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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13. 2019

난 왜 책 제목들에 시비를 걸었을까?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12


나는 어쩌다 그 두꺼운 안나 카레니나를 첫 책으로 골랐을까. 그 책이 제일 앞에 꽂혀 있었던 것도 아니었거든. 만약 내가 다른 책을 처음 골랐다면, 근데 하필이면 니체나 칸트였다면 더 이상의 독서는 없었을지도 몰라. 당시 내 삶은 그까짓 책들이 아니어도 눈길 가는 게 얼마든지 있었거든.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책을 고른 건 어디까지나 제목 때문이었어. 다른 책들은 제목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기분 나쁠 정도로. 누가 사상전집 아니랄까 봐 얼마나 고상한 척하는지 눈꼴 실 정도였다니까. 그냥 아무 책이나 먼저 읽든지, 아니면 안 읽으면 될 텐데 그때의 난 그런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아이였어. 그러니 피곤하지. 이번엔 책들이 깨닫게 해 준 나의 열등의식을 고백하고 싶어.  


맨 앞에 꽂힌 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어. 무슨 제목이 이래? '죽는 병'도 아니고 '죽음에 이르는'? 우리가 평소에 잘 안 쓰는 표현이잖아.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거지 죽음에 이른다니. 그런 문어체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고. 문어체를 숭상하는 게 더 수준 높아 보여서 그런가? 선비의 말이라는 거야? 고등학교 못 간 나는 문어체 혜택을 전혀 못 받고 있잖아. 내게 오는 말들은 대부분 쌍욕으로 상징되는 구어체들 뿐이라고. 그럼 나 같은 인간은 사상전집이랑은 해당 없겠네. 시발. 니들 잘났다, 그래. 장깨와 뒷골목을 걸으며 침 뱉던 때의 말버릇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근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책은 아무 말 없는데 나 혼자 식식거리고. 민망한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일단 꺼내서 펼쳐 봤지. 철학의 대중화 어쩌고 하는 서문이 있었어. 철학의 대중화?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뒷골목 언어로 서술되어야 하잖아. 근데 문어체는 뭐람. 나 같은 애를 이해 못 시키는 철학도 철학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나? 그렇겠지. 철학이 그 정도로 수준이 낮진 않을 거 아냐. 그러니 사장도 이렇게 귀하게 여기겠지. 근데 제목이 저게 뭐냐고. 젠장. 


얼치기 지식인의 거드름이라도 발견했다고 느껴서였을까, 저자인 키에로 케고르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까닭 모를 반감이 올라왔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슨 암이나 당뇨병, 뭐 이런 건 아닐 거잖아. 담배 피우고 침 뱉다가 형에게 걸려 맞아 죽는 건 더 아닐 거고 - 나중에 그 책을 보고 절망이 생명 의지를 죽인다는 것, 내가 책들에 대해 공연히 느꼈던 적개심이 바로 절망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 그럴 거라면 굳이 제목을 그렇게 지을 건 또 뭐야. 총이나 칼에 맞아서가 아니고 절망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자빠져 있는 게 철학이라면 나라도 하겠네. 때 미는 것보다 못한 게 철학인 것 같은데, 뭐. 뻥이 심해도 어지간해야지. 존나 잘난 척하고 있잖아. 


나머지 제목들도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였어. 난 일기장에 책 제목을 쭉 써 놓고 읽을 순서를 매겨보았어. 마음에 안 드는 건 가차 없이 가위표야. 심지어 어떤 재수 없는 제목엔 씨발이라고 적기도 했을 걸. 내가 가위표를 한 책들은 이런 것들이었어. 생의 한가운데서(루이제 린저), 이방인(알베르 까뮈), 구토(사르트르), 꿈의 해석(프로이트), 체호프 단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버트란트 러셀), 티베트 사자의 서,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제목 자체가 문법에 맞나 싶은 '꿈에의 의지(니체)'까지. 


책 제목을 지을 때 원래 거드름을 잔뜩 넣어 짓나? 과대포장 같아. 내용이 부족하거나 자신이 없으니까 강렬한 제목으로 메우려는 얍삽함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지도 몰라. 내가 당해봐서 알거든. 당시 골목길에서 나와 장깨 같은 약자들을 위협하고 돈 뺏던 양아치 형들이 그랬어. 위협적인 무늬가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고 배 까지 올라오는 바지를 입었거든. 자기들도 겁은 날 테니 혼자는 못 다니고 떼로 몰려다니면서 주먹이나 욕설로 위협하곤 했어. 짧게 깎은 머리도 사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춰보려는 행동일 거야. 근데 이 책들도 그런 식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울컥했어. 허세 가득해 보이는 제목들도 기분 나쁜데 이번엔 그 책들이 일제히 양아치 형들 모습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거야. 


"니가 목욕탕 뽀이 주제에 감히 '사상전집'을 읽으려고? 고등학교도 못 간 새끼가". 


고등학교라는 말에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목울대가 뜨거워 휘청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지고 싶지 않았어. 나도 책들을 노려보았지. 


"웃기네. 당신들 사상가들이야 말로 자의식 과잉 환자들 아냐? 그런 얍삽함이 나한테 먹힐 것 같아? 아주 우쭐대는 꼴 좀 봐. 당신들의 지적 허영을 뽐낼 대상으로 나처럼 무식한 새끼는 꽤나 만만하겠군. 안 그래? 하지만 당신들이 내 삶을 알아? 부잣집에 태어나 운 좋게 공부한 도련님들일 거면서 버러지 같은 내 삶을 알기나 하냐고. 그걸 모른다면 세계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어?" 


근데 기가 죽는 건 어쩌지 못하겠더라. 사상가가 말하는 삶의 이치는 사회에서 이미 검증된 거잖아. 그들의 깊고 고결한 사유들은 나 같은 바닥인생과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였어. 사상전집이라는 건 고등학교, 아니 대학을 졸업하고 사색의 궤도에 안착한, 말 그대로 정제된 인간들의 생각을 모아 놓은 거잖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또 우울해졌어. 그런 건 애초부터 내 팔자에 없다고 생각하고 모른척하기로 포기했던 거잖아. 난 목욕탕 뽀이일 뿐이라고. 그런데도 자꾸 눈이 가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떠밀리듯 읽기 시작했어. 어쩌면 그 책들에게 묻고 싶었는지도 몰라. 고등학교에 못 간 나 같은 놈도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신들의 책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나요? 제발 나 같은 놈도 이해하게 해 줘요. 책은 답을 하지 않았어. 화가 났어. 그리고 우울했어. 그래서 또 내던지고 싶기도 했어. 지하다방의 그녀가 길 물어 온 아줌마에게 퉁명스럽게 우리 학생 아니라고 쏘아댔던 것처럼. 나도 같은 심정으로 사상가들에게 대들고 싶었어. 근데 대들려면 뭘 알아야 되잖아. 읽어야 알지. 일단 그럼 큼직한 거 하나를 읽어보자. 그 뒤에 판단해도 되잖아. 결국 나의 독서를 이끈 건 열등감이었던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어. 근데 잠시 뒤 이번엔 창피한 마음이 또 슬며시 일어나는 거야. 내가 책을 대상으로 지금 샘내는 거야? 모른척했어. 그렇게라도 해서 나를 위로하고 싶었어. 이기적으로 나도 얍삽하게 생각하기로 했어. 뭐 어때? 사장의 대학생 아들이 이 책들을 안 읽은 이유도 연애질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지도 모르잖아. 책을 상대로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던 기간이 며칠 이어졌어. 고단한 목욕탕 생활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일부러 시간 내서 읽자니 귀찮고, 모른 척하자니 또 눈에 보여 신경 쓰이고. 에라, 모르겠다. 읽기 시작했지. 어려운 사상전집을 읽기 싫어서 괜히 제목을 트집 잡은 것 같지만, 아니야. 때밀이 형뿐 아니라 손님들의 반응도 비슷했거든. 가끔 읽은 척을 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아는 것 같은 사람은 없었어. 어릴 때 저런 책들을 변소에 쌓아 놓고 똥을 닦았다는 둥, 담배 말아 피우기 딱 좋은 종이라는 둥 책 내용과 관계없는 말들만 했어.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괜히 후련해졌어. 지들이 지식인이면 지식인이지 어려운 말말 골라 쓰고 지랄이야. 기분 나쁘게. 그런데 그럴수록 책 내용이 더 알고 싶은 거야, 글쎄. 다른 책들과 달리 <안나 카레니나>는 사람 이름이잖아. 과시나 은유의 허세가 없는 제목이야. 그래서 이 책을 점찍었지. 책이 두껍다는 건 진입장벽이 되지 못했어. 못 읽겠으면 그냥 덮으면 되지, 뭐. 그리고 다신 안 보면 돼. 난 목욕탕 뽀이니까. 그런데 한 번 펼친 그 책을 다시 덮을 수 없었어. 첫 문장 때문이야. 


[행복한 가정은 다들 비슷비슷한 이유로 행복한데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 유로 불행하다.] 


그래, 이 문장 때문에 못 놓았어. 아냐, 책이 나를 붙들었다고 해야 하나? 어떤 문장이 이렇게 함축적일 수 있을까. 어떤 작가가 인간의 삶과 행복을 이렇게 투명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책 등허리에 지은이가 누군지 봤어. 레프 톨스토이. 모르는 이름이었어. 그때까지 난 책이란 걸 읽은 기억이 없어.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로빈훗 정도? 그것도 중간까지 읽다가 뒤로 건너뛰어 결말을 보고 말았으니 다 읽은 것도 아니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어떻게든 끝까지 읽은 건, 그 책 속 인물 레빈이라는 사람 때문이었어. 읽을수록 나도 그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첫 문장에 빠지듯 그에게 빠져들었어. 초보 애독자의 서툰 동일시라고나 할까. 책 내용은 여주인공이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바람이 나서 아이까지 낳지만 정작 남자의 사랑이 식어가는 걸 알고 성질만 내다가 기차에 뛰어들어 죽어버린다는 드라마야. 막장드라마지. 그런데 그땐 아직 어려 그런지 주인공인 안나에 대한 관심은 별로 안 갔어. 다행히 이 소설의 초점은 주인공에게만 집중되지 않고 다양한 주변 인물의 삶을 나란히 따라가거든. 그중 한 사람이 레빈이야. 그는 머리가 좋거나 인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연을 좋아해. 이게 마음에 들었어. 또 자기 내면의 욕망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야. 돈이 많거나 명예가 높은 건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딱히 그런 쪽으로 존경받지는 못하지만, 천박하지도 않아. 그냥 주어진 일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애쓰지. 사랑에 능한 것도 아니어서 짝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해도 말 못 하고 혼자 아파해. 더구나 나중에 그 여자가 실연 후 다시 돌아와도 특별히 환호하지 않아. 다만 따뜻하고 듬직한 남편이 되어주지. 귀족이지만 농노들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삶에 스며들어갈 줄 알아. 나도 레빈 같은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레빈 같았을까, 상상하기도 했어. 그 덕분에 나는 지겨워하던 목욕탕 일이 조금씩 고맙게 느껴졌어. 레빈의 농노들처럼. 현실이 힘들어도 먹고살게는 해 주니까. 


레빈 이외의 등장인물들의 삶 또한 조금만 각색하면 나와 비슷하거나 이상향과 같았어. 당시 내 삶은 불우, 불행, 불미 같은 불(不)로 가득하다고 생각했거든. 불행한 가정은 각자 여러 이유가 있다는 말이야 말로 나에게 딱 맞는 표현이었지. 나의 불행은 어디에서 왔을까. 돌아가신 아버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 고등학교에 못 가고 돈벌이에 나선 일? 포악한 때밀이 형? 그 어떤 이유도 딱히 떨어지는 설명이 되지 않던 때였어. 그저 현실이 더럽다고만 느꼈지. 내가 겪어야 하는 일들 그 무엇 하나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던 때였어. 그래서 그 책에서 뭐라도 찾아내고 싶었는지 몰라. 찾아내서 위안 삼고 싶었어. 


하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어. 분명 우리말인데도 이해 안 가는 문장이 너무 많은 거야. 특히 사람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이 그랬어. 나의 어휘력이 형편없었거든. 매일 담배나 피우고 침 뱉는 일상에서 배울 어휘랄 게 뭐 있겠니. 언제 사색을 해 봤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이해 못한 채 책장을 넘기자니 그건 또 싫었어. 톨스토이한테 미안할 것 같은 거야. 결국 어떻게든 이해가 갈 때까지 앞 뒤 문단을 왔다 갔다 여러 번 읽는 수밖에.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어. 또 한 가지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었어. 그 나라 사람 이름은 왜 이리도 길고 이상한 거야?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건 본명 말고 부르는 이름은 또 따로 있다는 거야. 안나 아르카디예브나 카레니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안나 카레니나의 남편),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안나의 애인. 알료쉬아라고도 부름),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니콜라이 레빈의 친동생,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코즈느이쉐프의 이부동생). 그나마 이건 자주 언급되는 주인공들의 이름이야. 각 주인공마다 관련된 사람들이 또 수십 명씩 있어. 아이고, 머리야.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나. 결국 난 일기장에 인물들 이름을 써 가며 누가 누구와 형제고 친구고 부부사인지 그려가며 읽었어. 그러니 조금씩 윤곽이 보이더라.  


책의 초반에는 방대한 스케일에 적응하느라 좀 헤맸지만 시간이 지나자 술술 읽혔어. 책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목욕탕 손님이 와도 응대를 하는 둥 마는 둥 할 정도였어. 손님이 없으면 아예 탈의실 탁자에 엎드려서 책을 읽었어. 형에게 혼났지. 그러면 형 눈을 피해서 읽는 거야. 읽다가 손님이 오면 일회용 칫솔을 책갈피로 끼워놓고 일을 봤어. 일이 끝나면 탈의실 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 읽었어. 다음 날 하품이 나올 정도로. 그럴 때마다 형이 머리통을 쥐어박았어. 


니가 보면 아냐, 새꺄? 그래, 잘해 봐라, 자식아.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잉. 킬킬. 


'잘해 봐라.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잉.' 이건 당시 인기힜던 유행어였어. 형은 내가 책을 보는 것 같으면 욕을 하다가 꼭 그 말을 덧붙이며 킥킥거렸어. 가끔 들른 사장도 마찬가지였어. 그가 오면 보통 카운터에서 미리 알려주거든. 그러면 나는 재빨리 책을 꽂고 일하는 척하는데 한 번은 불쑥 들어온 거야. 책을 읽다가 들켰지. 


"어쭈? 이 시애키 봐라. 동작 그만. 너 그 책 가지고 뭐해. 내가 책 잘 꽂아 놓으라고 했어, 안 했어 인마!" 


그 책이 얼마 짜린지 아느냐. 잘 꽂아놓고 누가 훔쳐가나 잘 지키라니까 왜 함부로 꺼내냐고 신경질 냈어. 정작 대학생인 자기 아들은 안 읽는데 나 같은 애가 읽겠다고 하니 분했을지도 몰라.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자 형이 내 편을 들어주듯 말했어. 


"싸장님, 저 새끼도 대학 갈라나 봅니다. 얌마, 열심히 해라.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잉. 킬킬." 


사장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어. 난 도둑질을 들킨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잽싸게 책을 꽂고 탈의실을 쓸기 시작했어. 사장은 형과 담배를 피우면서 장기를 몇 판 두다가 갔어. 형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그러게, 새꺄, 좀 눈치 있게 하라며 넌 송충이니까 솔잎이나 잘 처먹으라고 했어. 어떤 날은 내가 읽던 책을 형이 베고 낮잠을 자기도 했어. 책을 못 읽게 하려고 그랬다기보다 아마 거기 있으니까 베개로 썼을 거야. 그래도 난 속상했어. 손님들의 반응도 비슷했어. 대부분 목욕탕에 오면 옷 벗자마자 체중계 위에 올라갔다가 바로 욕탕으로 들어가잖아. 목욕이 끝나고 나오면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탈의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지. 그러다 보면 대형 거울 바로 옆에 있는 책장이 눈에 띄지. 대부분은 제목을 휙 보고 끝이야. 하지만 가끔은 그걸 꼼꼼히 읽는 손님도 있었어. 책을 실제로 빼서 들춰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바로 그 책장에 있는 책이라는 걸 알고 의외라는 듯 말을 걸기도 했어. 


꼬마야, 그거 뭐냐?


 - 순수 이성 비판입니다. 헤헤.


재미있냐?


 - 잘 모릅니다. 그냥 봅니다. 헤헤.


너 몇 살이냐?


 - 열일곱 살입니다. 헤헤. 


그럼 고1이냐?


 - 고등학교 못 갔습니다. 헤헤.


고등학교 못 갔어?


  - 네. 헤헤.


야, 이런 거 말고 무협지 없냐? 그런 게 재미있잖아. 왜 피곤하게 사냐?


 - 아, 무협지 재밌습니까? 제가 아직 못 봐서... 헤헤. 


목욕탕에는 무협지나 있어야 할까. 칸트가 있으면 어색할까. 왜? 노동에서 돌아와 땀을 벗고 때를 미는 곳이라서 순수 이성 비판은 안 어울리는 거야? 때밀이 형이 돈을 위해 노동자의 등을 미는 행위와 같은 시각에 동갑내기인 사장 아들이 연애질 하는 행위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이 인간의 이성에게 과연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야 말로 지금 내게 너무 필요하잖아? 이 질문을 그 손님에게 하고 싶었어. 만약 그가 고등학교 못 간 아이가 이상한 책을 읽는 이유를 이해하려는 자비심을 지닌 분이라면. 비수기여서 목욕탕이 한산한 데다 학교까지 안 다니니 시간이 많잖아. 마음껏 읽었어. 사상전집도 소설집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거의 다 읽으면 전에 읽었던 걸 다시 읽었어. 다시 읽어도 모르는 건 몰랐지만 어떤 건 알 것도 같았어.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 있어. 책이 사람을 바꾼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처럼 바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고등학교 못 가고 목욕탕에 갔을 때, 난 세상을 향해 뾰족하고 날카로운 날을 세운 칼날 같았어. 누가 시비만 걸면 맞받아치겠다는 험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 그래서 장깨를 따라, 혹은 내가 먼저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적응이 되어가니 마음속에 어떤 부대낌 같은 게 생기는 거야. 항상 눈에 힘주고 긴장해야 한 채 사는 게 오히려 피곤한 거야. 세상을 향해 시작도 끝도 없는 분노를 키우면서 소모한 기운이 열일곱 아이에게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니.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고 욕을 아무리 해도 벗어지지 않는 굴레가 지겨웠어. 매일 저녁 욕탕을 청소하고 새벽에 물을 받는 일은 아무리 월급을 많이 받아도 영원히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또 내 삶을 이어나가려면 적응해야 할 일 같았어. 그러면 또 무서워졌어. 목욕탕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까 봐. 때밀이 형이 내쫓아도 나 스스로 못 나가겠는 거지. 사상전집만큼이나 세상은 아직 낯설고 무서웠거든. 담배와 술은 나를 이런 환경에서 구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몸을 해치는 자학일 뿐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시작한 것도 사실 그 무렵이었어. 체념이라고 해야 할까, 그 환경을 부정하거나 벗어나려 애써도 안 되잖아. 그러니 술로 울분을 풀지. 그런데 그런 게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어. 누가 시켜서라기보다 책 속 인물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어. 안나 까레니나에 나오는 지주 레빈이 농민들에게 군림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풀을 베고 밥을 먹고 나서 말하는 거야.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네 마음속에 나도 있다고. 이제 울지 말라고. 그 뒤로 어른이 되어 안나 카레니나를 또 읽은 적이 있지만 레빈의 목소리는 다시 느끼지 못했어. 그땐 위로받을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서였을까. 열일곱의 첫 독서에서 레빈은 어두운 뒷골목에 분노의 침을 뱉는 나를 식혀주러 온 손님이었어. 


그다음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였어. 인간의 욕망이라는 가면을 쓴 신들이 인간처럼 지지고 볶는 이야기. 연속극을 보는 느낌이었어. 그다음 책은 아무거나 막 고를 수밖에 없었어. 누가 계통을 잡아주고 순서를 정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뭐, 할 수 없지. 무턱대고 읽는 수밖에. 그래도 마음에 든다 싶은 책들이 생기더라. 가장 인상적인 건 니체였어. 세계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천명했던 천재.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불친절한 문장을 나열해 놓았더라. 그래도 어쩌다 내 이야기다 싶은 문장이 나오면 일기장에 옮겨 적기도 했어. 예를 들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이, 초인이라는 단어라든지. 아직까지도 난 니체를 잘 모르지만, 내 삶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 가장 의지하는 건 니체를 비롯한 사르트르, 까뮈, 하이데거 같은 실존주의자들이야. 그들의 책을 보면 이상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들거든. 특히 인간이 무목적적으로 태어났다는 문장이. 가난한 엄마에게 착한 아들이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났다는 거. 그러니 엄마에게 매몰되지 않고 나를 위해 살아도 된다는 말. 때밀이 형에게도 마찬가지였어. 비록 그에게 월급은 받지만 부하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니까 굳이 비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잖아. 우리는 도덕과 윤리를 구현하러 이 세상에 온 게 아니기 때문에 관습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살아도 된댔어. 내 삶을 처절하게 반성할 필요도 없고 그냥 초인을 지향하며 살면 되는 거야. 얼마나 멋있어. 비록 발은 시궁창 같은 현실에 있지만 이상은 목욕탕 창문 밖 하늘을 향하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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