놓고 오디오 앞에 착 붙어 앉아 음악을 듣곤 했다.


또 어떤 6학년 아이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을 좋아했다.

그 곡은 사실 베토벤 5번 교향곡 음반의 맨 끝 트랙에 실린 곡이어서 쉽게 틀지 않게 되는 곡이었다.

어느 날 아침, 난 다른 일을 하느라 그냥 베토벤 5번 교향곡을 1악장부터 틀어 놓았다.

아이들은 처음 1악장의 빰빰빰 빠-- 하는 부분만 좀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떠들기 시작했다.

5번 교향곡 4악장까지 모두 끝나고 에그몬트 서곡이 나오는데 한 아이가 유난히 관심을 보이더니 그게 무슨 음악이냐고 물었다.

그 뒤 그 아이를 위해 몇 번 들려줬는데 묘하게도 그 음악이 좋다는 아이들 몇이 나왔다.

그 음악을 들으면 뭔가 마음속에 맺힌 게 풀리는 느낌이 들면서 왠지 울컥하는데 그게 좋다는 것이다.

(실제 중간 절정 부분을 들어보면 계단 모양으로 뚝뚝 떨어지는 선율 부분이 그런 느낌을 준다)

그 뒤로 그 아이 덕분에 우리 반은 에그몬트 서곡을 꽤 들었다. 그 음악에 어울리는 이야기도 짓고 연극도 꾸며 발표했다.


또 새롭게 안 사실은, 평소 집에서 음악을 자주 접한 아이들이 교실에서도 음악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 대부분은 집에서 음악을 들어 보지 못한 경우였다.

집에서 음악이 나오는 도구는 TV밖에 없는데 학교에 와 보니 집 TV보다 더 좋은 소리가 나오는 걸 신기해 하는 걸 보고

인켈 대리점 앞에서 그 소리에 빠져있던 나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아이들은 우연한 계기로 자기와 맞는 음악을 찾는다.

그게 교실에서 담임이 틀어주는 음악일 수도 있고 우연히 본 CF 음악이거나 나처럼 거리를 지나다 어느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누군가가 일부러 어떤 의도를 갖고 주입하는 음악은 아이들에게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평생을 음악을 즐기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게 하고 싶다면, 무조건 어려운 클래식을 틀어줄 게 아니라

어떤 음악이든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그게 걸그룹 노래든 힙합이든 아이가 음악으로 받아들이면 그걸 어느 정도 즐긴 다음엔 다른 음악 장르로 옮겨간다.

그게 트로트일 수도 있고 재즈나 클래식일 수도 있다. 선택은 아이의 몫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일부러 클래식만 들려주기도 한다.

아이가 트로트나 댄스, 힙합 같은 음악 말고 클래식을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학부모 중에도 이런 분이 있었다. 그 분은 내가 교실에서 음악을 들려준다는 걸 알고 집에 있는 CD를 한 박스 보내주셨다.

헨델, 코렐리, 하이든, 모차르트, 바흐처럼 주로 바로크 음반들이었다.

아이에게 평소 많이 들려주는데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으니 학교에서 들려달라는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은 아이가 재즈를 들은 아이보다 기억력이 좋았다는 연구결과를 등에 업은 ''모차르트 효과' 음반 판매가 유행이던 때였다.


문제는 아이들이 바로크 음악(클래식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TV만 켜면 신나고 재미있는 가요가 넘쳐흐르는데 누가 클래식을 듣고 싶을까.

헨델의 경우 하프 협주곡, 코렐리의 리코더 소나타,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몇 개,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진노의 날, 라크리모사 정도를 빼면 아이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작 CD를 보내 준 그 집 아이 보다 다른 아이들이 더 흥미를 가졌다.

그 아이는 그 음악들을 지겨워했다. 이미 너무 많이 들은 것이다.

그 아이가 차라리 자기가 좋아하는 대중가요를 들었다면, 그 음악이라도 좋아했을지 모르는데.

어쩌다 아이의 부모는 클래식으로 아이를 괴롭히게 되었을까.


세상의 모든 음악들 중 클래식을 제외하고는 뭔가 격이 떨어질 거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운영하는 찻집에 음악으로 클래식만 고집한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어떤 스피커를 평가 할 때 '뽕짝이나 듣기에 딱 좋은' 수준이라고 낮춰 말한다.

반짝이는 의상을 입고 헤픈 춤을 추며 사랑에 대해 부르는 대중음악은 천박하고

우아한 정장을 입은 가수가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는 품격이 높다는 건 누구의 발상인가.

지금의 클래식들도 그 음악이 만들어질 당시엔 대중음악이었다는데.

뽕짝이든 걸그룹의 댄스 음악이든 욕설이 난무한 힙합이든 아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음악이라면,

그래서 그 음악에 복잡한 마음을 내어 주고 치료받을 수 있다면 그게 위대한 음악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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