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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un 23. 2015

아이들의 삶을 바꾸는 체험

요즘은 학교에서 다양한 체험을 아이들에게 준다.

무용이나 국악만 지도하는 강사를 따로 초빙하거나

숲의 생태, 체육활동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강사도 있다.

나라가 잘 살게 되면서 그런 전문가를 초빙할 여력이 학교에까지 퍼진 것이다.

선생으로 먹고살아오면서 하필이면 나를 담임으로 만났던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고루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한 일이었는데, 다행이다.


내가 어릴 땐 한 명의 담임 교사에게 모든 과목을 배웠다.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은 서예를 하신 여자 선생님이셨다.

예능 시간은 주로 서예 시간이었다. 음악은 거의 하지 않았다.

서예 시간엔 붓, 벼루, 먹, 신문지를 항상 준비해야 했다.

문제는 신문지였다. 시골에서 신문이 흔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준비물을 챙겨가지 않으면 손등을 맞았다.

한 번 맞아 본 후, 너무 아파서 난 온통 서예 준비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고 가다 신문을 발견하면 있으면 가방에 주워모았다.

변소에서 휴지 대용으로 쓰던 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형이 다 쓴 공책을 내 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신문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공책을 가져와도 좋다는 말을 듣지 못한 나는 너무 불안해서

학교 선생님께 가서 우리 집에는유,  신문지가 없거등유, 그래서 그러는데 다 쓴 공책 가지구 와두 되나유하고

물어보라 시던 어머니 말씀에도 안심이 안 돼 그날 수업을 빠지고 말았다.

아침에 학교에 가자마자 우는 척을 하면서 배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조퇴를 맡은 뒤 와 버린 것이다. 

막상 학교에서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이산 저산 다니면서 도시락도 먹고 원추리를 가방 가득 뜯어 집에 가져갔다.

엄마가 뭔 원추리를 이렇게 많이 뜯었냐며 저녁에 국 끓여 주시던 생각이 난다.

결국 그다음 미술시간에도 난 신문지 대신 공책을 가져가도 되는지 여쭤보지 못했다.

그냥 친구들에게 물으니 될 것 같다는 유권해석을 해 주었고, 불안해하던 나를 향해 선생님께서도 별 말씀 없이 넘어가셨다. 

서예 시간에 붓 잡는 걸 배우던 일이 생각난다.

다른 일 보다 그 일이 더 생각나는 건 선생님의 무서운 지도 방법 덕분이다.

준비물 안 가져온 아이들은 손등을 맞고 뒤에 나가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손을 들고 벌을 서고 있고

선생님은 무서우신 표정으로 붓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데

잠시라도 한 눈을 팔다간 손등을 맞을게 뻔하니 집중을 안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한 번 가르쳐 주신 뒤 책상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시면서 검사를 하시곤 했다.

가르쳐 주신 대로 못하면 손등에든 팔에든 회초리가 날아왔다.

얼마나 아프던지, 한 번 맞고 나면 그 시간 내내 시리고 매웠던 기억이 난다.

우리 반이 60명이 넘었으니, 그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시자니 어찌 엄하게 안 하셨을까.

하지만 겁 많던 나는 모든 학교생활을 그렇게 집중을 해야 해서 그런지 그 시기의 일기는 주로 피곤하다는 내용이 많다.


그 무렵, 난 다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선생님과 다른 학년 선생님이 서로 과목을 하나씩 바꿔서 가르치신 것이다.

그 선생님은 음악을 가르치셨다.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전혀 무섭지 않으셨다.

난 그분이 때리지 않는다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분이 가르치는 음악은 그전에 배운 것과는 좀 달랐다.

그전엔 노래만 크게 부르거나 리코더로 부는 게 전부였는데,

그분은 2부 합창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한 음으로 나아가다 중간에 두 음으로 갈라지는 2부.

갈라진 두 음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같은 박자로 이루어져 있다.

두 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다투는 듯도 하고 또 어울려 화음을 낼 땐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조일 정도였다.

그 경험 때문이었을까, 난 그 뒤로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살았고

황인용의 영팝스, 박원웅, 이종환... 자정에 나오던 전영혁까지

팝송 순위는 물론이고 유명한 팝송은 기타 코드와 가사를 외워 기타를 치면서 혼자 불러보곤 했다.

시카고, 브라이언 아담스, 라크웰, 사이몬앤가펑클 포시즌즈, 레드제플린, 딥퍼플

그때 외우던 노래가 아직도 무심코 나오는 걸 보면 완전히 빠져 살았었나 보다.

대학에 가면서 팝에 대한 관심은 프로그레시브와 재즈로 옮겨갔고

나중엔 클래식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음악을 즐기는 일은 지금 나의 여가에서 가장 큰 부분이 되었다.


난 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내가 어디가 별나서 그런 것도 아닐 텐데

어릴 적, 사소했던 경험이 이렇게 내 삶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걸 보면,

지금 저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경험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국악 공부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땠느냐고.

아이들 대부분의 반응은 이러했다.


"근데요. 장구가 디따 크다요."


이렇게 귀여운 녀석들을 봤나.

장구 동영상을 검색해서 보여줬다. 영상을 보면서 요 녀석들, 저마다 중구난방 아는 척이 난무하다.

이 중 어떤 아이는 장구를 연주하는 아이가 될 수도 있겠고,

장구를 만드는 장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오늘의 첫 수업이 좋은 수업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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