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악을 벌하고 내쫓으면 그 자리에 선함이 채워질 확률
장깨는 나보다 먼저 연애를 하고 있었어. 그래, 연애. 그때 우린 열일곱 살 주제에 감히 '연애'라는 말을 썼어. 그리고 상대는 '애인'이라고 불렀어. 여자 친구라는 말은 어린애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어. 장깨의 애인은 청바지 공장에 다녔어. 긴 생머리에 청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웃을 때는 늘 손으로 입을 가리던 아가씨. 처음 그녀를 만난 건 지난봄 장깨와 내가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을 때였어. 당시 포장마차는 값싼 끼니를 해결하는 곳이었어. 천 원이면 두 명이 우동과 어묵, 참새구이, 번데기, 닭발 중 몇 가지를 골라 아쉬운 끼니를 때울 수 있었지. 늘 배가 고프던 우린 그곳을 자주 갔는데 그녀와 친구들도 거기 오면서 안면을 트게 된 거야. 장깨가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어. 처음엔 그녀들이 이상한 놈 보듯 매몰차게 외면했어. 나도 장깨의 그런 행동이 창피해서 말렸지만 녀석이 내 말을 듣나? 그다음에 그녀들을 만났을 때에도 장깨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갔어. 그녀들에게 뭐라고 떠드는 것 같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뒤돌아 차기 시범을 보이는 거야. 그 바람에 그의 슬리퍼가 벗겨지면서 큰길로 휙 날아갔어. 그녀들이 깔깔 웃었지. 그날 그녀들이 우리에게 우동을 사 줬던가. 그다음 만남에서는 장깨가 소주를 샀을 거야. 장깨는 남자치고 큰 키인 데다 자전거를 타서 몸매가 호리호리했어. 특유의 패션 감각도 한몫했어. 녀석은 귀를 덮는 머리를 가운데 가르마로 빗어 넘기고 하얀 셔츠에 날렵한 바지를 입었거든. 묘하게 어울렸어. 그러면서도 신발은 늘 슬리퍼야. 앉을 때에도 평범하게 앉는 법이 없어.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척 걸친 채 거만하게 담배를 꼬나물어. 근데 그게 영화배우처럼 멋있어. 그 자세로 상대를 지그시 응시하지. 당당하면서도 반항아 기질이 느껴졌어. 모성 본능을 이끌어 내는 재주도 있는지 만나는 여자들마다 호감을 보이며 뭔가를 사주곤 했어. 그런데도 녀석은 여자에게 특별히 고마워하거나 공손하지 않아. 뭔가가 맘에 안 들면 참는 법도 없었어. 그 자리에서 바로 내 쏘지. 그런데도 여자들은 그를 좋아했어. 지금의 애인도 장깨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어. 그녀를 처음 봤을 때에는 스무 살이라고 했어. 그래서 우리가 누나라고 불렀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열여덟이라고 실토했어. 그 당시 일하는 우리 또래들은 다들 스무 살이라고 속이는 게 당연했으니 화날 일은 아니었어. 미성년자는 취업이 안 되니까. 취직하는 사람도, 고용하는 사람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우리끼리 나이로 시비가 생기면 다들 스무 살이라 우겼어. 하지만 다들 안 믿었어. 결국 상대에게 민증을 까보라고 요구하는 게 유행이었어. 미성년자는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보여 줄 민증이 없잖아. 그러면 지는 거야. 미성년자로 불법 취업한 우리와 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밑바닥에서 조차 하늘과 땅 차이였어. 형에게 맞아 멍이 든 내 얼굴을 보자 장깨 애인이 깜짝 놀라며 누가 그랬느냐고, 병원 가서 진단서 떼고 경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해줬어. 장깨가 지청구를 줬지.
“어허, 오빠들 얘기하는데 또 껴든다, 껴들어.”
그녀는 얼른 입을 막으며 미안한 눈빛을 보냈어.
“아, 별거 아니에요. 제가 까불다가 한 대 맞았죠, 뭐. 헤헤.”
“야, 두드려 패는 새끼한테 왜 붙어 있냐. 때밀이 못하면 뒤진다디? 때려치워, 병신아.”
“나도 이제는 그만두고 싶은데... 월급을 받아야 때려치우든지 하지...”
“그 월급 줄 것 같냐? 잃어버린 셈 쳐, 임마. 너 그러다 맞아 뒤진다.”
장깨가 나보다 더 심란해했어. 형에게 맞은 곳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가 퍼런 멍으로 넘어가고 있었어.
“시발. 그 새끼 확 담궈 버릴까? 구두 공장 애들 델구가서. 그 새끼 술 먹고 갈 때 뒤에서 몇 번 쑤시지, 뭐.”
그는 당장이라도 실행에 나설 것처럼 매서운 표정을 했어. 말이라도 고마워서 웃음이 났어.
“웃지 마, 병신아. 너 목욕탕 관둘 때 말해라. 그 새끼 배때기 확 쑤셔갖고 창자를 꺼내버리게. 시발놈.”
그의 위로는 항상 그런 식이야. 말 뿐이지. 근데 그 날은 위로가 됐어. 전 같으면 비현실적으로 들릴 그의 위로가 이번엔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어. 상상을 하게 되더라. 형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골목길을 허위허위 걸어간다... 그가 골목 끝 어두운 곳에 다다랐을 때, 몇 개의 검을 그림자가 재빨리 움직인다... 퍽! 윽! 짧은 비명이 흐른다... 잠시 후 검은 그림자는 증거를 안 남기고 사라진다... 다음 날 새벽, 행인에게 발견된 그가 병원으로 이송된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당분간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다... 병실에 누워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나를 학대한 것을 떠올리며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퇴원하자마자 나를 찾아와 사과하고 밀린 월급을... 월급을... 줄까? 안 줄 거야. 칼에 찔리면 그가 참회를 할까? 참회는커녕 눈에 불을 켜고 찌른 사람을 찾으러 다닐 걸. 그가 참회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찔러 죽여도 내가 원하는 효과는 없는 거야. 나만 범죄자가 될 뿐이지. 그는 계속 그런 인간일 거잖아.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인간이 있는지도 몰라. <죄와 벌>에 나오는 전당포 노파처럼. 내가 형을 죽여 없앤다고 치자. 그러면 그 자리에 선한 때밀이가 온다는 보장이 있을까. 안 그럴 수도 있어. 오히려 더 나쁜 놈이 올 수도 있지. 악을 벌하고 내쫓으면 그 자리에 선함이 채워질까. 그렇다면 그 많은 교도소들은 뭘까. 형도 노파처럼 변하지 않을 인간인지 몰라.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고. 시발. 그럼 난 어떡하나. 내 월급은 어떡해...
장깨에게 포장마차에서 한 턱 내려던 계획은 내가 월급을 못 받는 바람에 포장마차에서 경양식집으로 바뀌었어. 먼저 먹고 주급에서 제하면 되니까. 포장마차보다 돈은 더 들지만 대신 좋은 걸 사 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했어. 마침 은행에서 퇴근하던 그녀까지 네 명이 식탁에 모였어. 장깨는 인희씨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의 애인과는 초면이었지만 명랑하게 인사를 나눴어. 이 기회에 친해지면 같이 쉬는 날 어디 놀러 갈 수도 있을 것 같았어. 난 장깨에게 메뉴판을 주며 말했어.
“너 이런데 처음이지? 짜식. 마음껏 골라라. 오늘 이 형님이 다 산다!”
내가 호기롭게 나가자 장깨는 별 말은 없이 시익 웃었어. 그가 애인의 메뉴를 골라주는데 인희씨는 메뉴를 보지도 않고 말했어.
“난 함박스테이크랑 핑크레이디!”
그러자 장깨가 인희씨를 흘깃 보더니 들으라는 듯 자기 애인에게 물었어.
“야, 함박스테이크에 핑크... 거시기면 면 합이 얼마냐? 와, 인희씨 세게 나가시네. 주현이가 놀랄 만했겠다야. 뭐, 됐고. 우린 오므라이스!”
애인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지 맘대로 고르는 거 봐. 저런 놈이 어떻게 연애는 잘하지? 난 장깨와 애인에게 비싼 걸 사주고 싶었어. 인희씨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깨에게 말했어.
“함박스테이크 시키세요. 오므라이스는 수프 안 나와요. 후식도 안 주는데?”
장깨가 그녀를 향해 미간을 찡그리더니 가르치듯 조목조목 끊어 말했어.
“인희씨, 분위기 파악 좀 하시죠? 인희씨가 시킨 것만 해도 주현이는 이미 엥꼬라구요. 우리가 전부 함박스테이크에 핑크레이디 시키면 그 돈을 저 새끼가 다 어떻게 냅니까? 아, 됐고, 우린 오므라이스!”
장깨가 내 주머니 걱정을 해 주는구나. 그래도 오늘은 내가 한 턱 쏘고 싶었어. 인희씨에게도 잘 보이고 싶고. 장깨에게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
“괜찮아... 여긴 내가 일하는 곳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괜찮어? 뭐가 괜찮냐, 병신아. 목욕탕 월급도 못 받은 새끼가.”
아유, 저게 진짜. 내가 쏘겠다는데... 인희씨 앞에서 창피하게 월급 얘기는 왜 꺼내는지 모르겠네.
“야, 넌... 인희씨 앞에서... 왜 그래? 오늘 내가 쏘겠다는데... 니네 맛있게 먹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구, 임마.”
“지랄하네. 정신 차려, 병신아. 또 지난번처럼...”
지난번... 그 만 오천 원? 그 얘기하기만 해 봐라.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깨도 멈칫, 말을 멈췄어. 그러더니 금세 넉살 좋은 표정으로 바꿔 인희씨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어.
“아, 됐고! 인희씨도 오므라이스. 오케이? 주현이 저 새끼 지금 돈 없걸랑요. 때밀이 그 시발넘이 월급을 안 줘서.”
“그랬어요? 몰랐네! 아, 미안해요. 주현씨가 말을 안 해서 몰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저 새낀 여자한테 그런 말 못 해요. 그러니 인희씨가 좀 봐줘요. 킬킬.”
저걸 그냥. 인희씨 앞에서 망신 주려고 작정했나 봐. 오늘은 작정한 듯 떠드네? 그나저나 인희씨 입장 난처하겠네. 살짝 그녀 눈치를 봤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물었어.
“근데... 주현씨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요?”
“아, 저... 별 거... 아니에요... 월급 나중에 준다고 형이 그랬어요... 다음 달엔...”
내가 영 답답해 보였는지 장깨가 내 말을 끊었어.
“인희씨. 제가 짱깨 배달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꼭 외상 달라는 새끼들이 있거든요. 주인아저씨는 당장 가서 받아오래요. 제가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개기는 거죠. 줄 때까지. 시발. 존나 개기는 데 지들이 어쩔 거야? 주현이도 그걸 배워야 되는데. 저 새낀 물러 터져서 영... 아직 멀었어요. 내 말 틀렸냐, 임마?”
맞는 말이었어. 난 왜 그러나 모르겠어. 처음엔 형이 무서워서 그랬지만... 솔직히 지금은 무서워서도 아니거든. 습관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형한테 대들다가도 한 대 맞으면 바로 꼬리를 내리게 되거든.
“주현이 저거 인희씨한테도 물렁물렁하죠? 얌마, 연애는 그렇게 하는 거 아냐, 날 봐. 여자를, 임마. 탁 휘어잡고, 임마. 이렇게, 자식아.”
하면서 애인의 어깨를 꽉 잡았어. 장깨 애인은 그에게 눈을 흘겼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어. 그래, 장깨는 뭘 해도 멋있었어. 어떤 말도 장깨가 하면 그럴듯하게 들렸어. 장깨와 애인의 자연스러운 사이가 부럽기도 했어. 얼마나 더 지나야 난 인희씨와 저런 사이가 될까. 그러려면 나도 장깨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저 당당함과 유쾌함을 어떻게 따라가지? 중국집 배달을 하지만 말과 행동은 세상을 다 터득한 그를 배울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장깨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사장님이 나오셨어.
“함박스테이크 아가씨가 누군가 했더니 아주 이쁜 아가씨였네?”
“안녕하십니까? 싸장님, 그 만 오천 원을 이 녀석에게 빌려 준 사람이 접니다. 헤헤.”
결국 장깨 덕분에 인희씨도 만 오천 원에 대해 알게 되었어. 그리고... 아주 민망해했어. 그녀는 울적한 표정으로 오므라이스를 시켰어. 먹으면서도 말이 별로 없었어. 난 먼저 급히 먹고 노래를 불렀어.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어. 식사가 끝나자 사장님이 특별히 후식을 주셨어. 사장님이 오늘은 청소하지 말고 인희씨와 일찍 가라고 하셨어. 계산을 하려고 보니 그녀가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나 모르게 계산을 한 뒤였어.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장깨는 애인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먼저 떠나고 난 인희씨와 그녀 집 쪽으로 향했어. 바람이 차가웠지만 둘이 걷기에 꽤 낭만적이었어. 한 오 분쯤 말없이 걸었나? 앞서가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보며 말했어.
“주현씨, 우리 술 마실래요?”
32. 지금보다 가난해지지 않게 유지해주는 돈은 얼마여야 할까
“아, 이... 시간에요?”
“왜요? 아직 아홉 시 사십 분인데. 술 마시면 안 돼요?”
“근데 지금 시간이... 인희씨, 오늘 늦게 들어가도 돼요?”
“주현씨, 다시 물을게요. 나랑 술 마시는 거 좋아요, 싫어요?”
“저야... 뭐, 좋죠... 근데 지금 시간이...”
“너무 늦었죠?”
“네... 좀... 그런 것...”
“그렇구나. 알았어요. 그럼 잘 가요.”
그녀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였어. 또각또각. 그녀의 구두가 빠르게 움직였어. 화났나? 내가 기대한 건 이게 아닌데? 나도 서둘러 따라갔어.
“인희씨, 제가 바래다주고 갈게요. 같이 가요.”
“필요 없어요. 주현씨 빨리 들어가서 자야 내일 새벽에 일할 거잖아요. 잘 가요.”
“아, 전 괜찮아요. 시간 충분해요.”
“충분? 얼마만큼 충분해요?”
“이 밤이... 하얗게 새도록? 헤헤.”
“뭐야. 오늘 술 마실 시간도 없다면서요?”
“저요? 그건... 인희씨 피곤할까 봐... 난 그런 시간 얼마든지 있는데? 헤헤.”
아까는 이 시간에 무슨 술을 마시느냐 그러고 지금은 술 마실 시간이 많다고 하고.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뭔가 꼬이는 기분이 들면서 불길하던 찰나, 그녀가 멱살을 잡았어.
“야, 너, 죽을래?”
그녀를 만나면 언제나 공중그네를 타는 것처럼 들뜨고 좋았어. 난 그녀가 좋아 죽겠는데 막상 뭘 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머뭇거리다 망치고 그녀는 화를 내는 패턴이 반복된단 말야.
“내가 그러지 말라 그랬지. 내 말이 우스워?”
그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어. 이런, 내가 너무 나갔나? 큰 일 났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대부분 그녀가 이끄는 모양새였어. 책 빌려달라는 것도 그녀가, 편지도 그녀가. 그 뒤로 만나자는 것도, 첫 키스도, 심지어 이날 술 마시자는 것도 그녀가 먼저 말한 거야. 그러고 보니 그녀보다 내가 더 적극적으로 한 일은 없었어. 아, 딱 하나 있다. 편지 쓰기. 편지 속에서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거침없고 자유로운 인간이었어.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고 폭력에 굴복하지도 않지. 오로지 내 이성과 가슴의 명령대로 살고야 말 것 같은 사람이야.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초인처럼. 그러나 막상 그녀 앞 현실에서 내 존재감은 초인의 대척점에 찌그러져 있었어. 초인이 뭐야, 움츠리고 물러서고 겁먹는 인간 주제에. 이런 관계로 두 남녀의 애정이 얼마나 갈 수 있겠니. 근데 나로선 그녀가 너무 신경 쓰이는 거야. 그 시간에 술을 마시면 늦게 들어갈 텐데 괜찮을까? 요즘 은행일이 힘들다는데 일찍 가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매사 그녀를 핑계로 정작 우리 관계에는 찬물을 끼얹는 나를 보면서 그녀도 피로감을 느꼈던 것 같아.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은 그녀는 우리 관계도 드라마 같기를 바랐어. 그런데 내가 보이는 모습은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잖아. 그녀가 답답해하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과잉보호하게 되는 거야. 만 오천 원 외상 먹은 게 자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참 지난 오늘, 그것도 내 입이 아닌 장깨를 통해 알았잖아. 그녀와 관련된 일을 함께 고민하기보다 나 혼자 낑낑대다가 결국 죄책감만 떠안긴 셈이었어. 참다 참다 그녀가 폭발한 거지. 화가 나서 그녀가 밥값도 냈을 거야. 난 그녀에게 끌려가다시피 포장마차로 들어갔어.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주문을 했어.
“아줌마, 여기 쏘주 한 병 먼저 주시고 번데기랑 매운 닭발 주세요. 아, 잔은 하나만 주세요.”
왜 잔은 한 개만 달라고 하지? 궁금해서 물었어.
“술 마실 염치는 있어요? 민증도 없으면서. 어른 되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안 가르쳐줄까 봐.”
“엥? 그럼 인희씨 술 먹는데 난 그냥 따라온 거예요?”
“그럼 그냥 가든지. 가기만 해요. 죽여 버릴 테니까.”
“무서워라. 근데 인희씨, 번데기도 먹어요? 와, 의외네?”
“내가 지금 사회생활이 얼만데. 못 먹는 게 있는 줄 알아요?”
번데기가 나오자 그녀가 호기롭게 젓가락을 들더니, 그러나 딱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어.
“흐음... 그다지 잘 드시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헤헤”
그녀는 보란 듯이 소주를 한 잔 비우고 멋지게 캬! 하더니 번데기를 크게 한 술 떠서 입에 넣었어. 하지만 표정을 보면 알잖아. 정말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척하려고 애쓰는 건지.
“억지로 맞춰주는 역할은 제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요? 인희씨는 뭔가 서툴어요. 흐흐.”
“주현씬 안 먹어요?”
“전 번데기 못 먹어요.”
"그럼 닭발은?"
"그것도요. 저 발로 닭똥 밟고 돌아다녔다 생각하면 좀... 그리고 전 원래 매운 거 못..."
“못 먹어? 아니, 그런 중요한 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요? 아까 시킬 때 말하지. 주현씨,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인희씨가 먹고 싶어서 시키는 줄 알았...”
“너, 진짜 죽는다? 내 그러지 말라 그랬지! 내가 좋아서 시킨다고 쳐. 그래도 니가 못 먹으면 시키지 말라고 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돈 없다고 하면 내가 낼 수도 있는데. 왜 날 나쁜 사람 만들어. 엉?”
이 여자, 화 많이 났나 보네. 근데 무섭긴커녕 어쩜 그리 귀여울까. 난 앞에 앉은 그녀의 볼을 양 손으로 잡고 살짝 흔들며 말했어.
“싫어하지 않아요. 못 먹는 거지. 인희씨가 먹는 걸 보면 되죠. 그것도 난 좋은데.”
“그걸 왜 니 맘대로 결정해? 못 먹는 거 억지로 시키는데 뭐가 좋냐? 니가 싫다고 하면 다른 걸 고를 수 있잖아.”
“인희씨가 어떤 걸 골라도 그 즉시 나도 좋아하게 돼요. 이상해요. 진짜예요.”
그러면서 재빨리 닭발을 하나 집어 들고 크게 한 입 먹었어. 윽. 매웠어. 난 매운 거 못 먹는데. 입안이 마비되는 것 같았어. 그렇다고 그녀 앞에서 물을 먹자니 약 올리는 것 같은 거야. 가만있으면 더 맵고.
“미치겠네. 아, 나도 몰라. 이거라도 마셔요."
그녀가 소주를 내밀었어. 급히 마셨어. 그런데 사레들린 거야. 매운데 사레들렸으니 얼마나 맵겠어. 캑캑거리고 눈물 콧물 나고 난리지, 뭐. 그녀가 휴지를 끊어다 입과 코 주변을 닦아줬어. 그녀 손가락이 내 입술에 살짝 닿았어. 갑자기 포근해지면서 또 눈물이 나려고 했어.
“근데 왜 번데기 좋아하는 척했어요? 인희씨야 말로 그럴 필요가 있나? 우리 사이에 그런 역할은 제가 다 하잖아요.”
“주현씨는 시골에서 왔고... 포장마차도 많이 가봤다고 하니까 이런 거 좋아하는 줄 알았죠...”
“인희씨도 죽을래요? 그걸 왜 인희씨 맘대로 판단해요?”
“아니, 뭐 척 봐도 번데기 좋아하게 생겼길래... 그러고 보니 주현씨 은근 번데기 상이네. 웃긴다.”
푸하하! 그녀가 웃었어. 허리를 뒤로 꺾으며 호탕하게. 술이 들어가서 일까, 더 크게, 환하게 웃었어. 그 포장마차 안에서 우리가 가장 유쾌했어. 어느새 한 병을 거의 다 비웠어. 그녀의 발그레한 볼이 볼수록 예뻤어.
“인희씨 술 마시니까 말 되게 잘한다. 그리고 오늘 이뻐요. 아, 이런 날은 밤새 얘기하고 싶다!”
“그렇쥐! 좋아, 그런 태도 아아아주 좋아. 시간 늦었으니까 일찍 가라, 피곤하니까 일찍 가서 쉬라는 말 이제 하지 마요. 그런 말 하면 진짜 주우욱여 버릴 거야.”
“인희씨에 의해서라면 그 어떤 고문이나 죽음도 감미로울 것 같아요. 헤헤.”
“그러취, 쪼아, 쭈욱 그런 말만 해, 알았지?”
“인희씨랑 같이... 살아보고 싶어요. 일주일이라도. 아니, 단 하루라도.”
진심이었어.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한다면, 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난 그때 정말 결혼을 생각했어.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어. 졸업해야 할 학교가 없는 사람은 연애의 시한을 정할 필요가 없잖아. 그건 장깨도 마찬가지였어. 그는 이미 애인 자취방에서 같이 살고 있었어. 나도 십 년, 아니 백 년이 걸려서라도 그녀와 살 수만 있다면 기다릴 것 같았어. 그녀에게 별을 따다 줘야 한다면 난 지금부터 사다리를 만들 거야. 그녀를 위해 지금 내가 따야 할 별은 뭘까. 아무래도 돈일 것 같았어. 그녀를 더 풍족하게 만들 돈이 아니라 지금보다 가난해지지 않게 유지해주는 돈. 목욕탕에 돌아와 청소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니 자정이 넘었어. 그녀가 웃던 모습을 떠올리니 잠이 오지 않았어. 방금 헤어져 왔는데 다시 보고 싶었어. 난 다시 불을 켜고 일기장을 폈어. 만약 내가 그녀와 결혼을 한다면 어떤 집에서 살까, 그림으로 그려 보았어. 조그만 거실이 있고 방이 두 개쯤 있는 집. 야외 화장실을 써야 하는 집은 절대 안 돼. 겨울에 너무 춥거든. 부엌에는 그을음 나는 석유곤로 대신 가스레인지가 있어야 해.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 수 있게 이왕이면 칼라 TV를 놓고 그녀가 드라마를 집필할 책상도 놓을 거야. 그 위에는 매일 꽃 한 송이를 꽂아주고 싶어. 전화도 있어야 해. 일 하다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언제나 전화하게.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해. 형처럼 천만 원만 모으면 그런 집 전세를 구하고 때밀이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십 년 안에 할 수 있을까? 안 돼. 십 년이면 그녀가 서른 살인데. 그녀는 언제까지 나를 기다려줄까? 어떻게든 하루라도 먼저 때밀이 형에게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다음 날, 형이 출근했을 때 그저께 맞은 일은 다 잊었다는 듯 인사를 꾸벅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일 할 테니 용서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기술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드렸어.
“됐어, 새끼야. 뽀이 새로 구할 거니까 그동안 똑바로 해, 자식아. 통장이랑 도장도 당장 갖고 와!”
“네? 그럼 저는 언제까지...?”
“새꺄, 내가 아냐? 암튼 니 월급은 나가는 날 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새로 일할 사람은 언제쯤 옵니까?”
“곧 와, 임마. 기다리는 애들 쌨어, 새꺄.”
카운터 이모에게 들으니 내가 노래를 하러 다닐 때부터 형은 여기저기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대. 내 처지가 불쌍해서 어지간하면 데리고 일 시키려고 했는데 싸가지도 없고 게을러서 자르겠다고 했대. 막상 그 말을 듣자 겁이 났어. 여길 그만두면 경양식집 노래도 어렵거든. 집에서 다니기엔 경양식집이 너무 멀어. 버스는 있으려나. 일 끝나면 막차를 탈 수 있을까. 버스 편이 안 되면 그 먼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을까.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어. 한편 서운한 마음도 들었어. 나를 자르고 새로 사람을 뽑는다는데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었어. 나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내 편이 하나도 없지? 사장도 내가 잘리는 것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어. 내가 심부름해드린 게 얼만데. 더울 때 집수리 공사에 불려 간 것도 그렇고 명절 때 선물 심부름은 또 얼마야?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장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 같았어. 사모님이나 보일러실 기사, 카운터 이모도 마찬가지였어. 이들 모두 내가 형에게 학대당하는 걸 다 알고 있었고 불쌍하게 생각은 해줬지만, 그렇다고 내 편에 서주지는 않았어.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나를 구경하며 동정하다가 돌아서면 외면했어. 탈의실 뽀이는 맞거나 쫓겨나도 굳이 돕고 싶은 대상까지는 못 되나 봐. 젠장. 그럼 난 스토 부인의 소설 속 <엉클 톰>이었던 걸까. 어딘가에서 팔려왔다가 또 어디론가 팔려가는 노예처럼. 다들 불쌍히는 여기지만 일부러 관심을 주고 싶지는 않은 노예. 특별히 불쌍하지도 않고 연민이 일어나지도 않는 대상. 타고난 팔자가 원래 그러니까 그냥 비루하게 살다가 적당히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게 되는 존재.
서글픈 마음이었지만 통장과 도장을 돌려주고 가방을 챙겼어. 마음이 답답했어.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기술도 못 배우고 쫓겨 가면 실망하실 텐데. 당장 필요한 돈은 경양식집에서 번다해도 형 말대로 노래로 얼마나 먹고살겠어? 지금이라도 경양식집 그만두고 열심히 할 테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형에게 빌어볼까. 장깨는 펄쩍 뛰었어.
“지랄한다. 그러다 끝내 맞아 뒤지고 싶으세요?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냐. 답답한 새꺄.”
나 대신 일할 사람들이 면접을 보러 왔어. 하지만 정작 일하겠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어. 탈의실 관리하면서 목욕탕 청소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마당 쓸기, 은행 심부름, 셔츠 다림질 심부름까지는 너무 힘들다는 거야. 어떤 사람은 그걸 다 하는 대신 음료 판매 수익을 주든지 월급을 십만 원으로 올려 달라고 했어. 특히 사람들을 실망시킨 건 식사였어. 하나같이 하루 세 끼를 정말 라면만 먹느냐고 물었을 정도야. 당황한 형이 가끔 중국집에서 시켜먹기도 한다고 변명을 해보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어. 근처 식당에 대 놓고 백반을 먹게 해 달라는 거야. 형은 조건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대신 이 년 동안 일을 하면 때밀이 기술을 가르쳐 주겠는 제안도 했어. 하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어. 형은 화를 내다 못해 어이없어했어.
“하, 나, 참... 배때기가 불러 자빠졌구만. 뭐? 십만 원을 줘? 햐, 이것들이 아주 껍데기도 안 벗기고 날로 먹을라고. 새끼들. 굶어 뒤져 봐야 정신 차리지.”
덕분에 그동안 내가 일을 꽤 많이 해왔다는 걸 알게 됐어. 그렇게 대, 여섯 명 정도 오고 나서 지원자가 서서히 줄더니 더 오지 않았어. 목욕탕 업계가 뻔하거든. 이미 소문이 난 거야. 짐은 싸 놓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어. 형은 다시 통장과 도장을 맡겼어. 난 아무 일 없다는 듯 은행 심부름을 다녔고 밤엔 노래를 하러 다녔어. 그러면서 두어 달이 지났어. 첫서리가 왔다고 사람들이 호들갑을 떤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첫눈이 왔다고, 눈에 대한 노래가 라디오에서 하루 종일 나오던 날 오후였어. 나도 오늘은 눈에 관한 노래를 몇 곡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팝송 책을 보며 흥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카운터에서 날 찾았어. 전화가 왔다는 거야. 나를 찾는 전화라고는 올 데가 집 밖에 없는데? 받아보니 장깨였어. 교통사고가 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