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29
여탕 누나는 때밀이 형의 동거녀에게 머리채를 잡힌 소동 이후로 출근을 안 하더니 끝내 그만뒀어. 형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어 온 게 탄로 났잖아. 그 일로 형은 동거녀와 누나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임신한 동거녀에게 돌아가기로 했대. 그럼 누나는 어쩌지. 걱정됐어.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누나를 욕했어. 형이 가정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꼬여내어 바람피우게 했다는 거야. 특히 카운터 이모가 목소리를 높였어. 그분도 남편이 바람나 딴살림을 차렸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러신가? 그분은 말끝마다 거 보라고, 남의 가정을 파괴해 피눈물 나게 했으니 자기도 천 벌 받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어. 근데 이해가 안 갔어. 사랑은 둘이 같이 하는 거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근데 왜 여자를 더 비난하지? 내가 형과 누나의 대화를 들어서 아는데 누나가 형을 꼬여낸 게 아니야. 그 반대지. 누나는 술이 취하면 형의 동거녀 얘기를 꺼내며 울었거든. 오빠는 여자 친구가 이미 있는데 우리 이렇게 만나도 되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형이 그랬어. 그 미친년이랑은 곧 헤어질 거라고. 난 니가 좋다고. 동거녀와 누나 사이를 오간 건 형이야. 근데 형은 그대로 일을 하고 누나는 그만둬야 돼? 동거녀가 누나 머리채를 잡은 것도 그래. 그녀를 배신한 건 누나가 아니라 형이잖아. 그런데 사건의 당사자인 형은 그대로 두고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두 여자들이 싸우다니. 두 여자가 싸우는 동안 형은 살짝 빠져 있으면 되는 거야. 형은 그 점을 이용하는 것 같았어. 누나가 그만둔 일을 듣고 형을 나무라러 온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거든.
“허헛, 참... 아, 제가 이번에 실수를... 뭐... 했습니다. 일 잘하길래 불쌍해서 잘 대해줬더니만... 걔가 그렇게 달라붙더라고요. 허허, 참...”
사장도 동의하는 것 같았어.
“얌마, 옛날이랑 달라. 요즘은 조심해야 해. 남자가 아무 데나 쑤시다 잘못되면 코 꿴다. 다 뜯기고 불알 두 쪽만 남는 수가 있어. 이상한 년들이 좀 많아야 말이지.”
어쩜 저렇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할까. 내가 다 들었는데. 누나 앞에서 형은 늘 동거녀 흉을 봤거든. 그녀와는 영 맛이 안 난다고, 근데 넌 사람을 쪽쪽 빨아들인다고. 그러면 누나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저엉말? 하고 되묻곤 했거든. 형수님이랑 헤어질 테니 자기랑 살림 차리자고 조르던 형이었어. 근데 이제 와서 누나를 꽃뱀 취급하다니. 사랑이란 게 얼마나 덧없니.
그런데 진짜 문제는 형의 속마음이었어. 동거녀가 싫은 거야. 오빠들이 찾아와서 동생 눈에 눈물 나게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해서 할 수 없이 다시 살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여탕 누나를 좋아한 거야. 내가 노래를 갔다가 열 시 반쯤 목욕탕으로 돌아오면 탈의실에 형과 누나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곤 했어. 누나는 목욕탕 근처에 방을 얻어 놓고 혼자 살았어. 형은 가끔씩 나더러 일이십만 원을 찾아오라고 해서 생활비로 대 주면서 가끔씩 퇴근길에 누나 방에 들러 갔어. 형이 너무 안 오면 누나는 형의 퇴근 무렵에 목욕탕으로 찾아왔어. 그런 날은 형이 화를 냈어. 내가 알아서 갈 텐데 왜 찾아오냐고. 그럴 때마다 누나는 훌쩍거렸어. 그럼 형은 누나와 탁자에서 술을 마시면서 달래거나 정사를 나누고 나갔어. 그러면서 나에게는 입단속을 시켰어. 어떤 날은 누나가 낮시간에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어. 형이 화를 더 냈어. 그 불똥은 내게도 튀었지.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는 거야. 심지어 월급날이 지났는데 아무 말 없이 안 주는 거야. 일주일이 지나도록 안 주길래에 더 기다릴 수 없어서 퇴근하는 형에게 말을 꺼내보았어.
“그 새끼, 징징대긴. 그거 깔아놓은 거야, 임마.”
깔아놓는다고? 일정 기간의 월급을 보증금처럼 잡아두는 걸 당시엔 깔아 놓는다고 표현했어. 구두 공장도 청바지 공장도 한 달 치 월급을 깔아놓는다고 했지. 그 달치 월급을 받고 바로 다음 날부터 안 나오는 경우를 예방하려고 담보로 잡아 놓는 거래. 근데 나는? 이제 와서 월급을 깔아 놓는 게 이해가 안 됐어.
“얌마, 니가 언제 토낄지 모르는데, 새꺄. 이번 달 월급 받고 도망가 버리면 내가 좆되잖어, 새꺄. 너 같음 주겠냐?”
내가 경양식집에 노래하러 다닌 일 때문에 화가 났나? 그래도 서운했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다니. 내가 그동안 충성한 게 얼만데. 걱정 마시라고, 난 갈 곳도 없고 때밀이도 배워야 하니 꼭 돌아오겠다고 해도 형이 들은 척 안 해. 그럼 월급의 반이라도 달라고, 어머니 갖다 드려야 한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야. 그나저나 당장 장깨 돈을 갚을 일이 문제였어.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 번 더 부탁을 해 보았어.
“그럼 만 오천 원이라도 먼저 주시면...”
“이 시팔노무씨애키가 짜증 나게! 콱 죽여 버릴라. 안 꺼져?”
울컥했어. 정말 해도 너무하는 것 같았어.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일 안 한 걸로 월급 달라는 것도 아니고...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다 거울 앞으로 넘어졌어. 거울 앞에 있던 스킨로션들이 와르르 굴러 떨어졌어.
"쉽새끼. 은혜도 모르는 새끼가. 싸가지 없이! 꺼져, 시발놈아."
형은 그대로 퇴근해 버렸어. 일어나면서 거울을 보니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코피가 났어. 눈에 불이 확 켜지는 기분이었어. 죽여 버리고 싶다! 사물함에 숨겨놓은 잭나이프가 떠올랐어.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끓는 주전자 같던 울분이 조금 가라앉았어. 그래, 나도 널 해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두고 보자. 이를 악물었어. 나란히 서면 형은 나와 비슷한 덩치야. 같이 싸우면 상대가 될지도 몰라. 내가 형에게 맞는 걸 볼 때마다 장깨는 혀를 찼어.
“병신아, 왜 맞냐, 새꺄. 넌 깡이 없는 게 문제야. 그럼 계속 얻어터져라. 으이구!”
맞아. 형은 일이든 싸움이든 죽기 살기로 하는데 난 머뭇거리거든. 어린 내가 윗사람에게 대들어도 되나? 형이 월급을 주는데. 대드는 건 너무 무례한 건 아닐까. 고민하는 거야. 이런 정신 상태로 무슨 싸움을 하겠어? 내가 겁먹고 당하기만 하니까 형이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생각도 들었어. 얻어맞을 때마다 숨겨 놓은 칼을 떠올리는 걸로 혼자 위안 삼고 넘어갔잖아. 그러면 뭐해? 형은 내가 칼이 있는 것도 모르는데. 형이 아무리 무서워도 밟히면 꿈틀 한다는 걸 보여줬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어. 형 입장에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아이라는 인식을 준 건 내가 겁을 먹고 참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무리 월급 받는 관계지만 폭력까지 당연한 건 아닐 거야. 경양식집 사장님이라면 날 이런 식으로 대하진 않을 텐데. 결국 월급은 못 받고 경양식집에서 받은 주급과 비상금을 합쳐 장깨 돈을 갚고 나니 돈이 하나도 안 남았어. 월급까지 받았으면 장깨를 포장마차 데려가 뭐라도 사 주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