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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08. 2019

우리 동네 김씨

시골 사람들

우리 동네 김영식 씨한테는 똑똑하고 시 잘 쓰는 딸이 있는데

후로꾸 지방 문예지한테 인쇄비 명목으로 이백만 원 주고 산 가짜 시인 명함이 아니라

신춘문예 입상한 정식 시인이라는 그 아이가

시로는 먹고 살기 애로워 보험 영업사원이 되었다며 말하기를,

송슨상, 혹시 자동차보험 만기 가까우면 우리 딸한테 들어줘

다음엔 이런 일 말고 딸네미가 쓴 시집 보여줄게, 걔가 시인이걸랑


후다닥 가입해 주고 몇 달 뒤,

송슨상, 혹시 실손 보험 없으면 우리 딸한테 들어줘

다음엔 이런 일 말고 딸네미 시집 진짜루 보여줄게 걔가 시인이걸랑


아는 사람 몇을 덤으로 소개해주고 몇 달 뒤,

송슨상, 혹시 신한 카드 없으면 우리 딸한테 들어줘

다음엔 이런 일 말고 딸네미 시집 보여줄게 걔가 시인이걸랑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는지

일 년을 못 채우고 그만뒀다더라며

이제는 걔도 정말 시나 써야겠다드만

다음엔 진짜 시집 보여줄게 걔가 시인이걸랑


가난은 자기 책임이지 힘든 일 피하고  노력 안 하는 놈들이나 가난한 거지

목숨 걸고 덤벼 봐, 그 까짓 돈 못 벌겠냐고 김영식 씨는 자식들에게 가르쳤다는데

그 말대로라면 자식들 가난은 지들 책임인데 시인 아부지라 그런가, 자기가 미안하대


자본주의 핵심은 분배가 아니라 성장에 있다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공돈 주면 게을러진다고

서민 복지, 기본 소득인가 뭔가를 머리 싸매고 반대하는 단체 회원인 그가

소 판 돈으로 대학원까지 다닌 딸 허리에 묶여 있는

더이상 졸라맬 것도 없는 가난이 아프단다


김영식 씨에게는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는 아들도 있는데

최저 시급을 올리면 나라가 망한다는 전단지 들고 이장 집에 가서 방송으로 읽어달라고 갔다가

그럼 니 아들 시급도 줄어드는데, 애비가 돼서 병신같은 짓이나 하고 자알 헌다, 핀잔만 받고 부아가 나서 이장, 이노무시키 너 잘 걸렸다

최저 시급 올라서 나라가 망하면 내 자식이 무슨 소용이겄냐고 목소리를 높여봤지만

너처럼 있는 놈 편들어주는 그지들 땜에 부자들이 맘 놓고 해쳐먹는 거여, 놀림까지 받고는

분해서 고춧잎 따던 소쿠리 내던지고 막걸리 두 병 먹고 종일 마루에 뻗었다가

해 저물녘 일어나 하소연 상대를 찾아 동네를 헤매던 끝에

마침 퇴근길에 꾸벅 인사하는 송슨상을 만났는데

눈치 없는 송슨상운 또 예의를 차린답시고 막걸리 한 병과 김치보시기를 내놨는데

그걸 먹으며 어둑해지도록 애국시민 김영식 인생론을 펴다가

알바 마치고 데리러 온 아들한테 이래서 늙으면 빨리 죽어야 된다는 말이나 듣고 혈압 오르던 그 밤,


벼르던 첫서리가 되게 내리고 김영식 씨 텃밭에는 미처 못 딴 고춧잎이 얼어빠졌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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