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한다는 건 뭘까?
1학년 아이들은 자기가 아는 게 많다고(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정말입니다.)
우리 반 아이들도 전부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한 명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아이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물어봤습니다.
- 저는 책을 엄청 빨리 읽어요. 맨날 읽어야 되거든요.
- 엄마랑 백자 박물관에 또 갔거든요. 작년에도 갔었는데.
- ㅇㅇ태권도 다니는데 어떤 날은 거기서 공부도 해요.
- 난 ㅇㅇㅇ(방문 학습지)을 하거든요. 선생님 오시는 날 죽었어요. 숙제를 해야돼서.
아이들은 자기가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한다고 느끼는군요.
<많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자기 기준(생각)보다 많이 하는 걸 뜻하겠지요?
나는 책을 조금 읽고 싶은데(충분히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주 양육자(엄마)는 더 읽으라고 하니
아이들은 스스로 아는 게 많다고(자기가 원하는 것보다는) 생각합니다. 묘하게 말이 되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난 이미 아는 게 많아요!)은 나중에 아이가 공부를 싫어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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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많은 아이? = (아이들 표현으로) '똑똑한' 아이?
교사와 부모님 시각으로 바꾸면 이렇겠군요.
아는 게 많게 키운 아이? = 공부 잘 하는 아이?
교실에서 이 등식의 일치율은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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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잘 한다는 건 아는게 많은 걸 의미한다기 보다 끝까지 잘 듣고 이해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제시한 답이 문제 낸 사람이 원하는 것과 같아야 정답이니까요.
그러려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어야겠지요?
1학년 2학기 국어 <바른 자세로 이야기를 함께 듣기(국어책 100-103쪽)> 시간에 퀴즈 대회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아주 쉬운 문제지만 끝까지 잘 듣지 않으면 정답으로 인정받기 어렵게 문제를 냈는데요.
아이들에게는 미리 문제를 한 번만 들려줄 거라고 말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들려줍니다.
문제의 예를 몇 개 들어 드릴 테니 가정에서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문제) 더듬이가 있고 몸은 가늘며 날개가 노란색, 하얀색으로 아름다워요.
벌과 함께 꽃에 많이 날아와요. 정답은 두 글자인데 두 글자 모두 받침이 없어요.
정답이 무엇인지 국어책 13쪽의 맨 위 오른쪽 구석에 답을 쓰세요.
아이들은 정답이 '나비'인 걸 다 압니다. 퀴즈를 내기 바로 몇 분 전에 나비에 대해 배웠거든요.
아이들은 자신 있는 표정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게 문제군요.
'나비'라는 정답을 우선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국어책 13쪽의 맨 위 오른쪽 구석에'이라는 말까지 듣기 어렵습니다.
첫 문제에 대한 정답을 맞히는 아이는 15명의 아이 중 3명이군요. 세상에! 집중해서 듣는다는 게 그만큼 어렵습니다.
두번째 문제) 선생님은 남자일까요, 여자 일까요? 정답을 국어책 110쪽에 나오는 그림 중 단풍나무를 찾아 그 아래에 쓰세요.
이 문제 역시 아이들은 답을 모두 압니다.
하지만 자기가 답을 알아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 이어지는 문제의 다른 내용은 잘 안 듣습니다.
결국 똑똑한 (= 공부를 잘하는 = 시험을 잘 보는) 아이는 끝까지 잘 듣고 잘 읽는 아이입니다.
문제가 끝날 때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 줍니다.
"똑똑하다는 건 아는 게 많은 게 아니라 끝까지 잘 듣는 게 똑똑한 거야."
문제가 이어질수록 제가 원하는 정답에 가까운 아이의 숫자가 늘어갑니다.
원하는(맨 아래 오른쪽 구석에 있는 111이라는 글자 바로 위에 쓰라는 요구) 답을 정확하게 쓴 아이.
평소 덤벙거리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그래서인지 초반에 계속 실수를 하던 아이는 문제를 끝까지 듣고 정답을 쓴 경험을 한 뒤부터 무척 정답에 신경을 쓰더군요.
혹시 글자를 틀렸을까 봐 깨끗하게 지우고 다시 쓰는 정성까지 보이는 걸 보니 원래 신중하고 침착한 성품인 것 같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람 중 가장 어른을 찾아 그 낱말에 동그라미를 하라는 문제입니다.
잘 들어야 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과제 충실도가 높게) 동그라미를 표시해야 하는 문제지요.
'할아버지'라는 글자 중 한 글자라도 빠지거나 글자 위로 연필선이 지나가게 동그라미를 그리면 정답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출제자가 원하는 것) 대로 따르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까다롭게 요구를 할수록 아이들은 제 말을 더 자세하게 들으려 애씁니다. 집중에 대한 난이도는 학년에 맞게 조정하면 됩니다.
"똑똑하다는 건 아는 게 많은 게 아니라 잘 듣는 거야."
이 말이 반복될수록 아이들도 제 말을 함께 따라 합니다. 아이들 또한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렇게 10개 정도의 퀴즈가 지나가자 모든 아이가 정답을 맞혔습니다. 듣기 연습이 된 셈입니다.
고작 30여 분의 활동이었고, 1학년 아이들의 특성상 머잖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긴 합니다만,
이 경험은 아이들의 집중에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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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를 내는 동안 정답을 맞히지 못해 속상해하거나 화를 내며 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자긴 책도 많이 읽고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것도 많아 선생님이 내는 문제도 다 아는데(빨리 풀기까지 했는데) 그 답을 인정받지 못했다며 섭섭해했습니다.
"할아버지"에 정확하게 동그라미를 한 건 않았지만 누가 봐도 "할아버지"에 동그라미를 한 건 맞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따질만하지요.
하지만 저는 연필선이 조금이라도 빗나가 다른 글자에 닿거나 동그라미를 네모나 세모 모양으로 그리면 틀린 답으로 했습니다.
"네가 정답으로 인정받고 싶으면 선생님(말하는 사람, 출제자)의 규칙(문제)을 따라야 하고 이를 따르기 싫으면 오답" 을 감수하게 하는 거지요.
매정하지요? 네, 매정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유연합니다. 그래서 몇 문제를 틀리다 보면 다들 제 규칙에 따릅니다.
결국 아이 행동의 변화(자기 고집 포기하고 타인의 규칙에 나를 맞춰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가 가능다는 의미겠군요.
하지만 머리가 어느 정도 크면(자의식이 생기면) 이런 식으로 교사가 마음대로 이끌어 가는 수업은 안 먹힙니다.
아이가 연필을 내던지고 "안 해!" 하면 끝이거든요.
하지만 아이가 앞으로 자라면서 치르게 될 수많은 시험은 아이에게 끝까지 듣고 읽는 능력을 요구할 겁니다.
또 아이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태도는 꼭 필요합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안 듣는 아이(못 듣는 게 아니라)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가정에서 부모님의 말을 끝까지 잘 안 듣는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끝까지 듣는 습관이 되어 있을까요?
슬프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릴 때부터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본 경험이 적거든요. 어린아이의 '상대'라면... 주 양육자를 의미하겠습니다.
그래서 주 양육자(엄마)와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를 들여다보면 아이의 듣기 말하기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주 양육자가 아이에게 주로 짧은 문장(아이의 사고를 확산시키는 문장보다는 주로 단답형, 지시형 문장이겠지요?)으로 시키는 대화를 많이 한다면,
또 아이에게 빨리빨리 하라고 채근하는 대화를 주로 한다면 어떨까요? 아이는 항상 마음이 급해지겠지요.
양육자로부터 어떤 말(지시하는 말)을 들으면 일단 마음부터 급해집니다. 안 그러면 엄마가 실망하거나(혼나거나 불이익을 당하거나),
처벌(먹을 걸 못 받게 되거나 동생에게 비교당하거나)을 받을지 모르니까요.
아이에겐 이런 것들이 혼나는 행동으로 느껴집니다. 지기는 싫고, 마음이 급해지니 끝까지 들을 여유가 없습니다.
앞 부분을 대충 듣고 빨리 움직여야 주 양육자에게 혼나지(버림받지) 않거든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이가 주로 경험한 대화(소통) 방식이 이런 것들 위주라면,
이 아이들은 타인의 말을 끝까지 여유 있게 듣지 못하는 아이로 자라 학교에 오겠지요. 지능과 관계없습니다.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한 결과니까요.
이런 문화에서 유아기를 보낸 아이가 학교에 오면 불안하고(언제 선생님께 혼날 지 모르니까) 급한(빨리빨리 움직여야 안 혼나니까) 아이로 보입니다.
이런 아이를 학기 초에 구별해서(학교생활 한두 달 지나면 교사들 눈에 띕니다) 일단 안심을 시켜 가라앉히는 게 중요합니다.
늦게 해도 되고(침착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혼내지 않을 거라는(불안하지 않게) 확신을 주는 거지요.
늦게 해도 혼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아이는 시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충분히 생각하게 됩니다.
정서행동에 특별히 문제가 없는 아이라면 몇 달 만에 좋아집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는 아이를 보면 부모님도 놀라시더군요.
아이가 이렇게 빠르게 변할 수 있는 건 그 아이가 원래는 침착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아기를 보내면서 채근하고 압박하는 성격의 주 양육자에 의해 키워지면서 아이도 힘들었던 거지요.
아이들과 집에서 이런 활동을 자주 하면 아이는 습관적으로 듣기에 집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