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일학년담임 Oct 02. 2019

우리 동네 홍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d


그는 휴전협정을 맺던 해 가을, 강원도 인제의 어느 강가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물컹하고 미끄덩한 물 느낌이 좋아 여름이면 강에서 살다시피 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혼자 헤엄쳐 강을 건널 실력이 되었다.


어느 날, 잠수해서 다슬기를 잡는 그를 보지 못한 동네 사람들이 고기잡이용 폭약을 터뜨리는 사고가 난다.ㅇ

정신을 잃고 떠 오른 그를 사람들이 꺼내 줘 목숨은 건졌지만 점점 귀가 안 들리게 된다.

귀에 좋다는 땅콩도 먹고 고등어도 기름을 내 먹어봤지만,

증상은 갈수록 심해져 사람들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작게 들린다.


귀가 안 들리니 수업을 이해하지 못해 성적이 떨어지고 귀머거리라는 놀림에 맞서 싸우는 일이 늘어간다.

아버지에게도 정신머리 빠진 놈이라고 야단을 맞는다.

점점 친구가 멀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보일러 기술을 배우러 갔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해 내쫓긴다.

군대에서 사격을 하는데 이명 증상이 심해져 두통을 앓는다.

상관에게 괴로움을 호소할 때마다 꾀병으로 몰려 빠따를 맞는다.

제대 하고 취직을 했지만 귀 때문에 내쫓기는 삶이 반복된다.

결혼을 약속하고 사귀던 여자가 떠난다.


하릴없이 시장 골목을 헤매던 어느 날, 귀머거리 뻥튀기 장수를 만난다.

그를 따라 전국을 떠돌며 밥하고 빨래해주며 뻥튀기 기술을 배운다.

몇 해가 지나 뻥튀기 리어카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집 근처 장터에서 장사를 시작하려는데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힌다.

귀머거리 아들을 둔 것도 창피한데 시장박닥에서 집안 망신시킬 일 있냐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편지 한장을 남긴 채 뻥튀기 리어카를 끌고 사흘을 걸어 춘천으로 온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옥시기밥 물 말아먹고 골목을 돌며 뻥튀기를 튀긴다.

그러다 마침내 장터 한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그를 버리고 떠난 여자가 미운 마음이 들때마다 '뻥', 고향의 어머니가 그리우면 '뻥'... 뻥튀기와 함께 그의 울분도 잦아들어간다.

어르신들은 이가 안 좋으니 퍼진 강냉이로 튀겨 드리고 젊은이들은 덜 튀겨 딱딱하지만 고소하게 튀긴다.

지긋하신 분들에겐 달게, 젊은 분들에겐 덜 달게 사람에 맞춰 튀긴다.

같은 뻥튀기도 그가 튀긴 게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줄을 선다.

어깨가 빠지도록 풀무를 돌려대면서도 힘든 줄을 모른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 본 국밥집 과부와 살림을 차린다.

다른 뻥튀기 장수들이 손님이 가져오는 것들만 받아 튀길 때 

그는 옥수수, 쌀, 밤, 콩, 가래떡을 도매로 사서 밤새 튀겨 장에 내다 판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장터 구석에 가게를 마련한다.


어느 날 장터에서 만난 약장수가 뻥튀기를 사러 온다.

그가 귀가 어두운 걸 보고 보청기라는 물건을 소개한다.

손톱만 한 걸 귀에 넣었을 뿐인데 소리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게 신기했다.

한동안 소리를 모르고 서럽게 살아온 날들 생각에 아내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린다.

다시 찾은 청력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다 쉬는 날을 정해 산에 다니기 시작한다.

잊고 지냈던 새소리 물소리가 그리웠던 것이다.

모기만 하던 소리로 멀리 머물던 세상 귀 가까이 오는 걸 느낀다.


어느 날 시장 골목 레코드 가게를 지나다 흘러나오는 피아노 음악을 듣게 된다.

보청기를 하기 전에는 몰랐던 소리였다.

당장 들어가서 지금 나오는 음악 테이프를 산다.

나른하면서도 빈 공간이 움푹 움푹 패어있는 느낌의 그 음악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라고 했다.

클래식 음악 감상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다.

그의 아내가 조그만 카세트를 사서 뻥튀기 리어카에 매달아 준다.

들으면 들을수록 깊고 오묘한 피아노 선율이 귀를 앓던 자신의 이야기 같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듣는다.

귀머거리 뻥튀기 장수 주제에 무슨 클래식을 듣느냐고 타박을 받으면

베토벤은 귀 잡쉈대는데두 음악을 그래 잘 맹글었드래요, 하며 웃는다.

베토벤에서 시작 된 그의 음악 감상은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거쳐 슈만, 브람스, 드뷔시로 이어진다.

공연을 보러 다니고 음악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보청기를 했어도 고음과 저음은 여전히 잘 안 들리다 보니 피아노 음악만 듣는 게 아쉬워

보통 스피커보다 고음과 저음이 세게 나오는 스피커를 직접 만든다.

덕분에 피아노 음악에서 벗어나 실내악은 물론 말러, 브루크너도 듣게 된다.

스피커 만드는 실력도 소문 나 비슷한 처지의 애호가들로부터 주문을 받는다.


지금 그는 한 달에 한 번 동네 음악 모임에 나가 해설을 한다.

몇 해 전, 나도 그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뻥튀기 기계를 2대나 갖춘 트럭의 주인으로

효도 라디오허리춤에 매달있었다.

나는 그의 라디오 메모리 카드에 mp3 파일을 수시로 바꿔 넣어드리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요즘 어떤 음악이 좋다던데, 말씀하시면 난 유튜브 영상에서 mp3파일을 추출해 메모리에 넣어 드린다.

그가 효도 라디오를 귀에 바짝 대고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음악을 듣는 동안 난 그 옆에서 뻥튀기를 집어먹는다.

그가 제일 즐겨 듣는 음악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글렌 굴드가 연주한 브람스의 10개 인터메찌, 안드라스 쉬프 연주한 바흐의 파르티타, 인벤션,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들.

그가 귀를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가 그날 다슬기 잡으러 강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보청기를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오일장터에 뻥튀기를 튀기러 올 때면 그의 기분에 따라 쇼팽이며 드뷔시며 에릭 사티가 나온다.

며칠 전 장이 서던 날, 퇴근 길에 그의 뻥튀기 트럭에 들러보았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곡 <사계> 중 10월이 흐르고 있었다. 파란 가을 하늘에게 올리는 경배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동네 김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