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아이들 인식에 미치는 영향
아침 대화 시간.
아이들이 어제 본 TV 얘기를 하고 있다.
"니네 우영우 봤냐? 거기 엄청 똑똑한 사람이 우영우야. 선생님도 보셨죠?"
"아, 그런 게 있어?"
"네, 우영우라고 있어요.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근데 고래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다른 아이가 나서며) 고래? 나도 고래 좋아하는데. 책도 두 권이나 있어."
"책 두 권 있으면 뭐하냐? 그거 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 다 알아. 진짜야."
"그래도 책을 다 외우진 못할 걸?"
"(당황한 표정으로) 야, 책을 어떻게 다 외우냐?"
"거 봐. 넌 우영우 못 따라가. 우영우는 책을 다 외우거든."
"야, 뻥치지 마. 고래 책이 얼마나 두꺼운데 그걸 다 외우냐?"
"야, 진짜 다 외운다니깐?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책은 다 외울 걸."
"웃기시네. 야, 사람이 컴퓨터냐? 그걸 어떻게 다 외우냐?"
"(답답해하며) 야, 너도 우영우를 보라니깐. 진짜 다 외워! 그러니깐 서울대 1등이지."
"헐. 서울대? (나를 보며) 선생님, 서울대는 공부 잘해야 가는 데죠? 우리 엄마가 나더러 서울대 가라 그랬는데."
"그래? 넌 똑똑하니까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니깐요. 그래서 한 번 가 볼라구요. 선생님도 서울대 나왔죠?"
"아니, 난 서울대 안 나왔어."
"헐. 서울대 안 나왔어요? 공부 잘 못 했어요?"
"(민망한 표정으로) 응..."
"헐. 그런데 어떻게 선생님이 됐어요? 서울대도 안 나왔으면서."
"그러게..."
"(다른 아이가 내 손을 잡아주며) 에이, 선생님도 서울대 나오시지. 그랬으면 책도 외울 수 있잖아요."
"그러게. 선생님도 책 외우고 싶어 지네."
"(다른 아이가) 야! 너 왜 선생님한테 싸가지 없이 말하냐? 선생님 창피하게. 선생님이 공부 못해서 서울대 못 갈 수도 있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선생님,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지금부터 열심히 책 외우세요."
"응. 위로해줘서 고마워."
"우리 언니가 다니는 수학 학원 원장님이 서울대 나왔대요. 공부 엄청 잘했겠죠? 그래서 저도 서울대 가볼라고요. 선생님도 나중에 서울대 가 보세요."
"아,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근데 선생님은 책을 다 외우지는 못 하실걸요. 자폐가 아니니깐."
"자폐?"
"네. 우영우가 자폐거든요. 말도 쫌 이상하고 눈치도 없어요."
"눈치가 없어?"
"네. 우영우에 암 걸린 사람이 나온단 말이에요. 근데 그 사람 앞에서 죽는 얘기를 막 하고. 그러니 눈치가 없죠. "
"아, 그래?"
"네, 그래도 성훈이(우리 반 아이. 특수학급. 자폐성 장애) 보다는 낫죠. 성훈이는 말도 못 하잖아요."
"아, 그런가?"
"근데 이상하잖아요. 성훈이도 똑같은 자폐면서 말을 못 하다니. 성훈이도 우영우 같으면 좋을 텐데."
"아, 그러게."
"근데 성훈이는 왜 말을 못 할까요? 우영우는 말도 잘하는데."
"같은 자폐라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많은가 봐."
"성훈이도 어릴 때부터 엄마가 책을 외우라고 말해줬으면 되잖아요. 그럼 서울대도 가고 변호사 시험에서 1등 할 수도 있었겠죠."
"아, 그런가?"
"네. 우영우는 아빠가 어릴 때부터 가르쳤거든요."
"(다른 아이가 끼어들며) 야, 우영우 아빠도 서울대 나왔으니깐 그렇지. 성훈이네 아줌마는 서울대 안 나왔을 걸?"
"헐, 그럼 성훈이만 불쌍하잖아. 말도 못 배우고."
"(또 다른 아이가) 야, 서울대라서 말 잘하냐? 서울대 안 나와도 말 잘해. (나를 보며) 맞죠, 선생님? 선생님도 서울대 안 나왔지만 잘 가르치잖아요."
"내가 잘 가르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 엄마도 저랑 우리 형아 공부 잘 가르쳐요. 서울대는 안 나왔지만."
"아, 그러시구나."
"엄마가 그러는데 저는 서울대 갈 수 있대요."
"그래? 하긴, 너 똑똑하니까."
"그니깐요. 그래서 책 많이 읽을라구요. (잠시 생각하더니) 근데 성훈이는 서울대는 못 가겠죠? "
"왜?"
"엄마가 책 외우라고 안 가르치잖아요."
"도움반(특수 학급) 선생님이랑 매일 공부하던데?"
"에이, 근데 말을 못 하잖아요. 우영우는 말 잘하고 고래 책도 다 외우는데."
"그러게. 근데 같은 자폐라도 우영우 같은 사람과 성훈이는 다른가 봐."
"에이, 같은 자폐인데 뭐가 달라요? 가르치면 되죠."
"자폐라고 부르는 건 같지만 사람마다 차이가 많이 나나 봐. 그래도 선생님이 성훈이 잘 가르쳐 볼게."
"늦었죠. 2학년인데 아직 말도 못 하는 애를 뭘 가르쳐요?"
"아, 그런가?"
"성훈이네 엄마가 애기 때부터 가르쳤어야죠. 우영우네 아빠처럼."
"성훈이네 엄마도 가르치려고 애 많이 쓰셨대. 선생님한테 말해 주셨어."
"헐. 진짜요? 근데 왜 말도 못 하고 글자도 못 읽는데요?"
"똑같이 가르쳐도 너네처럼 빨리 배우는 아이가 있고 성훈이처럼 그렇지 않은 아이가 있나 봐."
"(다른 아이가 끼어들며) 맞아요. (고개를 흔들며) 성훈이는 어려울 걸요."
"어려워?"
"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성훈이네 엄마가 엄청 많이 가르쳤대요."
"아, 그래?"
"네. 수영! 성훈이가 저랑 같이 수영 다녔단 말이에요. 근데 성훈이는 수영은 안 하고 물만 손으로 막 두드렸어요."
"물을 두드려?"
"원래 맨 처음에 준비운동해야 된단 말이에요. 근데 물만 두드렸죠. 코치 샘이 하지 말라그래도 말도 안 듣고. 물에 들어가면 막 울고. 그래서 쫌 다니다 말았죠."
"물이 싫었나?"
"그니깐요. 나도 물이 싫던데. 엄청 차갑고 수영하고 나오면 엄청 춥고."
"아, 그랬구나."
"성훈이는 검도도 다니다 말았잖아요. 바닥에 드러눕고 그래서. 관장님이 일으켜도 또 눕고. 말도 안 듣고."
"아, 그랬구나."
"그래도 우영우는 돈 많이 벌겠죠? 변호사니깐요."
"그런가?"
"성훈이는 인제 클났죠. 말도 못 하고 책도 못 읽고."
"그런가?"
"책을 읽어야 외울 거 아니에요. 애휴!"
"그런가?"
"성훈이는 서울대도 못 가고 변호사도 못 될 건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겠냐구요."
이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우리 반 아이들도 자폐성 장애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의 자폐인들이 우영우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폐성 장애라도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잘 가르치면 드라마 주인공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폐성 장애인이 매우 제한적인 학습만 가능하다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
드라마 속 우영우를 보기 전까지 우리 반 아이들이 아는 자폐성 장애인은 성훈이가 유일했다.
아이들은 성훈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성훈이도 드라마 속 우영우처럼 잘 살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다.
잊을만하면 자폐성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나온다.
영화 속 그들은 하나같이 인내가 강하고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덕분에 영화는 따뜻하고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하지만 이는 아주 드문 소수에 해당하는 일일 뿐, 현실의 자폐는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폐성 장애를 자녀를 둔 부모에게 영화를 들이대며 걱정해주듯 말한다.
영화 속 아이는 피아노도 잘 치고 마라톤도 잘하던데 당신의 아이도 가르쳐보라고.
당분간은 우영우처럼 변호사를 시키라고 하겠지.
우리 반 아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게. 성훈이는 어떻게 먹고살지?"
"그니깐요. 자폐로 태어나지 말았어야죠. 애휴."
"그러게. 근데 성훈이 엄마도 성훈이가 자폐인 걸 처음에는 모르셨대."
"헐. 몰랐다고요? 어떻게 모르지? 딱 보면 아는데. 말도 못 하고 눈도 안 쳐다보잖아요."
"아기들은 다 말을 못 하잖아. 그래서 다른 아기랑 같다고 생각하셨대."
"그런 언제 알았는데요?"
"네 살이 되도록 말을 안 해서 병원에 갔다가 아셨나 봐."
"근데 왜 성훈이만 자폐냐구요. 우린 다 아닌데. 성훈이네 아줌마랑 아저씨도 자폐 아니잖아요."
"어떤 아이가 자폐로 태어나는지는 알기가 어려운가 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아기 마흔 명 중 한 명이 자폐로 태어난대."
"헐. 그럼 많은 거죠? 근데 우리 학교엔 성훈이랑 동원이 형아 밖에 없잖아요."
"맞아. 하지만 다른 학교에도 있고 또 더 이상 학교에 안 다니는 어른 중에도 있대."
"헉. 어른도 자폐가 있어요? 난 못 봤는데.(아이들을 향해) 야, 니네는 봤냐?(아이들 대부분이 못 봤다고 답한다.)"
"밖으로 다니지 않아서 보기 힘든가 봐."
"왜 밖으로 안 다니는데요? 집 안에만 있으면 답답할 텐데."
"그러게. 바람도 쐬고 산책도 하면 좋을 텐데."
"그니깐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럼 성훈이는 어른이 돼도 자폐가 안 없어져요?"
"응. 아직 치료 방법이 없나 봐."
"와, 쩐다. 그럼 성훈이 어떡해요. 성훈이네 아줌마랑 아저씨도 늙어 죽으면 누구랑 사냐구요."
"지금은 부모님이 돌보시지만... 나중엔 나라에서 운영하는 돌봄 시설에 가야 할 거야."
"그런데 가려면 돈 내야 되죠? 근데 성훈이는 돈도 못 벌잖아요."
"다행히 나라에서 돈을 주나 봐."
"휴, 다행이네요. 근데 성훈이는 말을 못 하는데 어떡해요? 거기서 누가 놀릴 수도 있잖아요."
"그러게. 그래서 지금 우리랑 있을 때 더 많이 행복하게 해 줘야지."
"그니깐요. (다른 아이들을 향해) 야, 우리가 성훈이한테 말을 가르쳐 주자. 그럼 되잖아."
"야, 성훈이가 우릴 쳐다보지도 않는데 어떻게 가르치냐? 우린 못 가르쳐. 도움반 선생님이라면 몰라도."
"아냐, 너희들이 가르칠 수 있어. 벌써 몇 개는 가르쳤잖아."
"우리 가요?"
"응. '성훈이 화장실 가자' 그러면 성훈이가 화장실 가고 '성훈이 그네 타러 가자' 그러면 따라가잖아. 그거 너네가 가르친 줄 알았는데?"
"아, 맞아요. 지난번에 도움반 선생님이 성훈이한테 '성훈이 인사해야지' 그러니까 인사하는 거 봤어요."
"너네는 성훈이한테 많은 걸 가르쳐주고 있어. 그래서 성훈이 엄마가 고맙다고 하셨어."
"성훈이도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엄마 아빠 없으면 돈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다른 아이가) 야, 일을 못 하는 데 어떻게 돈을 버냐?"
"야, 일을 하면 되지."
"(옆 아이가) 야, 말을 못 하는데 어떻게 일을 하냐? 말을 알아들어야 사장님이 시키는 걸 하지. 으이구!"
"그럼 말 안 하는 일을 시키는 회사에 취직하면 되잖아."
"야, 그런 회사가 어딨냐? 들어가도 바로 짤리지."
"(내가 나서며) 그런 회사가 있다는데?"
"진짜요?"
아이들에게 자폐성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 속 자폐성 장애인들이 커피를 내리거나 빵을 만든다. 동영상을 보는 중간중간 아이들이 조금 안심되는 표정으로 도움반에 공부하러 간 성훈이의 빈 책상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