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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12. 2019

목욕탕 뽀이, 사상전집을 만나다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11


너희들도 한 때, 일기 숱하게 썼지? 아이가 솔직하게 쓴 사생활을 교사가 검열하는 게 인권을 침해한다고 해서 지금은 일기검사를 하지 않지만 예전에야 어디 그랬나? 쓰지 않은 날은 손바닥을 맞았잖아. 매일 아침, 선생님 책상 위에는 일기장이 뒤집힌 채 쌓이곤 했지. 나는 맞는 게 무서웠어. 기를 쓰고 일기를 썼지. 빠지지 않고 쓰면 학기말에 상을 받던 기억이 나. 안 쓰면 매를 맞고 잘 쓰면 상을 받던 그때, 어린 나에게 일기 쓰는 일은 꽤 중요한 일이었어. 도대체 선생님은 그 많은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왜 궁금해하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기 내용을 숨길 생각을 감히 못했어. 없는 일을 꾸며 쓸 배짱도 없지. 그럼 손바닥을 또 때리실지 모르니까. 


날짜와 날씨를 적고 나면 그 날 있었던 일을 쓰는 칸이 나오고 끄트머리에는 오늘의 반성과 내일의 할 일을 쓰는 칸이 있었지? 반성할 일은 늘 차고 넘쳤지만 내일 할 일은 늘 한 가지였어. 꼴 베기, 소 풀 뜯기기. 도시에서 오신 선생님이 시골 아이인 내 하루 일과를 재미있어하실까 궁금했어. 매일의 삶이 똑같아서 늘 같은 일로만 기술되는 단조로운 일기를 선생님께 보여드리는 게 부끄럽던 생각이 나. 어린 나의 삶은 표리부동의 연속이었거든. 그렇다고 거짓을 쓸 수도 없으니 고역이었지. 그래도 내가 지금 이렇게나마 옛날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어릴 때 맞지 않으려고 지겹게 쓴 일기 덕분인지도 몰라. 그리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몇 권의 책 때문이었는지도. 몇 권의 책이나... 맞아, 몇 권의 책이 있었어. 사상전집. 


중학교를 끝으로 일을 시작했으니 내 삶에서 공부라는 건 더 할 일이 없을 것 같았어. 국영수... 그런 공부 말야. 공부를 안 하게 되면 책을 볼 일도 없어지게 마련이잖아. 그런데 사람 일이 참 묘하기도 하지? 내가 책을 읽게 되더라니까?


공부라는 건 아예 생각도 안 하는 목욕탕 생활이었지만 매일 뭔가를 쓰기는 했어. 음료수나 목욕용품이 얼마나 들어오고 팔려나갔는지 그런 거. 표를 만들어 음료수 항목마다 팔린 개수를 써놓으면 때밀이 형에게 보고할 때 편리했거든. 수치가 틀리거나 딱 부러지게 말을 못 하면 형이 화를 냈어. 돈에 민감했거든. 한 번은 손님이 많아 음료수가 많이 팔린 날, 내가 미처 통계를 내기도 전에 형이 물어온 거야. 내가 아직 계산을 못했다고 하자 애새끼가 그런 거 하라고 월급을 6만 원씩이나 주면서 고용했는데 멍청하다고 욕을 하며 뒤통수를 때렸어. 그런 일을 몇 번 겪자 공책을 마련해 뭔가를 팔 때마다 바로 적곤 했어. 그래야 제깍 보고할 수 있으니까. 그러다 시간이 나면 빈칸에 다른 것도 끄적거리게 됐어. 점심으로 또 라면을 먹었는지, 일 끝나고 포장마차를 누구와 가서 뭘 먹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내가 지금 쓰는 것들은 그날들의 기록 조각을 토대로 한 거야. 난 그런 걸 왜 끄적거렸을까. 매일매일이 회색빛으로 별 희망도 안 보이던 나날들이었는데. 어쩌면 습관적으로 썼던 일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손바닥을 맞지 않으려고 쓰기 시작한 일기였지만 아주 가끔은 마음속 매듭이 풀리는 느낌도 있었거든. 나만의 일기장에 형이며 장깨 이야기를  일러바치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지. 


내가 일하던 목욕탕 주인은 꽤 잘 사는 사람이었어. 여름이 목욕탕은 비수기잖아. 그래서 수리도 할 겸 며칠간 목욕탕을 쉬게 되었어. 덕분에 나도 휴가를 얻겠구나, 좋아하고 있었지. 근데 형은 내가 쉬면 하루에 2천 원씩 월급에서 뺄 거라는 거야. 대신 목욕탕 사장이 집수리를 하는데 거기 가서 심부름이라도 하면 안 빼겠대. 마음 같아선 며칠 쉬고 싶은데 엄마를 떠올리니 마음이 약해졌어. 내가 일당을 포기하고 휴가를 왔다고 하면 엄마는 또 내 물러 터진 정신상태를 걱정하실 거야. 내키지 않았지만 목욕탕 주인집에 가서 일하겠다고 했어. 때밀이 형은 나를 노예로 부리는 주인이라도 되는 듯 사장에게 나를 빌려주며 말했어. 자기가 일당 다 줬으니까 사장님이 마음껏 일 시키시라고. 나도 꾸벅 인사를 드리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외쳤어. 주인은 내 체격을 마음에 안 들어했지만 공짜라는 말에 끌렸는지 나를 데려갔어. 난 인부들이 쓸 시멘트를 옮기고 벽돌을 날라주고 쓰레기나 건축자재를 정리했어.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였지만 목욕탕일 보다 좋았어. 일단 나를 욕하고 때리는 형이 없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끼니마다 근처 백반 집에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었거든. 목욕탕에서는 형과 함께 먹는 라면 아니면 짜장면이 전부였는데 백반 집에서는 고등어조림이 이 한 사람당 두 도막이나 나왔거든. 얼마나 이게 인상적이었으면 일기에 '두 도막'이라고 썼을까. 이게 전부가 아니었어. 점심과 저녁 사이엔 빵과 우유를 새참으로 주고 더우면 콩국수도 해줘. 심지어 수박화채까지! 노가다를 하면 이렇게 잘 먹을 수 있겠구나. 나도 좀 더 자라면 목욕탕을 나와 이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어. 


잠은 목욕탕에 와서 자고 아침이면 다시 사장 집까지 가서 일하는 동안 집수리가 예상보다 길어져 목욕탕 수리가 끝났는데도 목욕탕으로 돌아가지 못했어. 형은 사장에게 나를 빨리 보내달라고는 차마 말 못 하고 대신 내게 짜증을 냈어. 결국 며칠이 더 지나 공사가 끝나 사장이 이사하는 날까지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했어. 사장 집은 꽤 넓은 잔디 마당이 있는 2층 집이었는데 부잣집답게 구석구석 좋은 가구들이 많았어. 왜 있잖아. 다리 하나, 서랍 손잡이 하나도 예사롭지 않게 생긴 가구들. 거실엔 큰 외제 전축과 여러 가지 술병이 든 장식장과 가죽 소파도 있었지. 그리고 한쪽엔 피아노와 책장이 있었는데 겉표지가 같은 종류의 책들이 가득했어. 그런데 사장은 그 책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더러 목욕탕 탈의실에 갖다 꽂아 놓으라고 했어. 척 봐도 꽤 두껍고 비싸 보이더라. 겉장이 두꺼운 표지에 제목이 금박 글자였어. 다 해서 한 60권 정도 됐나? 나는 그 책들을 리어카에 싣고 목욕탕으로 와서 몇 번이나 계단을 오르내린 끝에 다 옮겼어. 나르면서 보니 사상전집 시리즈였어. 왜 있잖아, 철학, 종교, 신화, 고전을 망라한 시리즈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까뮈, 사르트르, 니체, 프로이트, 라깡처럼 우리가 흔히 고전 명작이라 부르는 책들. 책 두께와 생긴 걸로 볼 때 뭔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 같았어. 그 책을 읽는 사람 앞에는 왠지 안락의자에 앉아 있을 것 같은 기분? 원목 책상엔 커피도 한 잔 있을 것 같아. 비싼 시가를 피우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거지. 품격이랄까, 돈이랄까. 그런 게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울리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목욕탕에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아 보였어. 그런데 뭐 내가 힘이 있나? 사장이 시킨 대로 일단 하나하나 먼지를 털었어. 다들 두껍고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하더라. 문제는 그걸 어디에 꽂을까였어. 사장, 특히 형의 마음에 드는 위치 라야 하는데 도저히 모르겠는 거야. 당시 탈의실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은 대형 거울과 욕탕 출입문 사이 음료수 냉장고 위쪽 공간이었어. 그런데 그곳엔 이미 요금표가 붙어 있었어. 때 밀면 얼마, 구두 닦으면 얼마, 음료수, 칫솔, 샴푸는 얼마... 에 '요금은 선불', '외상 사절'이라는 붉은 글씨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는 요금표. 그 요금표는 형이 간판집에서 돈 주고 만들어 온 거야. 그러니 그 자리에는 꽂으면 안 되지. 근데 거기 아니면 적당한 곳을 찾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탈의실이라는 곳이 원래 책 꽂을만한 곳이 아니잖아. 난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음 날 형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쪽에 쌓아두었어. 짐작대로 형은 뜬금없이 많은 책들이 마뜩잖은 눈치였어. 


"아, 사장, 개또라이 같은... 씨발, 진짜. 책들을 여기다 버리면 어쩌라고. 여기가 때 미는 데지 책 보는 덴 줄 아나. 재수 없게." 


하지만 어쩌겠어. 형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요금표를 조금 왼쪽으로 옮기고 나더러 음료수 냉장고 위 먼지를 닦게 시킨 다음 한 줄로 꽂으라고 시켰어. 근데 책이 많아서 한 줄로 꽂아도 반이나 남는 거야. 형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남은 책은 빈 옷장에 넣어놓았다가 사장이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지나면 지하 보일러 실에 땔감으로 갖다 주랬어. 책 꽂는 건 일단 그렇게 넘어가는 줄 알았어. 하지만 며칠 뒤 사달이 났어. 사장이 온 거지. 그는 책들 옆에 요금표가 있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그 책들이 자기 집에선 거실 가운데 책장에 떡하니 꽂혀 있었잖아. 여기선 홀대당한다고 생각했겠지. 나한테 막 화를 내는 거야. 이거 누가 이따위로 꽂았냐, 이 책들이 얼마짜린 줄 아느냐, 이러면서. 


"생각 좀 해라, 인마. 칫솔 백 원, 이태리타올 백 원 저딴 요금표 옆에 저런 책을 꽂는 게 니 눈엔 어울려 보이나 시애꺄. 니 저게 뭔 책인지는 아냐구, 인마!" 


아닙니다. 모릅니다. 헤헤. 내가 비굴한 표정으로 멍청한 웃음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하자 때 밀던 형이 후다닥 나오더니 내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말했어. 


그러게, 새꺄. 형이 잘 꽂으라 그랬잖어. 다시 꽂아, 인마. 


그러더니 얼른 요금표를 떼서 사장 보라는 듯 일부러 구석 쪽으로 옮겨 걸더니 책들을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면서 아부하듯 말했어. 


"사장님, 근데 이 책들 보통 책이 아닌갑습니다. 꽤 주셨겠네요." 


마침 형이 물어주기를 기다렸는지 사장이 담배를 피워 물며 탁자에 앉았어. 


"내가 우리 아들한테 약속을 한 게 있었거든. 니가 대학교만 붙으면 니 공부 뒷바라지는 다 하마. 내신 니도 열심히 공부해라, 말이지." 


사장은 아들이 대학에 붙은 날 알고 지내던 서점으로 갔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대학교에 척 붙었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려운 책을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한 서점 주인은 사상전집을 소개해주었고 단숨에 사다 놨지. 근데 아들이 학교 공부가 많은지 통 책 읽을 시간이 없대. 앞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필요한 책들은 더 많아질 거고 졸업 후 고시까지 통과해 나랏일을 하게 되면 책들이 더 많아질 텐데 집에는 공간이 부족하니 나중에 다시 가져가더라도 일단 여기에 보관해 놓고 자기도 가끔 와서 읽으려고 한다는 거야. 


"아드님이 똑똑하신갑네요, 저런 책을 줄줄 읽을 정도면 고시 같은 거야 식은 죽 먹기죠. 헤헤." 


형은 사장 듣기 좋은 말을 하다 다시 때를 밀러 들어갔어. 형의 말로도 부족한지 사장은 나를 앉혀 놓고 더 얘기를 했어. 요즘 대학생들은 통 공부를 안 하고 데모를 하러 다니는데 지들이 뭘 안다고 데모를 하느냐. 나처럼 육이오 때 맨 손으로 내려와서 끼니 굶어가며 일해도 다 먹고살았다. 부모 등골 뽑아서 대학 다니는 생각은 안 하고 팔자 좋아서 데모하는 새끼들은 다 잡아다가 쫄쫄 굶겨 봐야 정신 차린다. 넌 데모할 생각일랑 아예 말라고.


"네, 알겠습니다. 전 데모 안 하겠습니다. 사장님." 


형처럼 나도 사장 비위를 맞추려고 싹싹하게 대답했어. 반응이 흡족한지 사장도 고개를 끄덕였어. 근데 사장이 잠시 나를 보더니 피식 웃는 거야. 


흐흐. 아참, 넌 데모할 일은 없겠구나. 데모도 대학 다니는 똑똑한 애들이 하니까니. 너 중학교는 나왔냐?" 


"전 데모할 일 없습니다. 중학교만 겨우 나왔습니다. 헤헤." 


사장은 당장 그날로 책장 하나를 사 왔어. 그리고 기어이 탈의실 옷장 몇 개를 옮기면서까지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놓고는 책을 옮겨 꽂으라고 시켰어. 내가 책을 옮기는 동안 사장은 일 마치고 나온 형을 앉혀 놓고 또 자랑을 늘어놓았어. 얘기하는 걸 들으니 사장 아들과 때밀이 형이 동갑이래. 형은 연신 사장 비위를 맞추면서 아드님이 똑똑하신 모양입니다. 아이구, 저도 공부 좀 해 볼라 그랬는데 워낙 돌대가리라 그런지 안 되더라구요. 꺼먼 건 글씨고 허연 건 종이 라는 구분밖에 못 했거든요. 헤헤, 주억거렸어. 사장은 기분이 좋았는지 제일 비싼 음료를 세 개 꺼내더니 나와 형에게도 하나씩 건넸어. 우리가 황송해하며 감사합니다! 를 외치는 동안 사장은 꿀꺽꿀꺽 마신 뒤 총총 나갔어. 난 형과 내 몫의 음료수를 다시 냉장고에 넣었지. 형이 전부터 그렇게 시킨 거야. 가끔 손님이 형에게 음료를 사주면 형은 바로 마실 것처럼 따는 흉내를 내다가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딴청을 피우거든. 손님이 형 몫의 음료수까지 계산하고 갈 거 아냐? 그러면 그걸 다시 냉장고에 넣는 거야. 먹은 셈 치고 다시 팔 수 있으니 두 배로 남는 장사라며 좋아했어. 드물게 나에게도 음료수를 사 주는 손님이 있으면 나도 형처럼 했어. 그러면 형이 좋아했거든. 근데 그날은 아니었어. 형은 방금 내가 넣은 음료수를 냉장고에서 다시 꺼내 벌컥벌컥 마시더니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어. 


"시팔노무새끼, 지 애새끼가 대학생이면 대학생이지 씨발, 나랑 비교하구 개지랄이야. 지 아들이 지즈바들 따처먹느라 책 안 보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구." 


그건 형 말이 맞았어. 사장 아내의 사촌 언니인 카운터 이모가 그랬거든. 사장 아들이 대학가서 여자애들만 쫓아다니고 공부는 영 안 한다고. F학점도 여럿 받았다는 걸. 공부하라고 비싼 책을 사줬는데 읽지도 않으니 화딱지가 나서 책을 다 치워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목욕탕으로 온 거지. 형이 사장 아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지. 또 자기와 동갑인 사장 아들에 대한 시샘도 있었을 거야. 나나 형이나 학교를 못 다닌다는 건 마음 속 증오를 품게 만드나 봐. 그 뒤로 형은 책장을 아예 쳐다보지 않았어. 우연히라도 보게 되면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사장 아들 욕을 했어. 일 안 하고 밥 처먹고 다니는 '먹구대학생'이라고. 먹구대학생이라... 난 형과 달리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서 일기장에 적어두었어. 먹기만 하는 대학생이라. 얼마나 풍요로운 말이니. 내 형편에 견주면 상상하기 힘든 경지야. 먹고 놀면서 대학까지 다니잖아. 줄무늬 셔츠에 멋진 니트를 받쳐 입고 캠퍼스 계단을 오르는 대학생. 넓은 잔디에 모여 앉아 책 읽거나 기타를 치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 옆에는 멋진 남녀가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는 그곳. 목욕탕 꼬마인 내게 그 모습은 현실에서 꿈꿀 수 없는 천상의 모습이었어.  


책 안 읽는 사장 아들 덕분에 탈의실이 한결 고상해졌지만 덕분에 난 청소가 늘었어. 책장의 먼지를 닦아야 했으니. 탈의실이라는 공간은 모든 사람이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원시의 공간이잖아. 한편 내가 형에게 따귀를 맞는 공간이거든. 그런데 칸트나 쇼펜하우어가 꽂혀 있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게 묘한 기분이 들게 했어. 그런데 묘한 게 한 가지 더 있었어. 책장을 닦을 때마다 그 이질감이 나를 끌어당기는 거야. 자꾸 관심이 가더라. 며칠 뒤 사장은 책장 빈칸을 채우기 위해 집에서 더 많은 책을 가져다 꽂았어. 당시 꽤 큰 출판사에서 내놓은 문학전집이야. 이문열, 오정희, 김원일, 김승우, 한수산 같은 작가들의 책. 구두공장 친구들을 데려다 술을 마신 일로 형에게 얻어맞고 외출 금지령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일이 끝나도 밖에 나갈 생각을 못 했어. 물론 길 건너 장깨 역시 나를 만나러 오지 못 했지. 나를 만나러 오면 내가 때 또 맞을 걸 아니까 나름 참고 있었을 거야. 하루 종일 탈의실에 갇혀 나가지도 못하지, 책은 자꾸 눈에 밟히지. 밤은 길지. 뭐하겠어? 자연스럽게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어. 이왕이면 제일 두꺼운 책을 골랐지. 그게 안나 까레니나였어. 톨스토이 책 말야. 두꺼운 책 세 권짜리인데 다 합치면 천오백 쪽이 넘어. 근데 말야. 내가 글쎄 그 책에 빠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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