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30
장깨는 나보다 먼저 연애를 하고 있었어. 그래, 연애. 그때 우린 열일곱 살 주제에 감히 '연애'라는 말을 썼어. 그리고 상대는 '애인'이라고 불렀어. 여자 친구라는 말은 어린애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어. 장깨의 애인은 청바지 공장에 다녔어. 긴 생머리에 청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웃을 때는 늘 손으로 입을 가리던 아가씨. 처음 그녀를 만난 건 지난봄 장깨와 내가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을 때였어. 당시 포장마차는 값싼 끼니를 해결하는 곳이었어. 천 원이면 두 명이 우동과 어묵, 참새구이, 번데기, 닭발 중 몇 가지를 골라 아쉬운 끼니를 때울 수 있었지. 늘 배가 고프던 우린 그곳을 자주 갔는데 그녀와 친구들도 거기 오면서 안면을 트게 된 거야. 장깨가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어. 처음엔 그녀들이 이상한 놈 보듯 매몰차게 외면했어. 나도 장깨의 그런 행동이 창피해서 말렸지만 녀석이 내 말을 듣나? 그다음에 그녀들을 만났을 때에도 장깨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갔어. 그녀들에게 뭐라고 떠드는 것 같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뒤돌아 차기 시범을 보이는 거야. 그 바람에 그의 슬리퍼가 벗겨지면서 큰길로 휙 날아갔어. 그녀들이 깔깔 웃었지. 그날 그녀들이 우리에게 우동을 사 줬던가. 그다음 만남에서는 장깨가 소주를 샀을 거야. 장깨는 남자치고 큰 키인 데다 자전거를 타서 몸매가 호리호리했어. 특유의 패션 감각도 한몫했어. 녀석은 귀를 덮는 머리를 가운데 가르마로 빗어 넘기고 하얀 셔츠에 날렵한 기지 바지를 입었거든. 묘하게 어울렸어. 그러면서도 신발은 늘 슬리퍼야. 앉을 때에도 평범하게 앉는 법이 없어.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척 걸친 채 거만하게 담배를 꼬나물어. 근데 그게 영화배우처럼 멋있어. 그 자세로 상대를 지그시 응시하지. 당당하면서도 반항아 기질이 느껴졌어. 모성 본능을 이끌어 내는 재주도 있는지 만나는 여자들마다 호감을 보이며 뭔가를 사주곤 했어. 그런데도 녀석은 여자에게 특별히 고마워하거나 공손하지 않아. 뭔가가 맘에 안 들면 참는 법도 없었어. 그 자리에서 바로 내 쏘지. 그런데도 여자들은 그를 좋아했어. 지금의 애인도 장깨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어. 그녀를 처음 봤을 때에는 스무 살이라고 했어. 그래서 우리가 누나라고 불렀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열여덟이라고 실토했어. 그 당시 일하는 우리 또래들은 다들 스무 살이라고 속이는 게 당연했으니 화날 일은 아니었어. 미성년자는 취업이 안 되니까. 취직하는 사람도, 고용하는 사람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우리끼리 나이로 시비가 생기면 다들 스무 살이라 우겼어. 하지만 다들 안 믿었어. 결국 상대에게 민증을 까보라고 요구하는 게 유행이었어. 미성년자는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보여 줄 민증이 없잖아. 그러면 지는 거야. 미성년자로 불법 취업한 우리와 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밑바닥에서 조차 하늘과 땅 차이였어.
때밀이 형에게 맞은 멍이 든 내 얼굴 보자 장깨 애인이 깜짝 놀라며 누가 그랬느냐고, 병원 가서 진단서 떼고 경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해줬어. 장깨가 지청구를 줬지.
“어허, 오빠들 얘기하는데 또 껴든다, 껴들어.”
그녀는 얼른 입을 막으며 미안한 눈빛을 보냈어.
“아, 별거 아니에요. 제가 까불다가 한 대 맞았죠, 뭐. 헤헤.”
“야, 뚜드려 패는 새끼한테 왜 붙어 있냐. 때밀이 못하면 뒤진다디? 때려치워, 병신아.”
“나도 이제는 그만두고 싶은데... 월급을 받아야 때려치우든지 하지...”
“그 월급 준다디? 잃어버린 셈 쳐, 임마. 너 그러다 맞아 뒤진다.”
장깨가 나보다 더 심란해했어. 형에게 맞은 곳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가 퍼런 멍으로 넘어가고 있었어.
“시발. 그 새끼 확 담궈 버릴까? 구두공장 애들 델구가서. 그 새끼 술 먹고 갈 때 뒤에서 몇 번 쑤시지, 뭐.”
그는 당장이라도 실행에 나설 것처럼 매서운 표정을 했어. 말이라도 고마워서 웃음이 났어.
“웃지 마, 병신아. 너 목욕탕 관둘 때 말해라. 그 새끼 배때기 확 쑤셔갖고 창자를 꺼내버리게. 시발놈.”
그의 위로는 항상 그런 식이야. 말 뿐이지. 근데 그 날은 위로가 됐어. 전 같으면 비현실적으로 들릴 그의 위로가 이번엔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어. 상상을 하게 되더라. 형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골목길을 허위허위 걸어간다... 그가 골목 끝 어두운 곳에 다다랐을 때, 몇 개의 검을 그림자가 재빨리 움직인다... 퍽! 윽! 짧은 비명이 흐른다... 잠시 후 검은 그림자는 증거를 안 남기고 사라진다... 다음 날 새벽, 행인에게 발견된 그가 병원으로 이송된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당분간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다... 병실에 누워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나를 학대한 것을 떠올리며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퇴원하자마자 나를 찾아와 사과하고 밀린 월급을... 월급을... 줄까? 안 줄 거야. 칼에 찔리면 그가 참회를 할까? 참회는커녕 눈에 불을 켜고 찌른 사람을 찾으러 다닐 걸. 그가 참회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찔러 죽여도 내가 원하는 효과는 없는 거야. 나만 범죄자가 될 뿐이지. 그는 계속 그런 인간일 거잖아.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인간이 있는지도 몰라. <죄와 벌>에 나오는 전당포 노파처럼. 내가 형을 죽여 없앤다고 치자. 그러면 그 자리에 선한 때밀이가 온다는 보장이 있을까. 안 그럴 수도 있어. 오히려 더 나쁜 놈이 올 수도 있지. 악을 벌하고 내쫓으면 그 자리에 선함이 채워질까. 그렇다면 그 많은 교도소들은 뭘까. 형도 노파처럼 변하지 않을 인간인지 몰라.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고. 시발. 그럼 난 어떡하나. 내 월급은 어떡해...
장깨에게 포장마차에서 한 턱 내려던 계획은 내가 월급을 못 받는 바람에 포장마차에서 경양식집으로 바뀌었어. 먼저 먹고 주급에서 제하면 되니까. 포장마차보다 돈은 더 들지만 대신 좋은 걸 사 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했어. 마침 은행에서 퇴근하던 그녀까지 네 명이 식탁에 모였어. 장깨는 인희씨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의 애인과는 초면이었지만 명랑하게 인사를 나눴어. 이 기회에 친해지면 같이 쉬는 날 어디 놀러 갈 수도 있을 것 같았어. 난 장깨에게 메뉴판을 주며 말했어.
“너 이런데 처음이지? 짜식. 마음껏 골라라. 오늘 이 형님이 다 산다!”
내가 호기롭게 나가자 장깨는 별 말은 없이 시익 웃었어. 그가 애인의 메뉴를 골라주는데 인희씨는 메뉴를 보지도 않고 말했어.
“난 함박스테이크랑 핑크레이디!”
그러자 장깨가 인희씨를 흘깃 보더니 들으라는 듯 자기 애인에게 물었어.
“야, 함박스테이크에 핑크... 거시기면 면 합이 얼마냐? 와, 인희씨 세게 나가시네. 주현이가 놀랄 만했겠다야. 뭐, 됐고. 우린 오므라이스!”
저게 왜 저러지? 오므라이스라니. 애인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지 맘대로 고르는 거 봐. 저런 놈이 어떻게 연애는 잘하지? 난 장깨와 애인에게 비싼 걸 사주고 싶었어. 인희씨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깨에게 말했어.
“함박스테이크 시키세요. 오므라이스는 수프 안 나와요. 후식도 안 주는데?”
장깨가 그녀를 향해 미간을 찡그리더니 가르치듯 조목조목 끊어 말했어.
“인희씨, 분위기 파악 좀 하시죠? 인희씨가 시킨 것만 해도 주현이 저새끼는 이미 엥꼬라구요. 우리가 전부 함박스테이크에 핑크레이디 시키면 그 돈을 쟤가 다 어떻게 냅니까? 아, 됐고, 우린 오므라이스!”
장깨가 내 주머니 걱정을 해 주는구나. 근데 오늘은 내가 한 턱 쏘고 싶었어. 인희씨에게도 잘 보이고 싶고. 장깨에게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
“괜찮아... 여긴 내가 일하는 곳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괜찮어? 뭐가 괜찮냐, 병신아. 목욕탕 월급도 못 받은 새끼가.”
아유, 저게 진짜. 내가 쏘겠다는데... 인희씨 앞에서 창피하게 월급 얘기는 왜 꺼내고 난린지 모르겠네.
“야, 넌... 인희씨 앞에서... 왜 그래? 오늘 내가 쏘겠다는데... 니네 맛있게 먹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구, 임마.”
“지랄하네. 정신 차려, 병신아. 또 지난번처럼...”
지난번... 그 만 오천 원?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깨도 멈칫, 말을 멈췄어. 그러더니 금세 넉살 좋은 표정으로 바꿔 인희씨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어.
“아, 됐고! 인희씨도 오므라이스. 오케이? 주현이 저 새끼 지금 돈 없걸랑요. 때밀이 그 시발넘이 월급을 안 줘서.”
“그랬어요? 몰랐네! 아, 미안해요. 주현씨가 말을 안 해서 몰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저 새낀 여자한테 그런 말 못 해요. 그러니 인희씨가 좀 봐줘요. 킬킬.”
아유, 저걸 그냥. 인희씨 앞에서 망신 주려고 작정했나 봐. 오늘은 작정한 듯 떠드네? 그나저나 인희씨 입장 난처하겠네. 살짝 그녀 눈치를 봤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물었어.
“근데... 주현씨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요?”
“아, 저... 별 거... 아니에요... 월급 나중에 준다고 형이 그랬어요... 다음 달엔...”
내가 영 답답해 보였는지 장깨가 내 말을 끊었어.
“인희씨. 제가 짱깨 배달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꼭 외상 달라는 새끼들이 있거든요. 주인아저씨는 당장 가서 받아오래요. 제가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개기는 거죠. 줄 때까지. 시발. 존나 개기는 데 지들이 어쩔 거야? 주현이도 그걸 배워야 되는데. 저 새낀 물러 터져서 영... 아직 멀었어요. 내 말 틀렸냐, 임마?”
맞는 말이었어. 난 왜 그러나 모르겠어. 처음엔 형이 무서워서 그랬지만... 솔직히 지금은 무서워서도 아니거든. 습관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형한테 대들다가도 한 대 맞으면 바로 꼬리를 내리게 되거든.”
“주현이 저거 인희씨한테도 물렁물렁하죠? 얌마, 연애는 그렇게 하는 거 아냐, 날 봐. 여자를, 임마. 탁 휘어잡고, 임마. 이렇게, 자식아.”
하면서 애인의 어깨를 꽉 잡았어. 장깨 애인은 그에게 눈을 흘겼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어. 그래, 장깨는 뭘 해도 멋있었어. 어떤 말도 장깨가 하면 그럴듯하게 들렸어. 장깨와 애인의 자연스러운 사이가 부럽기도 했어. 얼마나 더 지나야 난 인희씨와 저런 사이가 될까. 그러려면 나도 장깨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저 당당함과 유쾌함을 어떻게 따라가지? 중국집 배달을 하지만 말과 행동은 세상을 다 터득한 그를 배울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장깨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사장님이 나오셨어.
“함박스테이크 아가씨가 누군가 했더니 아주 이쁜 아가씨였네?”
“안녕하십니까? 싸장님, 그 만 오천 원을 이 녀석에게 빌려 준 사람이 접니다. 헤헤.”
결국 장깨 덕분에 인희씨도 만 오천 원에 대해 알게 되었어. 그리고... 아주 민망해했어. 그녀는 울적한 표정으로 오므라이스를 시켰어. 먹으면서도 말이 별로 없었어. 난 먼저 급히 먹고 노래를 불렀어.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어. 식사가 끝나자 사장님이 특별히 후식을 주셨어. 사장님이 오늘은 청소하지 말고 인희씨와 일찍 가라고 하셨어. 계산을 하려고 보니 그녀가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나 모르게 계산을 한 뒤였어.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왜 그녀가 냈을지 의아했어. 장깨는 애인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먼저 떠나고 난 인희씨와 그녀 집 쪽으로 향했어. 바람이 차가웠지만 둘이 걷기에 꽤 낭만적이었어. 한 오 분쯤 말없이 걸었나? 앞서가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보며 말했어.
“주현씨, 우리 술 마실래요?”
* 저자의 말 : 이 글들로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했습니다.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출판 프로젝트는 챕터를 단락을 서른 개 까지만 넣을 수 있다더군요.ㅠ
사실 <목욕탕 뽀이> 브런치글은 모두 44개입니다. 브런치 북엔 30개 밖에 싣지 못합니다. 여기에 실리지 못한 14개 글을 읽으시려거든 제 브런치의 매거진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brunch.co.kr/magazine/bodywasherstory 에서 부탁드립니다. 불편 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