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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an 21. 2021

우리 애가 사랑을 한다고요? 아직 애긴데... 호호호

모든 아이들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


아이가 사랑 때문에 울고 있다. 녀석의 '이마에 피는 말랐'느냐고? 잘 모르겠다. 5학년짜리가 뭘 알겠느냐고?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도 때로는 누군가로 들뜨고 그 누군가 때문에 아파한다. 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사랑을 하다니! 작년까지만 해도 꺅꺅 소리 지르고 툭하면 울던 녀석들이. 사랑도 스스로 터득해가려나. 알아서 큰다더니,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는 재주가 있나 보네.



5학년 교실에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여자아이는 모든 신경을 남자아이에게 쏟기 시작하지만 남자아이는 그 여자아이를 잘 의식하지 못한다. 제법 성숙한 정신세계에 들어선 열두 살의 여자아이들과 아직은 알까기가 더 재미있는 남자아이들이 모인 교실. 그곳에도 사랑은 있다. 서툴고 그래서 자주 넘어지지만, 한편 다채로운. 저마다 자기 색깔의 사랑 꽃을 피워나가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재미야말로 선생 노릇의 백미다.







우리 반 민지가 진석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들과 늘 교실에 있지만, 둔한 담임인 내가 제일 늦게 알았다. 서른 명 남짓 되는 교실에 이렇게 저렇게 얽힌 사랑의 작대기들에 한 소식은 5학년 아이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대화 소재다. 현재 우리 교실의 몇 명은 열애 중이고 몇 명은 짝사랑 중인데, 다들 멜로드라마 뺨치고 있다. 바야흐로 호르몬이 넘치기 시작하는 고학년의 풍경이다.




듣고 보니 과연 민지의 시선은 진석이를 향해 있다. 공부는 건성이다. 쉬는 시간엔 더하다. 아이고, 저러다 진석이 닳겠네. 민지 눈빛에 생기가 있다. 저 녀석,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렇게 초롱초롱하진 않았는데? 근데 이를 어쩌나. 정작 진석이는 민지가 별로인가 보다. 게다가 소연이를 좋아하고 있다지. 그럼 삼각관계?




미술시간. 진석이가 내게 와서 의자를 옮겨 친구랑 물감을 같이 써도 되냐고 묻는다. 그러라고 하니 소연이 자리 가서 의자를 번쩍 들어다 자기 옆자리에 옮겨놓는다. 그리기가 시작되자, 또 번쩍 일어나 물을 떠다 소연이 물감통에 부어 준다. 소연이는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와 동시에 아까부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지 표정은 일그러진다. 더는 못 참겠는지 한마디 툭 내뱉는다. 빈정대는 말투다.




"완전, 완전이네. 헐! 야, 이진석! 어지간히 좀 해라. 이젠 물도 떠다 주냐? (개그맨 흉내를 내며) 썬쒱님~, 우리 반에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주변의 아이들 서너 명이, 우후~ 뚜르뚜뚜, 뚜르뚜뚜~(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커플 음악) 노래한다. 그러자 소연이가 소리친다.




"야, 니들 죽을래? 선생님, 쟤들 좀 혼내주세요!"




진석이는 그 상황을 모른 척 그림을 그린다. 표정을 보니 은근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소연이가 계속 화를 내자 마지못해, 그것도 조금은 귀찮은 표정으로 친구들이 아닌 나를 향해 한 마디 한다.




"선생님, 우린 커플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예요. (자기 물감을 챙기며 소연이를 향해) 이소연, 빨리 니 자리로 가!"




소연이는 민지의 놀림보다 진석이의 반응에 실망하는 눈빛이다. 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더니 민지 쪽을 한 번 노려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나는 민지를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민지는 이유를 짐작하겠다는 듯, 저항 없이 나온다. 친구가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을, 공부시간에 한 것이 문제인 걸 아느냐고 물으니 안다고 한다. 한창 미술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이따 얘기하기로 하고 들여보낸다. 민지는 밝은 성격에 넉살이 좋은 아이다. 밝은 성격이 대부분 그렇듯, 평소 산만한 편이다. 악의는 없는데 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기분 좋을 땐 애교가 넘치지만 기분 나쁘면 반항도 한다. 그래도 학교에 오는 것이 좋아서 방학 때도 개학을 기다렸다는 아이다. 오지랖이 넓어서 친구들 일에 관여하기를 좋아하는데 가끔은 지나쳐 괜한 오해도 받는다. 아이들은 민지를 가볍고 만만한 아이로 여기는 것 같다. 흥이 넘치면 수업 시간에도 아무 말이나 쏟아 놓기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 점 때문에 담임 입장에서 야단칠 일이 생기지만, 귀엽고 발랄한 아이라 밉상은 아니다. 민지는 오늘 진석이와 소연이 사이가 샘나서 놀렸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를 놀리는 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반복되면 친구들의 미움을 받아 따돌림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과 후, 아이들이 돌아가고 민지와 마주 앉았다.




나 : 선생님이 널 왜 남으라고 했는지 짐작 가니?


민지 : (애써 덤덤한 척하며) 네. 제가 미술 시간에 소연이랑 진석이 커플이라고 그래서잖아요.


나 :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니?


민지 : 그냥요. 근데 걔네 진짜 사귀는 거 맞아요. 소연이가 애들한테 다 말했어요. 근데 진석이가 아니라고 한 거예요.


나 : 그래?


민지 : 네. 우리 반 애들 다 알아요.


나 : 친구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면... 굳이 아이들에게 진석이와 소연이가 커플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민지 : 그냥 말해봤다니까요. 애들이 다 아는데. 괜찮을 줄 알았죠.


나 : 소연이랑 진석이는 너에게 화난 것 같던데?


민지 : (어이없어하며) 그게 웃기죠. 지들이 사귀는 거 맞잖아요. 내숭은 무슨.


나 : 그런데 왜 화가 났을까?


민지 : 모르죠. 자기들이 사귀는 걸 사귄다고 말한 건데. 화를 내잖아요.


나 : 소연이랑 진석이가 화난 이유를 난 알 것 같은데 네가 모른다면... 걱정인걸.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넌 그걸 알아내야 집에 갈 수 있어.


민지 : (인상을 쓰며) 헐. 저 학원 차 타야 해요. 늦으면 혼난단 말이에요.


나 : 그럼 서둘러야겠구나. 하지만 생각해내기 전엔 못 가.


민지 : (칭얼대는 목소리로) 안돼요. 저 가야 돼요. 네?


나 : 생각해내야 갈 수 있어.


민지 : (원망하는 표정으로) 그럼 저 학원 늦는 거 선생님이 책임져요. 선생님이 못 가게 했으니까.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엄마한테 전화할 거예요.




민지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전화기 전원을 켠다. 티리링. 맑은 소리와 함께 부팅되는 사이에 한 번 더 말한다.




"진짜로 우리 엄마한테 말할 거예요. 선생님이 못 가게 한 거 맞죠? 우리 엄마더라 데리러 오라고 할래요."




민지가 엄마 핸드폰 번호를 찾아 화면을 내 눈 가까이 보여주며 말한다.




"선생님, 마지막 경고예요. 저, 진짜 통화 눌러요. 진짜요!"




"응. 알았어. 그래도 전화 끝나면 자리에 앉아서 잘못을 생각한 다음, 선생님한테 말하고 갈 거지?"




민지가 엄마에게 전화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진석이를 좋아하는 걸 엄마가 알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전에도 진석이 좋아하는 걸 엄마에게 들켜 야단맞은 적이 있다. 민지 말에 의하면 대학 가기 전까지는 남자친구 생기면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공부 때문인데, 나중에 민지 엄마와 상담하며 여쭤보니 이성 교제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니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고백하고 차이는 것 좀 그만하라고 하신 것이었다. 민지가 고백한 남자애가 이미 여러 명인데 공교롭게도 모두 거절당하는 같길래 값싸 보이나 걱정이셨단다. 엄마는 민지가 좌절할까 봐 안타까운 마음을 말씀하신 거지만 5학년 아이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춘기에 접어든다고는 하지만 고학년 아이들은 아직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순종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시기부터는 부모에게 보여줄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분리한다. 집에서는 고분고분한 아이로, 학교에서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아이로. 특히 이성 교제에 관해서는 더욱 은밀하려고 한다. 부모의 부정적인 태도를 읽었으니 말을 하기는 싫고, 숨기거나 친구 몇에게만 털어놓는다.






엄마한테 이르겠다고까지 해봤지만 내가 여전히 단호하자 민지 표정이 슬퍼진다.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만 만지작 만지작. 자기가 진석이를 좋아하는데 진석이가 소연이를 좋아해서 기분이 안 좋았겠지. 안 그래도 속이 상했을 텐데 내가 너무 매정한가 생각이 들어 먼저 입을 열었다.




"진석이와 소연이가 서로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민지에 의해 폭로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야. 그런 관계는 저절로 알려질 때까지는 모른 척해 주는 것이 예의란다. 그건 걔네 둘의 권리거든."




내 말을 들은 민지는 화난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돌아가 털썩, 소리 나게 앉는다. 식식거리는 표정을 보니 내 말이 듣기 싫은 모양이다. 내가 자기 편을 안 들어줘서 억울해하나? 전엔 이 정도면 내가 다시 불러 뭐가 억울하냐고 물어 주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모른 척, 냉정한 표정을 짓자 눈물을 툭 떨어뜨린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좀 있더니 내게 온다.




민지 : 선생님, 생각났어요. 맞아요. 걔네가 화난 건 제가 놀려서예요.


나 : 놀리는 게 왜 기분 나빴을까?


민지 : (덤덤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겠다니까요. 지들이 사귀는 거면 놀려도 참아야 되잖아요.


나 : 사귀면 놀려도 참아야 된다고?


민지 : 그렇죠. 놀리는 게 창피하면 사귀지 말든가요.


나 : 사귀면 놀림을 참아야 할까? 사귀지만 부끄러워서 남들이 모르길 바랄 수도 있잖아.


민지 : 사귀는데 왜 부끄러워요? 좋죠. 남들은 사귀고 싶어도 고백을 안 받아줘서 못 사귀는데.


나 : 누가 고백을 안 받아줬는데?


민지 : 진석이요. 작년에 제가 고백했을 때 안 받아 줬거든요. 그러면서 소연이랑은 사귀잖아요. 소연이는 올해 사귄 거예요. 저는 작년에 고백했는데.


나 : 아하, 진석이가 고백을 안 받아줘서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구나?


민지 : 그렇죠. 고백은 제가 먼저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저를 배신했잖아요.


나 : 진석이가 네 고백을 안 받아 줘서 화난 건 이제 알겠어. 하지만 소연이는?


민지 : 소연이도 좋다 그러는 거 들었어요. 진석이랑 사귀잖아요.






이 시기 아이들은 좋아하는 상대에게 거절당한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한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런 내밀한 감정은 누구에게 배워야 할까. 부모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아이들은 부모와 이런 대화를 하지 않는다. 대신 역시 어설픈 친구들이나 고도로 각색된 멜로드라마로부터 사랑을 배운다. 하지만 어쩌랴, 모든 아이들이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니.




다음 날, 한 아이가 내게 소식을 전한다. 선생님, 소연이랑 진석이 깨졌대요. 소연이가 찼대요. 아니나 다를까, 두 아이의 표정이 어제까지와 달리 데면데면하다. 5학년 교실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날 저녁, 소연이가 내게 문자를 보낸다.




소연 : 선생님, 이진석 혼내주세요. 저한테 꺼지라 그랬어요ㅠㅠ


나 : 헐. 진석이가 그런 말을?


소연 : 네, 진짜 그랬어요.(진석이가 보낸 문자를 캡처해서 보내며)


나 : 흐음. 정말이구나. 선생님이 내일 진석이에게 한 마디 해야겠는걸.


소연 : 근데 저 때문이면... 안 그러셔도 돼요.


나 : 그래?


소연 : 저도 진석이한테 찌질하다고 했으니까요.


나 : 아이구, 너네 싸웠구나? 이 꽤 친한 줄 알았는데?


소연 : 근데... 이젠 아녜요. 선생님이 저랑 진석이랑 '사귀는 줄 아실까 봐' 알려드리는 거예요.




예쁘고 귀엽다,라는 말을 소연이는 자주 듣는다. 중학교에 가면 걸그룹 오디션에 나갈 거라는 소문도 있다. 키 크고 날씬하고 머리가 긴 소연이는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자신도 그걸 아는지 최근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에 관심이 많아졌다. 언제부턴가 교실 뒤 거울 앞에 자주 간다. 엄마는 상담에서, 소연이가 예쁜 옷을 검색해서 엄마에게 사 달라는 요구가 늘었다며 걱정했다. 공부도 안 하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데 화장에도 관심을 가지니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요즘 인기 있는 남자 아이돌 그룹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한다. 진석이도 소연이처럼 인기가 많다. 키가 크고 흰 얼굴, 뛰어난 운동실력에 활달한 성격 때문이다. 넘치지 않을 정도의 장난기도 진석이의 매력을 더한다.




다음 날, 민지가 상담을 요청해 온다. 친구들이 자기를 따돌린다는 것이다.




민지 : 진석이랑 소연이가 헤어졌단 말이에요. 근데 오유미가 저 때문이래요.


나 : 유미가 그랬어?


민지 : 네, 학원에서 진짜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깝치지말라 그랬는데 학원 선생님은 저더러 나쁜 말 썼다고 뭐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학원 끊겠다고 엄마한테 말했는데...


나 : 아이고, 그래서?


민지 : 엄마가 학원에 전화해서 따졌죠. 선생님이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학원은 계속 다니래요.


나 : 네가 학원을 끊는다고 유미에 대한 너의 마음이 풀릴까?


민지 : 아뇨.


나 : 그럼 학원 선생님을 원망하면 안 돼. 네가 나쁜 말 한 건 사실이고 그 선생님은 할 일을 하신 거니까.


민지 : 근데 유미가 저더러 진석이한테 꼬리치지 말라 그러잖아요.


나 : 꼬리?


민지 : 진석이가 소연이랑 헤어졌으니까 저더러 진석이한테 꼬리치지 말라고...


나 : 아하, 그 말 때문에 유미에게 화가 난 거구나?


민지 : 진짜로 저 꼬리 안 쳐요. 유미 지가 꼬리 칠 거면서.


나 : 유미가 그럴 거래?


민지 : 뻔하죠. 유미도 작년에 고백하려다 말았거든요.






소연이와 진석이가 인기의 정상에 있다면 유미와 민지는 평범하다. 두 아이에 비해 친구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적다. 특히 민지는 목소리가 크고 고집이 좀 있다. 아이들과 시비가 생기면 어지간해선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 싸움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민지 자신은 그런 평판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친구들을 대변해서 몇 번 싸워 준 적은 있지만 일부러 시비를 건 적은 없다는 주장이다. 또 진석이를 좋아하는 열정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진석이가 자기 고백을 거절한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민지 : 제가 작년에 김진석한테 물어봤었단 말이에요. 왜 제 고백 깠냐고(거절했느냐고). 근데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나 : 아이고, 그러게. 진석이가 말해줬으면 민지가 덜 답답할 텐데. 그치?


민지 : 그러니까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나 : 그러게. 그러고 보니 선생님도 예전에 고백했는데 상대가 안 받아줬어. 그런데 나도 그때 이유를 못 들었어.


민지 : 헐.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답답하게 참으셨어요?


나 : 그땐 궁금했는데... 말을 못 하겠더라. 창피할 것 같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어. 그냥 싫다는 말 들으면 내가 상처받을까 봐.


민지 : 그러니깐요...


나 : 그렇지? 진석이가 말을 안 하는 건 진석이 마음이야.


민지 : 그러니깐요...




민지가 힘없이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간다. 뒷모습이 애잔하다. 저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백을 하고, 거절당할까. 그래도 민지가 지나게 될 청춘이라는 터널이 부럽기만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연이가 떠난 진석이 여자친구 자리에 여자아이들이 관심을 보인다. 대표적인 아이가 민지에게 꼬리치지 말라고 했던 유미다. 유미는 진석이 엄마와 자기 엄마가 한 아파트에서 친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흘린다. 정작 진석이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유미의 구애도 민지 못지않다.




유미 : 야, 이진석, 너 오늘 학원 끝나면 바로 우리 집에 가야 돼.


진석 : 니네 집엔 왜?


유미 : 우리 엄마랑 너네 엄마 미장원 간대. 그래서 우리 집에 모여 있으래. 치킨 시켜준다고.


진석 : 난 집에 있을 건데?


유미 : 야, 엄마가 시키면 말 좀 들어라. 으이구. 유정이(유미 동생)랑 보드게임할 거야.


진석 : 난 싫어. 집에서 게임이나 할래.


유미 : 야, 너 또 게임하냐? 니네 엄마한테 이른다!


진석 : 니가 뭔데? 야, 신경 쓰지 말고 꺼져라.


유미 : 꺼져? 꺼지라 그랬지? 선생님! 김진석이 나쁜 말 썼어요!




방과 후, 둘 다 내 앞에 불러 앉힌다.




나 : 진석이가 유미한테 그런 말을 했어?


진석 : 아휴, 오유미가 자꾸 짜증 나게 하잖아요.


유미 : 야, 그게 뭐 짜증이냐? 우리 엄마가 시키니까 그렇지.


진석 : 그러니까 넌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나 : 흐음... 이럴 땐 서로의 속마음을 알아보면 되겠네. 유미는 진석이의 속마음이 뭔 거 같니?


유미 : 게임하고 싶은 거요.


나 : 왜 게임하고 싶을까?


유미 : 우리 집에서 보드게임하기 싫어서...?


나 : 진석이는 오늘 집에서 혼자 있고 싶은 게 속마음이니?


진석 : 네.


나 : 그럼 진석이가 유미 속마음을 맞춰 봐.


진석 : 보드게임에 저를 끌어들이는 거요.


유미 : (당황하며) 웃기시네. 누가 너랑 보드게임하고 싶어 그러는 줄 아냐? 니네 엄마가 시켰다니까.


나 : 만약 진석이 엄마가 안 시키셨다면... 진석이랑 보드게임 안 하고 싶었을까?


유미 : (머뭇거리며) 그렇죠. 아니... 뭐, 해도 되고요. 세 명이 하는 게임이라 누가 있긴 있어야 되거든요.


나 : 그럼 진석이가 엄마한테 집에 혼자 있어도 되는지 여쭤보면 되겠네.


유미 : 그래라. (서운한 내색을 하며) 싫음 관둬라.




진석이는 유미의 마음을 이해 못 한다. 이 시기 남자아이들은 대체로 이렇다. 남자아이의 성숙이 늦어진 건 진화의 결과다.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은 속을 태운다. 사춘기를 지나 비로소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의 성숙을 따라잡기 전까지 아이들의 풋사랑은 여자아이에게 더 상처가 되는 것 같다. 결국 진석이를 이해시키기 보다 민지, 유미를 위로할 수밖에. 진석이를 먼저 보내고 유미와 좀 더 대화를 이어간다.




나 : 선생님이 궁금한 게 있어. 처음부터 아까처럼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했으면 되는데 왜 너희 둘은 다퉜을까?


유미 : 그러니까요. 전 진석이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 건데...


나 : 진석이 엄마가 시켜서 한 거 말고... 유미의 마음은 어땠니?


유미 : (모르는 척하며) 어떤 마음?


나 : 진석이가 너희 집에 왔으면 하는 마음 말이야. 보드게임도 준비했잖아.


유미 : (눈빛을 피하며) 아... 뭐. 근데 선생님이 어떻게 아시는데요?


나 : 선생님도 그런 적 있거든. 너 만할 때. 여자애 좋아한 적이 있단다. (웃긴 말투로) 음하하! 뭐... 결국 차였지만. 흑흑. 


유미 : 선생님도 차였어요? 헉. 쩐다.


나 : 그래도 많이는 안 차였어. 한 백 번쯤?


유미 : 헉. 백 번요? 대박.


나 : 그러엄. 수없이 차이지. 내가 상대 마음에 안 들면 차이는 거지 뭐.


유미 : 그때 어떻게 하셨는데요?


나 : 창피했어. 난 좋은데 상대가 안 받아줘서. 근데 뭐. 할 수 없지. 근데 금세 괜찮아지더라. 그럼 또 딴 사람한테 고백하면 되지.


유미 : 그래선생님은 결혼까지 성공하셨잖아요.


나 : 그러엄. 세상 모든 사람이 날 차지는 않을 거잖아. 언젠가 안 차는 사람도 만나거든. 그럼 사귀는 거지. 너도 그럴 거야. 걱정 마.




시간이 또 흘러 진석이를 바라보던 여자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사랑에 서툰 만큼 잊는 것도 빠르다. 그 사이에 이번엔 진석이가 나경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나경이가 진석이를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항상 인기의 중심에 있었던 진석이는 당황한 눈치였다.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른 나경이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 무렵, 진석 엄마와 상담을 하게 되어 두 아이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진석 엄마 : 어머! 우리 아들이 인기가 있다니 다행이네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에선 아직 아기예요.


나 :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건 아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는 겁니다. 아이들 눈이 정확하거든요. 단지 잘 생긴 것만으로 인기가 있지는 않아요. 성격도 좋고 친절하다는 의미입니다.


진석 엄마 : 제가 뭘 어떻게 도와줘야 될까요? 모른 척하는 게 더 나을까요?


나 : 금지하지 마시고 가끔 물어봐 주세요. 엄마가 진석이의 삶에 관심과 애정이 많다는 걸 보여주시면 됩니다. 앞으로 많은 연애를 하면서 친구 보는 안목이 생기겠죠.




진석이 특유의 재미있는 장난기가 통했는지 나경이도 가끔은 진석이와 얘기를 했다. 그러던 중 수학여행 철이 되었다. 두 아이는 점심시간에 같이 산책도 하고 숙제도 보여 줄 정도가 되었다. 진석이가 내게 수학여행 버스에 같은 자리에 앉아도 되냐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경이도 원하다면 가능하다고 답해줬다. 하지만 수학여행 바로 전날, 달콤하던 둘 사이에 위기가 찾아왔다. 진석이가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에 나경이가 학원차 같이 타자는 부탁을 거절했는데, 나경이가 이유를 물으니 너랑 같이 타면 친구들이 놀릴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진석이로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너무 솔직했던 게 탈이었을까. 나경이는 실망했다. 먼저 고백해 놓고 친할 만하니까 친구들 눈치 때문에 자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진석이에게 상처받은 것이다. 속이 상한 나경이가 진석이와 버스 같은 자리에 앉기 싫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난 나경이의 요청을 들어줬다. 그동안 나경이에게 정성을 다 한 진석이를 생각하면, 나경이가 기회를 한 번 더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끼어들 수 있나. 풀 죽은 진석이를 위로할밖에.




진석 : 아휴, 축구 안 할라 그랬는데 애들이 나경이랑 둘이 뭐 하려고 축구 안 하냐 그러잖아요. 그래서 나경이한테 사실대로 말한 건데...


나 : 아이고, 이를 어쩌나? 선생님이 도와주고 싶은데 난 나경이가 아니라서 못 돕겠어.


진석 : 나경이한테 사과하고 싶은데 문자를 계속 씹어요. 아무 답도 안 하고...


나 : 아무 답을 안 하는 것도 나경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겠지? 그건 나경이가 결정하는 거야. 너도 뭔가 하고 싶다면... 어른에게 조언을 받아보지?


진석 : 우리 엄마한테 말했거든요. 나경이랑 잘 해보라고 용돈도 받았는데...


나 : 엄마라면 뭐라고 조언하셨을까?


진석 : 음... 그러게 여친을 왜 사귀냐고?(웃음) 여친은 대학교 가서 사귀라고 그랬거든요.


나 : 엄마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지금 사귀지 말라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사귀라는 뜻이야.


진석 : 근데 지금 엄마도 알잖아요. 차리리 몰랐으면 나경이랑 헤어져도 엄마가 모를 거잖아요.


나 : 네가 몇 번을 헤어져도 엄마는 네 편일 거 같은데?




이 시기 아이들은 대부분, 사랑의 상처를 달래 줄 대상으로 부모를 떠올리지 않는다. 부모가 아는 순간 타박 받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 빠져드는 희열이야말로 부모에게 가장 먼저 축하받을 일일 텐데, 어쩌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를 피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아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나. 아이들이 사랑을 하면서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일 중 하나는 담임에게 들키는 일이다. 담임이 알면 나무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다른 아이가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들의 연애사를 몰랐을 것이다. 아이들의 연애는 변수가 많다. 사소한 오해로 속을 끓이다 헤어지고 울기도 하고 삼각, 사각 관계 속에서 좌절한다. 이때 겪는 아픔은 친구관계에서 생긴 아픔보다 더 아프다. 믿었던 남자친구의 배신을 당한 뒤, 차라리 상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직 어린아이에게 때론 흉기가 될 수 있다. 이럴 때 어른이 상처를 위로해 주고 자신의 경험을 슬쩍 나눠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의 세계를 잘 모르면 정작 탈이 났을 때 도울 수 없다. 어른들이 나서서 아이들의 연애를 축하하고 지지해 줘야 하는 이유다.




“나경이한테 사과하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나요.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도 모르겠고... 아, 짜증 나요!”




보통의 아이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유야무야 끌다가 다시 시시덕 거리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하는데 진석이는 어떻게든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이어 보고 싶은 모양이다.




나 : 아이고, 진석이 멋있다! 사과해서라도 다시 친해지고 싶으면 해 봐. 잘 될 수도 있으니까.


진석 : 근데... 쪽팔리기도 하고요... 선생님이 대신 말해주실래요? 제발요.


나 : 그래. 하지만 이건 너도 알아 둬야 해. 나경이가 네 마음을 안 받아줄 수도 있어. 그건 나경이 마음이야. 남자와 여자는 좀 다르거든. 원래 그렇게 태어났어. 너희들이 서로의 마음을 알려면... 몇 년 더 커야 해. 선생님이 볼 때 너희들은 아직... 어리거든. 그래서 부모님들도 걱정하시는 거야.


진석 : 차라리 나경이한테 사과하지 말까요?


나 : 아니, 사과는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나경이가 아직 네 마음을 잘 모르더라도 네가 미안해한다는 건 알리는 게 좋아. 또 나경이가 어쩌면 네 마음을 알아서 시 친해질 지도 모르잖니. 아이고, 너처럼 멋있는 남친이 있는 나경이가 선생님은 부럽다.



진석이가 수학여행길에 산 하트 모양의 핸드폰 고리. 한 쪽을 나경이에게 전해달라고 내게 맡긴 뒤 남은 쪽을 조심스레 만지고 있다. 저 때 진석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진석이의 선물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트 고리는 누구의 핸드폰에도 매달리지 못한 채 다시 상자의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진석이는 또 한 번 절망했다. 나 역시 사춘기 때 여자아이에게 호된 거절을 맞본 적이 있어, 나름 싸구려 위로를 애써 지어내 보았으나 먹히지 않았다. 수학여행길의 수국, 연꽃이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진석이에게는 별 무소용이었다. 하지만 진석이 후회만큼 한층 성장할 것이다. 진석이가 앞으로 해나갈 사랑은, 그 나이 때 짝사랑 한 번 못 해 본 나보다 나을 것이다. 부럽다, 요즘 아이들아.






학부모와 상담하다가 아이의 연애사를 말씀드리면 대부분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활짝 웃는다. 자기 아이가 연애를 한다는 게 너무 귀엽고 재미있는 것이다. '우리 애는 아직 애긴데... 사랑을 한다고요? 우리 애가요? 하하!' 그 웃음 속엔 아이가 벌써 이렇게 자랐네요, 이제 저도 아이를 내려놓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벌써 이렇게 지났나? 하는 놀라움과 기특함, 어느새 누군가를 좋아할 줄도 알만큼 성장했구나, 하는 안도가 느껴지는 표정이다.




하지만 어떤 학부모는 아이의 사랑이 우습다고 말한다. 알아서 머리도 못 감고 자기 방 정리도 못하는 게 무슨 사랑을 알겠느냐는 것이다. 애들이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렇다고, 요즘 애들이 원래 일찍부터 발랑 까졌잖아요,라고 대충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저 아이들 시절에, 저런 식으로 사랑을 배웠을 것이다.




또 어떤 학부모는 말한다. 자기는 그 나이 때 사랑은커녕 남자아이들을 피해 도망 다녔노라고. 그렇게 말초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공부에 매진해서 지금 이렇게 성공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너무 겉멋이 들어 극성이니 어쩌면 좋으냐고. 선생님이 잘 타일러 주시라고. 아이들이 이성에 눈을 뜨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화들짝 놀라서 말한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막아주셔야지요. 우리 애가 그런데 빠져서 지금 할 걸 제대로 못하면 어떡해요!"




부모가 아이의 사랑을 어떤 식으로 환대, 또는 무시하느냐에 따라 아이는 앞으로 사랑을 할 때마다 행복하거나 불안할 것이다.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정체성이 된다. 사랑은 봄 햇살을 받으면 저절로 피는 꽃처럼 자연스러운 것인데 막을 수 있을까. 풋사랑의 기회가 없는 사춘기는 얼마나 비루할까. 부모가 해보지 못했으니 아이의 사랑을 알 리 없다.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앞 산 가득한 저 단풍이 무슨 소용이랴. 공부를 위해 가두고 감시하고 묶어 기른 아이들이 나중에 성공은 할지 몰라도, 열두 살 때 짝꿍을 향해 짝사랑 한 번 못해 본 것은 못내 아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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