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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Apr 24. 2020

아이의 말에 담긴 삶의 무게

아이들이야 말로 최고의 전기수

월요일이면 아이들에게 주말에 있었던 일을 묻곤 한다.


"우리 소가 송아지를 낳았잖아요. 원래는 토요일 낮에 낳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노무 소가 빽빽 울기만 하고 안 낳다가 밤이 되니깐 낳았잖아요. 아빠가 나보고 불 좀 들고 있으래요. 빨간 불인데 선풍기처럼 생겼어요. 그거 들고 있으면 뜨거워요. 송아지 춥지 말라고 틀어주는 거에요. 근데 조심해야 돼요. 잘못해서 넘어지면 바닥에 소똥이 있으니깐 철퍼덕! 그래서 꼭 붙들고 있었죠. 에이, 팔 빠져 뒤지는 줄 알았네."


"우리 큰누나가 스물두 살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애인이 군대 갔잖아요. 엄마가 거기 따라가면 죽을 줄 알라 그랬는데. 우리 누나가 몰래 따라갔게요, 안 갔게요?"


- 헉! 안 따라갔을 거 같은데? 따라가면 엄마한테 죽잖아.


"땡! (눈동자가 커지며)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우리 누나가 애인을 따라갔다니깐요! 그러니깐 엄마가 열받었죠. 엄마가 누나 방에 들어 가더니 안에서 문을 딱 걸었다구요."


- 헉! 누나 큰일 났네. 너네 엄마 엄청 무섭다며?


"네, 엄청 무서워요. 근데 이상하게 이번엔 안 무서웠다요? 엄마가 누나한테 엄청 조용히 말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무슨 말 하나 들을라구 누나 방문에 귀를 댔죠."


- 엄마랑 누나랑 무슨 말을 했는데?


"모르죠. 안 들렸으니깐요. 한참 있다가 엄마가 나왔죠. 저 보고, 요 쪼끄만게 들으면 아냐 그래요."


- 알지 그럼. 너 똑똑하잖어. 그래서 누나는 어떻게 됐는데?


"잤어요. 내가 누나한테 왜 벌써 자냐고 물어볼라고 방에 갔단 말이에요. 근데 누나가 나가서 테레비나 보라그러잖아요."



아이들의 발표를 들어보면 각자 사는 형편에 따라 녹아 있는 삶도 다르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을 엿보는 재미는 내가 선생이어서 누리는 재미일 테다.

저학년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보고 느끼며 당면했던 삶을 덤덤하게 전한다.

아이들의 말에는 아이가 삶을 감당하는 태도가 투영되어 있다.





*


남의 이야기 듣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해주신 옛날이야기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지금도 그 레퍼토리를 외운다.

특히 학교 뒷산 공동묘지에 비 오는 날마다 나타난다는 귀신 이야기는 특히 재미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날의 날씨나 분위기에 따라 이야기를 비극으로, 또는 희극으로 꾸며 들려주셨다.

하도 재미있어서 오줌이 마려워도 참고 들었다.


아라비안나이트, 로빈슨 크로소우, 로빈 후드 같은 이야기도 선생님께 들었다.

그 이야기들의 원작이 책으로 먼저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럴만한 것이 집에 책이 없었다. 책이라는 것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나중에 책을 읽고 나서야 아, 3학년 때 선생님은 이야기를 꽤 잘하시는 분이셨다는 걸 알았다.

책의 내용을 더 재미있게 각색해서 마치 우리 학교, 우리 동네에서 진짜 있었던 것처럼 해주셨으니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공부도 안 하고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다.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 속 주인공의 말투도 재미있게 흉내 내고 칠판에 그림까지 그리기도 하셨다.

덕분에 백조의 호수, 십오 소년 표류기, 보물섬 같은 복잡한 모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었다.


3학년 때 뭘 배웠는지는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는 기억난다.

그분은 왜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을까.

책이라곤 거의 접하지 못하는 우리가 가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책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게 되었을까. 지금껏 책이나 영화광으로 사는 건 그분 덕이다.



선생이 되고 난 다음엔 아이들 이야기 듣는 게 또 재미있었다.

그냥 다짜고짜 말하라고 하면 아이들은 쭈뼛거리면서 망설이거나 이야기를 숨기지만 적당히 호응을 해주면 신나서 이야기한다.

학년이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에게 말을 시키고 적당히 호응을 해주니 점점 유창하고 재미있어졌다.

부모님 부부싸움하신 이야기, 형제간의 다툼, 강아지가 목줄이 풀려 달아난 일처럼 일상의 이야기부터

좋아하던 남자 애한테 커플링을 줬는데 그 새끼(?)가 커플링을 버려서 울었다는 치정극까지 대화의 소재가 무한했다.

어떤 아이는 말을 하면서 얼굴이 벌게지도록 흥분하기도 하고 심지어 속상해서 우는 아이도 있었다.


어떤 날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한 시간을 넘어가기도 한다.

교과서를 펴 놓고 공부는 시작도 안 하고 이야기만 할 것 같아 적당히 끊고 진도를 나가려고 하면 아이들이 막 소리를 지른다.


"삘(?)이 왔을 때 이야기해야 재미있다구요. 근데 여기서 공부를 하면 되겠냐구요."


"감정을 잘 읽는 사람이 되라면서요. 그러려면 말을 해야 읽죠, 말을! 근데 왜 선생님은 자꾸 딴 공부를 하라 그래요!"


그러고 보니 자신을 잘 표현하게 하려고 국어도 배우는 거잖아. 아이들이 말이 틀린 거 하나 없다.

난 데 없이 성실한 교사인 양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다가도

몇 몇 아이가 나서서 다음 시간에 더 열심히 공부할 테니 이야기를 더 하자고 조르면 못 이기는 척 받아주곤 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이야기가 한바탕 지나가면 아이들은 나의 주말에 대해서도 묻는다.

아이들에게 말을 시켰으니 혼자 내뺄 수가 있나?

하지만 아이들의 역동적인 일상과는 달리 늘 비슷한 주말을 보내는 나는 대충 몇 마디 얼버무리려는데 잘 안된다. 아이들이 자꾸 더 물어와서다.

요놈들, 공부하기 싫어서 이야기를 오래 끄나 싶어서 난 재미없고 건조하고 짧게 말하려 하는데 어떤 땐 제대로 코가 꿰이기도 한다.


- 선생님도 말씀하셔야죠. 우리도 말했으니깐요. 주말에 뭐 하셨어요?


"음... 난 뭐... 맨날 똑같으니깐... 잘 생각이 안 나는데..."


- 에이, 그러지 말고 얘기해봐요. 우리가 들어주께요.


"음... 뭐... 별일도 없었는데... 밥 먹고... 자고..."


- 산에 갔죠? 지난주에도 산에 가셨대매요."


"음... 뭐, 산에 잠깐... 봄이 왔으니깐... 나물이나 있나 볼라고..."


- 거 봐요. 산에 갔잖아요. 근데 무슨 나물 있나 볼라고 갔는데요?


아뿔싸! 이 질문을 대충 넘겼어야 하는데. 취나물, 두릅, 고사리, 원추리, 더덕... 어쩌고 말하다 보니 길어졌다. 코가 걸리고 만 것이다.

시골 아이들이라 나물에 대해 잘 아는 데다가 산에 가면 만나는 뱀, 다람쥐, 올챙이...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신나서 떠들고 난 끝내 교과서를 펴지 못했다.


개인의 이야기는 그 사람의 삶이 아닌가.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그 아이를 키우는 환경이 녹아 있다.


갓 태어난 송아지, 강아지의 죽음, 할아버지의 오토바이, 엄마 아빠의 가난, 한 겨울에 백만 원이 넘게 나왔다는 보일러의 기름값,

고장 난 경운기, 까먹었던 생일날 갑자기 먹게 된 생일 케이크, 옆집 친구가 시내로 이사 나간 일, 죽은 아기 새를 모종삽으로 묻어준 일...


이야기 속 아이들은 슬픔과 절망도 겪지만 그 안에서 선한 마음을 스스로 찾아내 키워가기도 한다.

주어진 삶의 곡절을 묵묵히 받아내면서 아이들은 단단한 인간으로 자란다는 게 경이롭다.

아이들도 그걸 스스로 느끼게 해주려고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난 부러운 척 추임새를 넣어준다.


- 우리 강아지가 작년에 애기 강아지로 집에 왔단 말이에요. 근데 새끼를 낳았잖아요, 글쎄!


"헐. 애기 강아지가 또 강아지를 낳았어? 선생님 한 마리만 주라."


- 안 돼요. 눈도 못 떴단 말이에요.


"그래? 그럼 눈 뜨면 주라."


- 선생님은 강아지로 모 할라그래요? 또 새끼 낳으라 그럴라고요? 애긴데 벌써 강아지를 낳으라 그러면 어떡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타고 다닐라 그러지. 말처럼. 그럼 멋있잖아. (장군 흉내를 내며) 갑옷도 하나 사야지. 이랴, 이히히힝."


- 안 돼요. 강아지가 어떻게 말이 되냐구요. 강아지 타면 짜부 돼요.


"헉. 짜부되면 안 되는데..."


- 그러지 말고 쫌만 기달려봐요. 제가 여군에 갈 거니깐요.


"여군? 와, 넌 좋겠다. 여군 엄청 멋있잖아."


- 네, 뭐... 쫌 멋있죠. 제가 여군 되면 탱크 조종할 거예요. 탱크 조종하는 거 배우면 선생님도 태워 드리죠, 뭐.


"오, 그럼 나 탱크 하나만 줘. 타고 다니게. 차 막히면 뻥 쏘고. (대포 쏘는 흉내를 내며) 빵빵!"


- 알겠어요. 대신 쫌만 기다리세요. 제가 여군 돼야 되니깐요. 대장님한테 남는 탱크 있냐구 물어봐서 있으면 하나 드리는데 없으면 못 드려요. 대신 제 옆에는 타시게 해드릴게요."


말 잘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말을 잘 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코로나 바이스 때문에 집에 갇혀 있다.

저들끼리 단톡방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바짝 얼굴 대고 떠들던 흥에 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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