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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ul 19. 2016

새엄마인데... 딸과 친해지고 싶어요.

재혼가정 새엄마가 아이와 가까워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질문 :

저는 계모입니다. 남편에게는 2학년짜리 딸 하나가 있습니다. 수줍음이 많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남편은 아이가 6살 때 이혼했고 8살이던 작년에 저와 재혼했습니다. 만 1년 되었습니다. 남편을 사랑하고 있고 아이와도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이는 아직 저에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아이는 친엄마를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만납니다. 주로 친엄마가 쉬는 날 와서 데려가서 저녁때 다시 데려다줍니다. 아이는 저에게 '엄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아빠가 시키면 할 수 없이 부르긴 하는데 저와 둘이 있으면 안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한 것들도 저에게 일부러 보여주지는 않아요. 가끔 제가 우연히 본 것처럼 해서 칭찬해 주면 좋아하긴 하면서도요. 남편은 아이가 친엄마를 만나 정을 못 떼서 저한테도 마음을 안 주는 거라고 앞으로는 생모를 만나지 만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저와 아이가 서로 시간을 많이 보내게 하려고 시부모님 댁에서 분가도 했습니다. 남편은 저더러 아이에게 오냐오냐하며 끌려가지 말고 다른 엄마들처럼 야단도 치면서 정을 쌓아보라고 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아이는 은근히 저에게 냉정합니다. 아이는 저에게 딱히 내색하지는 않지만 친엄마 만나는 걸 꽤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학교에서 말은 별로 없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지낸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좋은 친구라도요. 좋은 방법이 있을까 해서 여쭙니다.






답 :

아, 참 좋은 엄마가 되려 애쓰시는군요. 그것만으로 이미 좋은 엄마세요. 질문만 읽었는데 벌써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염려 마세요. 아이도 엄마를 좋아하게 될 겁니다. 암요. 그런데... 스스로 '계모'라 칭하시는군요? 우리나라 사회에서 계모는 '아버지가 재혼함으로써 생긴 의붓어머니'라는 사전적 의미 외에 몇 가지 정서적인 함의가 있지요? 전처소생의 아이들을 학대하는 부정적인 뉘앙스 말입니다. 장화 홍련, 콩쥐팥쥐... 이런 이야기의 영향 때문이겠지만요. 앞으로는 '계모' 말고 '엄마'라고 생각하세요.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시잖아요. 그럼 엄마죠. 언제나 살 비비고 싶은 대상. 힘들 때마다 돌아가 안기고 싶은 엄마. 님은 그런 엄마가 되실 겁니다. 아니, 이미 되셨어요. 


* 외로워 마세요. 이미 우리 사회에 이혼, 재혼 가정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담임했던 그 어떤 반도 재혼 가정의 아이는 있었습니다. 당연해요. 우리나라 이혼율을 보면, 열 쌍의 부부 중 한 쌍은 이혼했으니까요. 또 이 중 상당수는 다시 재혼합니다. 그렇다 보니 새엄마, 새아빠를 둔 아이도 당연히 많지요.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부모가 이혼, 또는 재혼했다는 걸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교실에서는 숨기더군요. 어떤 부모는 자기들이 이혼, 재혼했다는 걸 아예 밖에 나가서 말하지 못하게 아이 입단속을 합니다. 그런 분들 입장에서는 그게 감춰야 할 일인가 본데 아이들 입장에선 이게 참 곤란한 일이거든요. 아이들은 친구들과 이 얘기 저 얘기 떠들면서 놀게 마련이잖아요. 2학년 아이들 노는 거 옆에서 가만 들어보면 정말 별 얘기 다 하거든요. 엄마, 아빠 싸운 얘기, 언니 오빠들 얘기... 아이들이 흉보려 일부러 일러바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자기의 일상이니까 말하는 겁니다. 소꿉장난을 해도 2학년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엄마, 아빠 놀이를 하는데요. 엄마 아빠가 평소 주고받는 얘기들이 거의 다 나와요. 그걸 옆에서 들으면 정말 웃겨서 킥킥 웃음이 나오죠. 아이들 단골 놀이인 엄마 아빠 놀이에서 나오는 대화를 볼까요?


- 으이구, 우리 자기 또 술 먹었떠요? 아주 자알 한다, 자알 해.

- 내가 지난번에 술 그만 먹으라 그랬어, 안 그랬어. 응? 응?

- 그래, 이번엔 또 누구랑 술 먹었어? 빨랑 말 못해? 응? 응?

- 얼마나 긁었는데? 자꾸 그러기만 해 아주. 이혼인 줄 알아. 응? 응?


2학년 아이들 표현이 재미있죠? 본의 아니게 아이들 부모님의 사생활을 다 엿듣는 민망함이 저학년 담임에겐 있답니다. 이런 아이들이 말하다 보면 엄마, 아빠 얘기가 안 나올 수 없어요. 이럴 때 자기 부모가 이혼 한 상황을 비밀로 한구석에 감춰놓아야 하는 아이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다른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데 반해 마음 한 구석이 그늘질 수밖에 없죠. 어른이 이혼하고 재혼하는 건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2학년 아이들이 자전거 타다 넘어져 무릎이 까질 수도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걸 본인들이 먼저 무슨 죄인 양 감추는 모습을 보이니, 순수한 아이 입장에서 얼마나 힘들까요? 정 부끄럽게 생각되면 어른들끼리만 쉬쉬하지, 왜 아이들 마음까지 답답하게 하는지 말이에요.


* 아이들은 원래 '새'엄마에게 마음을 잘 안 열어요.

아이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 사이에는 경계 본능이 있거든요. 님도 아이에게 조금은 경계 본능이 있을 걸요? 약자인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더 많은 게 당연합니다. 아이 입장에서 그게 두려울 수밖에 없어요. 그 두려움을 경계심으로 표현합니다. 이건 꽤 오래 유지됩니다. 가족의 역할(특히 아빠)에 따라 기간은 몇 년으로 짧아지기도 하고 더 길어지거나 평생 적대적 관계로 지낼 수도 있어요. 이럴 땐 무조건 아이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아이 마음 상태는 지금 어떨까요? 제가 담임했던 아이의 말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나는 원래 우리 엄마랑 학교에도 가고 놀이터에서도 놀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엄마랑 아빠랑 이혼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엄마랑 살면 좋겠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빠랑 살아야 된단 말이에요. 오늘도 난 아빠랑 학교 오기 싫었단 말이에요. 아빠가 차 탈 때 빨리빨리 타라고 그러니깐요. 난 차라리 엄마랑 살고 싶단 말이에요. 그런데 안 되죠. 아빠가 새엄마를 델구 왔으니깐요. 손을 '딱' 잡고."


저학년 중에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하는 아이가 있어요. 아이가 이렇게 말하면 또 주변 친구들도 한 마디씩 하겠지요?


- 헐, 새엄마가 왔다구? 와, 쩐다. 너 인제 뒤졌다.

- 야, 그럼 너 인제부터는 아빠 말고 새엄마랑 학교 오냐? 헐, 극혐.

- 야, 너는 더 좋을 수도 있어. 새엄마는 차 빨리 타라구 안 그럴지도 몰르니깐.

- 맞어, 원래 첨엔 새엄마가 이상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런데 또 좋을 수도 있어. 우리 엄마도 새엄마였단 말이야. 근데 지금은 좋아.

- 맞어. ㅇㅇ네 새엄마 되게 좋아. 지난번에 나랑 ㅇㅇ한테 하드 사줬어. 우리 엄만 새엄마 아니지만 파리채로 날 막 때리잖아.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드러나지요? 아이가 아빠를 부담스러워하는 건 차를 빨리 타라고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핏줄의 관계로 치환하지 않아요. 얼마나 친절한 지가 중요합니다. 쉽죠? 친절한 새엄마는 과거에 '새엄마'였지만 지금은 한 아이의 '좋은 새엄마'인 거지요. 그런데 아빠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인심을 잃고 있잖아요. 오히려 아이로 하여금 엄마를 그리워하게 만드는군요. 엄마만큼 친절하지 않은 거, 그 이유로 말입니다. 아침에 등굣길에 차 빨리 타는 게 뭐 그리 중요하길래요. 엄마는 아이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웠는데 아빠는 차를 빨리 타라고 야단이나 치고 있으니 아빠는 그 행동으로 모성애를 심어 줄 기회를 잃었군요. 어른들, 특히 아빠들은 아이의 이런 섬세한 감정을 쉽게, 또는 모르고 지나치곤 합니다. 아이로선 정말 중요하고 당연한 건데도 말이죠. 이 아이는 엄마랑 사는 게 좋았나 봐요. 그런데 엄마는 아이에게 어떤 의논도 없이 이혼을 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아이도 엄연한 당사자인데 어른들이 마음대로 결정했어요. 더 치명적인 건 이혼하면서 아이에게 누구와 살고 싶은지를 물어보지 않은 겁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면 엄마 손길이 필요한 나이잖아요. 그런데 아빠가 아이 동의도 없이 아이를 '붙잡아' 키우고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거부했거나(이런 경우는 많지 않지만), 아빠가 아이를 안 줬겠지요. 아이 양육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정작 아이는 소외되었습니다. 마치 물건처럼요. 그러니 아이 입장에서 아빠가 좋을 리 없지요. 새엄마는 당연하고요. 결국 아빠 때문에 죄 없는 새엄마가 힘들게 된 겁니다.


재혼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 앞에 여자 어른이 떡 나타났잖아요. 그것도 '아빠 손을 딱 잡고'요. 아빠가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할 수 없이 아빠와 잘 지내보려고 애쓰던 아이에겐 이 장면도 충격입니다. 새로 나타난 아줌마가 아빠와 한 편인 걸 확인했으니까요. 자기와는 손도 잘 안 잡고 차에 빨리 타라고 야단만 치면서 모르는 아줌마 손을 딱 잡고 오니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어요? 아이는 이제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합니다. 큰일 난 거죠. 내 편이 없으니 난 어떻게 사나, 걱정되지만 무력한 마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아이는 불안, 우울 증세를 보입니다. 이건 아이가 정신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오래 지속됩니다. 이 아이도 교실에서 저를 꽤나 힘들게 했습니다. 사소한 일로 예민하게 화 내고 큰 소리 내 울고, 떼쓰고... 그런데도 아이의 부모님은 아이가 불안한 까닭을 잘 알아채지 못하더라고요. 그저 아이의 친구 문제 때문에 그런 줄 알았대요. 아이의 심리상태는 갑자기 변하는 법은 없어요. 반드시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이 아이 또한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하느라 애쓰다 보니 화 내고 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부모님 또한 이혼, 재혼의 과정을 겪으면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상처를 스스로 몸에 새기며 얼마나 아파했을지 모른 거지요. 원래 인생이란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내 아픔이 타인의 아픔보다 더 아프게 마련이니까요. 그 아픈 와중에 아이는 이런 걱정을 합니다.


'저 아줌마는 날 좋아할까? 무섭지는 않을까? 내가 잘못하면 아빠한테 일러서 날 혼나게 하지는 않을까? 왜 아빠는 엄마를 안 데려오고 저 아줌마를 데려왔을까? 내 편을 들어주던 내 진짜 엄마는 어디 갔을까? 엄마는 날 그만 보고 싶을까?'


아이가 새엄마를 멀리하는 건 새엄마가 뭔가 자기와 안 맞아서 일 수도 있지만, 친엄마에 대한 애정 때문입니다. 자기가 새엄마를 좋아하게 되면 친엄마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나를 낳아주고 사랑해 준 내 엄마를 내가 배신하다니. 그래서 새엄마에게 선뜻 마음을 주지 못 합니다. 2학년이면 아직 어린것 같지만 엄마에 대한 애틋함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강한 대상이었던 엄마라는 존재가 아이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이 입장에서 친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생각해 보세요. 아빠와 결혼해서 자기를 낳아 기르다가 아빠에 의해 밀려난, 불쌍한 존재입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집에서 엄마가 나갔으니 아빠가 엄마를 쫓아냈다고 이해합니다. 엄마, 아빠 사이가 어떠해서 이혼했는지는 아이가 알 바 아닙니다. 다만 엄마가 나를 보고 싶어 하는데 아빠가 못 보게 하고, 엄마는 나와 살고 싶어 할 텐데 아빠가 그것도 못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빠가 이번엔 어디서 새엄마를 데려왔잖아요. 아이로선 더 이상 희망이 없어지는 겁니다. 자기 친엄마가 다시 집에 와 살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잖아요. 친엄마는 그렇게 불쌍한 존재기 때문에 자기까지 새엄마를 좋아하면 친엄마에게 너무 미안한 겁니다. 죄책감 때문이죠.

이 죄책감이 아이로 하여금 아무 잘못 없는 새엄마에게 거리를 두게 만들고 있어요. 이것과 관련해서 아이의 아빠 책임이 큽니다. 이런 사례는 아주 많아요. 아니, 제가 교실에서 본 건 거의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냉정하게 나오는 건 아빠 때문입니다.

상담하다 보면 엄마를 못 만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빠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결사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반대하는 건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분들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하시더군요.


- 친엄마가 아이를 자주 만나면 아이가 새엄마보다 엄마를 더 좋아할 것이다.

- 엄마와 아이를 서로 못 만나게 하면 언젠가 정이 떨어질 것이다.

- 어차피 아빠가 키울 거니까 친엄마는 안 만나는 게 아이에게도 더 안정적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문젭니다. 아이를 뱃속에 열 달 담아 두었다가 배 아파 낳아 본 적 없는 '수컷'들의 한계죠. 엄마와 딸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무리 아빠가 못 만나게 해도 보고 싶은 마음을 가둘 수는 없어요. 절대 불가능해요. 제가 그동안 담임했던 아이들 보니까 어느 정도 머리 커지면 다들 엄마에게 가더라고요. 또 엄마와 살지는 않더라도 자유롭게 엄마와 만나고 전화도 하더라고요. 물론 엄마와 살던 아이들은 아빠와 만나고요. 비율 상으로 아빠와 살던 아이가 엄마 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천륜이 엄마와 자식 사이에는 있으니까요. 배 아파 낳았잖아요. 어릴 적 먼 나라로 입양당한 아이가 왜 엄마를 찾아오겠습니까? 안 찾아오고 못 견디니 찾아오는 겁니다. 모성애는 이렇게 위대합니다. 그런데 지금 님의 남편은 아이를 볼모로 정작 아이와 님을 괴롭히고 있어요. 아이가 친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건 아이와 친엄마의 영역입니다. 왜 아빠가 그걸 맘대로 결정합니까? 아빠 역할에 그런 자격이 주어집니까? 설마 민법 4조에 나와 있는 만 20세까지는 아빠가 친권... 이 조항을 무기로 내세우는 건 아니겠죠? 아이고, 참.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법에 의해 바뀔 수 있을까요?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만 20세가 넘어 성년이 되면 친권은 자동으로 소멸하잖아요. 다시 말해, 아빠가 아무리 막아도 어차피 아이 스스로 엄마에게 갈 권리가 있는 겁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가겠다고 하면 아빠가 못 막아요. 그런데도 지금 님의 남편이 기어코 친엄마로부터 아이를 떼어 놓으려는 의도가 뭐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아이 친엄마를 벌주려는 거 아닙니까? 이혼했으니까, 사이가 좋을 리 없잖아요. 아빠는 아이의 친엄마가 미울 거고 그 와중에 아무 죄 없는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요.

아무리 어른들이지만 아이에게 잔인한 일입니다. 치사해요. 우리 반 아이들 표현대로라면 완전 흥칫뿡! 이죠. 

아이도 생각이 있어요. 엄마가 보고 싶은지 아닌지 다 스스로 판단합니다. 아이가 6살에 엄마와 떨어졌잖아요. 그 정도 나이면 엄마에게 아주 깊은 정이 들고도 남을 나이입니다. 아이 입장에서 엄마가 아빠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알아도 아이의 감정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6살까지 살면서 아빠랑 보낸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엄마와 함께 지내며 쌓아 놓은 사랑과 신뢰의 시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양육을 엄마가 주로 담당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아이가 아빠를 더 좋아할 가능성도 거의 없고요. 결국 아이와 새엄마의 관계는 아이와 아빠 관계의 연장선인 거지요. 아빠가 이혼과 재혼을 하면서 아이에게 어떻게 신경 쓰셨는지를 돌이켜 보세요. 아이의 모든 절망을 있게 한 근본 원인을 제공한 아빠가 해명해줘야 합니다. 물론 친엄마 역시 아빠와 이혼함으로써 아이를 외롭게 한 책임을 아이에게 사과해야 해요. 그 과정이 잘 되었다면 아이는 지금 새엄마인 님과 더 가까운 모녀관계가 되었을 겁니다.


아이가 새엄마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냉정한 게 차라리 낫습니다.

이 부분이 희망적입니다. 어쨌든 아이가 새엄마에게 자기감정을 드러내고 있잖아요. 차가운 감정이긴 하지만요. 제 짐작에 새엄마로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가 냉정하진 않았을 것 같네요? 처음엔 무반응이었지요? 원래 아이가 누구를 만나면 무반응부터 시작하거든요. 저는 매년 경험합니다. 해마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거든요. 아이들은 새 담임인 저를 처음부터 좋아할까요? 아닙니다. 새 담임인 저를 좋아하자니, 작년에 자기를 사랑해 주셨던 담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잖아요. 죄책감 말입니다. 물론 전 담임이 헤어지면서 '내년에 새 담임 선생님 만나서도 잘 지내렴~'하셨다면 조금 낫긴 하겠네요. 제가 관찰해 보면 아이가 낯선 사람을 만나면 친해지게 되는 과정은 대충 이러하더군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이들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4단계로 쪼개 보겠습니다.


1단계 : 무반응의 시기(난 작년 선생님이 더 좋아. 새 선생님한테는 관심 없어!)

2단계 : 비판적 냉각기(작년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새 선생님은 남자잖아. 난 남자 선생님 싫어!)

3단계 : 관심이 연민으로 이어지는 시기(선생님이 불쌍해 보여. 남자인 게 선생님 잘못은 아니잖아? 나라도 좀 잘 해 드려 볼까?)

4단계 : 연민의 기억들이 쌓여 호감으로 표현되는 시기(지나고 보니 우리 선생님도 괜찮은걸. 지금 난 우리 선생님이 제일 좋아!)


이건 아이와 담임 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가 다 비슷해요. 님의 경우 1단계를 지나 2단계에 진입하셨습니다. 그동안 참고 애쓰신 결과입니다. 그럼 3단계는 어떻게 가야 할까요? 아이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하는 단계 말입니다. 3단계, 4단계는 이어져 있습니다. 일단 단계에 접어들면 가속도가 생겨요. 거의 동시에 오기도 합니다. 지금은 새엄마와 아주 친해진 아이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 비가 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 씌워주느라 새엄마 어깨가 비를 막 맞았잖아요. 안경에도 물이 묻었더라고요. 내가 딲아줄까 생각했죠.

- 아빠랑 외식할 때 아빠는 만두, 새엄마는 김밥을 시킨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랑 새엄마 둘이 외식할 땐 김밥 대신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시켰다요.

- 아빠가 장에 가서 칠천 원 주고 새엄마 쓰레빠를 사 왔죠. 그런데 새엄마가 나한테 만 원짜리 장화를 사줬죠. 쓰레빠보다 더 비쌌죠.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얘기지요?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아이에 대한 새엄마의 태도가 헌신적이시네요. 아이 대신 비를 맞고, 좋아하는 김밥 대신 아이를 위해 떡볶이를 시키고, 더 좋은 장화를 사 주시는 헌신 말입니다. 반면, 아빠는 아이와 새엄마의 관계에서 별다른 역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빠에겐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겠군요. 우리 사회에서 아빠의 한계가 그렇습니다. 아빠들이 살가운 무언가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요. 하지만 새엄마의 태도는 눈여겨보세요. 사례에서 보여주는 새엄마의 태도가 바로 '친엄마의 태도'와 같잖아요. 아이는 친엄마 같은 새엄마를 원하는 겁니다.


*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주세요.

질문 속에 나타난 아빠의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이혼하는 과정에서 아이도 참여할 권리를 주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이가 6살이었으니까...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와서 그건 의미가 없지만요. 하지만 앞으로 아이가 새엄마와 가까워지는 속도는 아이가 주도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빠가 재촉하지 말라는 겁니다. 또 새엄마 역시 '오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시간에 의지해 보세요. 아이가 새엄마를 반드시 '엄마'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도 버리세요. 호칭이 주는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새엄마를 자신의 엄마 대신으로 인정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요. 아줌마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 아이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 새엄마를 이용할 겁니다. 그게 아이 방식입니다. 서운해하실 거 없어요. 이혼하면서 아이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무한입니다. 시효의 만료가 없어요.

그래서 이혼한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슴속에 지니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젠 가슴속에만 지니고 있지 마세요. 아빠도 이제는 마음속 생각을 아이에게 표현하게 하세요.


"엄마가 보고 싶은데 못 봐서 힘들지? 아빠가 이혼해서 네가 엄마랑 같이 못 살게 만들었어. 너무너무 미안해.

아빠도 엄마가 서로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사실은 아빠도 엄마도 힘들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이혼했어. 그리고 다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새엄마랑 결혼했어.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아빠 혼자 결정해서 미안해. 그래도 아빠는 너랑 같이 살아서 너무 좋아. 네가 아빠에게 잘 해서 행복해. 아빠랑 살면서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엄마를 보게 해 줄게. 꼭 말해줘."


어려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진지한 말을 들으면 그걸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써요. 아빠가 이렇게 말해주면 그나마 아이의 외로움이 덜 할 겁니다. 아이가 엄마를 만나러 가는 날엔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직접 아빠가 아이를 엄마에게 데려다주세요. 그럴 때는 새엄마를 앞세우지 마세요. 아이가 새엄마와 친엄마 사이에서 난처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세요. 아이만의 감정을 존중해주세요. 아이 보는 데서 아이 엄마와 친한 척 인사도 나누세요. 정 안되면 연기라도 하세요. 이렇게 해야 아이가 안심해요. 친엄마를 못 만나게 하면 새엄마가 더 좋아질 거라고요? 그건 환상입니다. 서로 다른 영역의 문제거든요. 아이가 원하면 얼마든지 엄마를 만나게 해야 합니다. 만나고 안 만나고는 오로지 아이가 결정해야 합니다. 아이가 더 자주 보고 싶어 하면 친엄마도 어떻게든 시간을 희생해서 충분히 만나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아이가 엄마와 살고 싶다고 하면 엄마에게 보내 줄 생각도 해야 합니다. 엄마 여건이 된다면 가정 체험학습을 학교에 제출하고라도 며칠 보내세요. 초등학교는 한 달까지 체험학습을 낼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아이에게 숨기지 마세요. 아이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고, 새엄마와 아빠는 아이 편에서 뭐든 하겠다는 믿음을 주세요. 엄마 역시 아이를 키울 여건이 안 되면 그 처지를 아이에게 솔직히, 진심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아빠 핑계만 대시면 안 됩니다. 2학년이면 다 이해합니다. 아이는 기본적으로 엄마, 아빠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는 전제를 하고 자기들의 상황을 숨기거나 왜곡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바보 만듭니다. 어른들 간의 미성숙한 감정으로 아이를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 마세요. 이미 한 번 상처 준 걸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죄를 만들지 마세요.


* 부모 사이의 나쁜 감정을 아이에게 투사하지 마세요.

너무 어릴 때 친엄마와 헤어졌다가 새엄마를 만난 제 반 아이가 가족화를 그린 걸 본 적 있어요. 새엄마, 아빠, 할머니, 동생은 예쁘게, 친엄마는 나쁘게 그렸더라고요. 이것저것 물어보니 친엄마에 대한 감정이 나쁜 상태였습니다. 아이가 가족화에 친엄마를 그렸다는 건, 아이 나름대로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잖아요. 그런데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친엄마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인 설명을 많이 들었으면 나쁘게 그렸겠어요?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아이가 애잔했습니다. 아이의 친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님의 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님과 친해지면 반드시 친엄마에 대해 물어올 겁니다) 아이의 속마음을 가장 먼저 살피세요. 아이가 물어온다고 해서 어른들의 감정대로 말씀하지 마시고 아이 마음에서 좋게 말해주세요. 이혼했을 정도면 둘 다 전 배우자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겠죠? 그래도 아이 앞에서는 험담하지 마세요. 엄마가 좋은지 싫은지는 아이가 판단할 영역입니다. 나쁜 배우자라도 아이에겐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들어 거북할 만한 내용은 아이 앞에서 말하지 마세요. 제가 담임했던 아이들의 경우는 친척(특히 조부모)들이 안 좋게 말하더군요. 아이 앞에서 아이 친엄마, 또는 친아빠를 비난하는 거지요. 앞으로는 친척들이 아이 앞에서 함부로 떠드는 걸 못하게 하세요. 아이가 어려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안 잊어요. 아빠 몰래 그리워하는 엄마를 욕하는 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다 상처로 남아요. 험담하는 어른들은 그걸로 잠시 스트레스는 풀겠지만, 아이로서는 몰라도 될 사실을 알게 되고 속앓이를 합니다. 아빠가 친엄마를 못 만나게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뭐냐고 제가 질문드렸었지요? 그때 이런 대답을 하셨어요.


'이혼 사유였던 엄마의 무절제한 행동을 아이가 보고 배울까 봐.' 

저는 그걸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많이 미워하는구나. 그래서 아이를 못 보게 하는 걸로 괴롭히고 싶은가 보다.'

이혼한 아빠들은 아이의 성장을 걱정(?) 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전처를 혼내주기 위해 아이를 못 보게 합니다. 제 반 아이의 경우 특히 할머니(시어머니였던)의 저주가 대단하더군요.


"아이고, 슨상님. 그년이 어떤 년인지 알어유? ㅇㅇㅇ하고 ㅇㅇㅇ하고 ㅇㅇㅇ한, 천하에 죽일 년이래유. 그런 년이 어떻게 자식 키울 자격이 있겠어유."


멀쩡히 잘 살던 자기 아들과 이혼했으니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히 죽일 년이겠지요. 자식을 두고 갔으니 독한 엄마고요. 자기는 더 한 것도 참고 사셨는데 요즘 젊은것들은 툭하면 이혼을 하니 그것도 미우셨겠네요. 손주 담임 앞에서까지 이혼 한 며느리에 대해 이런 저주를 퍼부을 정도면, 정작 어린 손주 앞에서는 얼마나 엄마 흉을 봤을까요. 그게 죄인 줄도 모르고요. 아이는 어릴 때부터 친가 쪽 친척들로부터 엄마에 대한 험담을 들으며 자랐겠지요? 그런데 우리 솔직해져 보자고요. 이혼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 때문에 생기지는 않잖아요. 아이의 엄마가 ㅇㅇㅇ하고 ㅇㅇㅇ하고 ㅇㅇㅇ한, 천하에 죽일 년이 되게 된 데는 남편 잘못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어디 남편뿐이겠어요? 저주를 퍼붓는 시어머니 역할도 있겠네요, 뭐. 그런 분위기에서 아이가 자라는 내내 엄마에 대해 얼마나 섬뜩한 증오감을 지닐지 생각해 보세요. 며느리가 미워도 아이를 생각해서 좀 참으신다면 아이는 엄마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필요 없는 증오를 키우는 셈이잖아요. 또 나중에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겠습니까? 그걸 생각하면 어른들이 아이에게 너무 무책임한 거지요.

제가 담임했던 또 다른 아이와 상담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아이의 말은 대충 이랬습니다.


"우리 엄마 가요. 자기만 재미있게 살려고요. 나를 버리고 갔단 말이에요. 할머니가 다시 와서 빌면요. 엄마를 받아준다고 그랬는데 안 왔단 말이에요. 그냥 와서 빌면 엄마랑 나랑 살 수 있는데... 와서 그냥 빌지... 안 왔단 말이에요. 이담에 내가 어른이 되면요. 돈 벌어갖구 아빠 트럭 사 주고요(아빠 직업이 트럭 운전). 할머니는 지팡이 사 줄라고요. (엄마한테도 사 줄 거냐고 묻는 저의 질문에) 엄마는... 그냥 물어만 볼라고요. (왜?) 엄마가 뭐 갖고 싶은지 내가 지금 몰르니깐요."


아이는 어른들이 말해 준대로 엄마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라는 내내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대신 증오심을 키웠을 겁니다. 그래서 아빠, 할머니 모두에게 큰 선물을 사 주는 걸로 키워 준 효도를 하겠다고 하는군요. 제가 물어보고 나서야 엄마에게는 물어만 보겠다고 합니다. 아직 엄마가 밉다는 걸 의미하겠지요? 그런데 아주 미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뭐 갖고 싶냐고 물어보겠다고 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니까 나중에 말입니다. 언젠가 엄마를 볼 거라는 기대가 느껴지지요? 엄마를 보면 잘 해주고 싶은 마음도 어느새 자라 있는 듯합니다. 보세요. 주변 어른들 모두 엄마를 미워하는 현실에서도 아이는 나름대로 엄마 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은 아이가 어려서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아이는 당면한 걸 묵묵히 견디며 성장합니다. 성장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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