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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un 17. 2016

어떤 소꿉놀이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 아이들을 데리러 바깥에 나가는데

한 아이가 조회대 위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작은 학교. 넓은 조회대가 아이 차지다.





뭘 하나 궁금해서 가까이 가려는데 나를 본 아이가 오지 말라고 손짓한다.

비장해 보이는 표정이다. 가면 안 될 것 같다.

장난기가 인 난, 일부러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멈칫, 그 자리에 얼어붙은 척한다.

아이는 그런 나를 슬쩍 보더니 그래도 오지 말라고 엄한 표정을 짓는다.


5초쯤 지났을까, 그냥 가려는데 아이가 선생님, 일루 와, 하며 다시 부른다.

난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꾸고 아이가 있는 조회대 위로 입장을 허락받은 손님처럼 조심스레 올라간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이는 거기까지만 오라고 하면서 뭔가 하던 걸 들고 쓱 돌아앉는다.

너무 하다 싶어 나를 오게는 했지만, 뭘 하고 있었는지 까지는 보여주기 싫은가 보다.





뒤돌아앉아 계속 오디를 찧으면서 아이는 뭔가를 끝없이 중얼거린다.

아이의 대화 상대는 인형 손님들이다.

아이고, 손님들이 많네.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쉿, 그런다.

아이의 등 뒤에서 난 읽던 책을 읽는다.

아이는 찧는 도중에도 중간중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경계한다.

그 분위기의 지엄함 때문에 난 어서 교실로 가서 공부하자는 말을 차마 못하고 멍하니 기다린다.

몇 분이 지났는데 아이가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내게 묻는다.


"오디 좋아?"


갑작스러운 물음에 내가 멍청하게 있자 아이가 발까지 구르며 재차 묻는다.


"오디 좋아? 오디!"


"어, 나 오디 좋아... 하는데... 왜?"


내 말에 아이가 약간 짜증 내는 얼굴을 하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을 신으면서 쏘아대듯 말한다.


"일루와. 여기 앉어. 딴 데 가는 거 아니야. 알았지?"


알았다고 말하는 내가 못 미더웠을까, 아이는 내가 보던 책을 휙 뺏더니 바닥에 척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깔개 가운데로 끌더니 다시 다짐한다.


"책 보지 마. 여기 있어. 알았지?" 





아이가 가고 나서야 아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보인다.

학교 뒤편 밭에서 딴 오디를 흙에 섞어 주워 온 나무 도막 위에 놓고 찧어 놓았다.

아기 담요 같아 보이는 깔개는 이 놀이를 위해 집에서 가져왔나 보다.





잠시 후, 후다닥 돌아온 아이가 내게 따 온 오디를 내민다.

작은 손에 작은 오디들. 앙증맞다.

와, 맛있겠네. 고마워, 하면서 하나를 집으려는데 아이가 매몰차게 안 돼! 하며 내 손을 탁 친다.

그러더니 자기의 깔개에서 내 등을 밀어낸다.

난 다시 아까처럼 밀려 나온다.

아이 역시 아까처럼 등을 돌리고 앉아 따 온 오디를 찧는다.

오디를 찧는 손끝이 절도고 있고 야무지다.




잠시 후, 아이는 또 내게 자기의 깔개를 맡기고 담장으로 달려간다.

돌아 온 아이 손에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다.

아직 젖살이 안 빠진 아이의 하얀 손 위에 놓인 붉은 장미. 수묵화같다.

그리고 꽃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따서 찧어 둔 오디 위에 올린다.

바람이 슬쩍 불어 장미 꽃잎이 팔랑 날아간다.

아이는 으이구, 일루 와! 하면서 꽃잎을 다시 주워 올려놓는다.


바람이 멎자, 이윽고 아이는 나를 향해 돌아앉는다.

아이의 손에는 예쁘게 장식된 요리가 들려 있다.

아, 나 주려고 만든 거구나.



소꿉 놀이의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소꿉놀이를 혼자 할 수 있는 아이는 세상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볼 줄 안다.

모든 아이가 혼자 소꿉놀이를 좋아하지만 모든 아이가 할 줄 아는 건 아니다.

어떤 아이는 혼자의 놀이를 감당하지 못해 친구를 끌어들인다.

친구와 함께 하면서도 주인공 역할은 엄두를 못내고 스스로 조연만 자처한다.

이 아이는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인형 친구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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