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포켓몬 카드를 놓고 택배 노동자의 노동 환경을 생각해 본 이야기
쉬는 시간.
한 아이가 가방에서 포켓몬 카드를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는다.
그러자 주변 아이들이 모여든다.
"와, 포켓몬 카드다! 어디서 샀냐?"
"우리 엄마가 택배로 시켜줬어. 근데 어제 택배가 엄청 늦게 왔다니깐. 기다리다 디지는 줄 알았네."
"헐. 왜?"
"택배 아저씨가 내일 온다 그러잖아. 그래서 우리 엄마가 전화해서 뭐라 그랬거든. 그랬더니 왔어. 밤에."
"엄마가 뭐라 그랬는데?"
"따졌지. 우리 애가 얼마나 기다리는지 아시나요, 이러면서."
"헐. 그러다 택배 아저씨가 배달 안 해주면 어떡할라구."
"야, 원래 택배 아저씨가 잘못한 거야. 어제 온다고 문자가 왔으면 어제 와야 되는데 안 왔으니깐. (나를 보며) 선생님도 조심하세요. 택배 아저씨가 문자만 보내고 택배 안 갖다 줄 수도 있으니깐요."
"아,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문자 오나 안 오나 잘 볼게."
"근데 만약에 택배가 안 오잖아요? 그럼 택배 회사에 전화하면 돼요. 우리 엄마도 그랬어요."
"아, 그렇구나. 그것도 기억할게. 알려줘서 고마워."
"근데 쪼끔 화를 내야 될 수도 있어요."
"아, 그래?"
"네, 어제 우리 엄마가 택배 회사에다 전화했단 말이에요 근데 어제 비가 많이 와서 택배 아저씨가 배달을 못했다 그러잖아요. 그랬더니 우리 엄마가 화내면서 뭐라 뭐라 했죠. 그랬더니 갖다 줬잖아요, 글쎄. 밤에."
"아, 어제 비 왔지?"
"네. 엄청 왔잖아요."
"아이고, 그럼 택배 비 맞았나?"
"아뇨. 멀쩡하던데요?"
"다행이네. 그럼 택배 아저씨는 비 맞으셨을까?"
"(불쌍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비 맞았겠죠. 엄청 많이 왔으니깐요. (다시 표정을 바꾸며) 근데 할 수 없죠. 안 그러면 제 포켓몬 카드 못 받잖아요."
"아, 그렇지. 근데 택배 아저씨도 힘드셨겠네."
"그니깐요. (내 눈치를 보며) 근데 문자를 보냈잖아요. 그럼 택배가 딱! 와야죠. 그랬으면 우리 엄마도 전화 안 했잖아요."
"그 문자 누가 보냈을까?"
"택배 아저씨가 보냈겠죠. 택배에 우리 엄마 전화번호 찍혀 있으니깐요."
"아, 그랬겠구나. 너네 엄마는 네가 포켓몬 카드를 빨리 받길 바라셔서 전화하셨나 보다."
"(옆 아이가 끼어들며) 야, 넌 택배 아저씨 생각은 안 하냐? 일부러 안 온 게 아니고 비가 와서 못 온 거잖아. 인정머리 없게."
"야, 그럼 문자를 보내지 말았어야지. 괜히 기다리게 해놓구선. 책임져야지."
"야, 택배 아저씨가 비올 줄 알았겠냐? 문자 보낼 땐 비가 안 왔을 수도 있잖어. 그냥 내일 갖다 달라 그러지, 으이구."
"(내가 끼어들어 말리며) 그러게. 듣고 보니 너네 둘 다 맞네."
"(화를 내며) 아니죠! 저는 문자가 와서 기다렸다니깐요. 그리고 약속은 지켜야 되잖아요.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죠."
"(옆 아이가) 야, 비 오는 게 택배 아저씨 잘못이냐? 비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것일 뿐이야. 맞죠, 선생님?"
"(책상을 탕 치며) 야, 그럼 나만 손해잖아. 너는 택배 기다린 적도 없으면서."
"(같이 화내며) 으이구, 택배 아저씨가 힘들었을까 봐 그러지. 넌 너만 생각하냐?"
"(내가 말리며) 그러게. 문자가 왔으니 넌 택배를 기다렸을 거야. 근데 비가 와서 택배 아저씨도 힘드셨겠다."
"그래도 괜찮죠. 돈을 벌잖아요."
아이는 평소 '약속'과 '책임'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본인 스스로도 책임에 대해 민감한지 어지간하면 책임 질을 만들지 않는다.
친구와 약속을 하면 지키려 애쓰고 숙제도 꼬박꼬박 해온다. 행실이 반듯한 아이다.
다만 유일한 흠이 있다면 책임을 강조하는 태도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림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시비가 생겨서 들여다보면 책임을 강조해서 생기는 갈등이 대부분이다.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긴 상대를 그냥 봐 넘기지 못하고 사사건건 지적해서 상대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든 약속이나 규칙을 강조하는 역할은 꼭 필요하지만, 문제는 정도가 심할 때 생긴다.
아아들이 무슨 놀이든 하려면 재미가 있어야 하고 약간의 긴장감도 필요하다.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놀이 규칙은 깨지기 쉽도록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규칙을 지켜가면서 승부가 결정되어야 재미와 몰입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놀이보다 규칙을 지키는 것에 신경을 더 쓰는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되나.
그 아이 때문에 놀이가 자주 멈추게 되고 규칙을 따지느라 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 피로감이 쌓이면 아이들은 규칙을 따지는 아이와 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아이는 억울해하며 내게 온다.
자기는 규칙대로 했을 뿐인데, 친구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를 따돌린다는 것이다.
아이 말을 들어보면 구구절절 맞다.
자기는 놀이의 재미를 포기하면서까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데 친구들은 자기한테만 뭐라고 한다는 것이다.
네가 규칙을 지키려 애쓰는 건 훌륭한 태도지만 그렇다고 규칙에 매몰되면 놀이의 재미가 떨어진단다.
그러니 규칙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친구들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놀이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해주면 되겠지만, 상대가 아이라면.
"아, 맞아. 택배 아저씨가 돈을 버셨지. 그럼 어제는 얼마나 버셨을까?"
"많이 벌었겠죠. 비 오는 데 배달했으니깐요."
"얼마일 것 같은데?"
"저야 모르죠. 우리 아빠가 택배 하는 것도 아니구."
"그렇겠네. 근데 만약에 너희 아빠가 비 오는 날 밤에 포켓몬 카드를 배달하신다면... 얼마 정도 받으면 좋겠어?"
"5000원은 받을걸요. 우리 엄마가 외갓집에 택배 보낼 때 5000원 내던데."
"선생님이 검색해 봐야겠다. (검색하는 화면을 보내준 뒤) 여기 보니까 택배 한 개에 700원 받는 분도 있고 1000원 받는 분도 계신가 봐."
"헐. 진짜요? 700원 밖에 안 준다고요? 우리 엄마는 5000원 냈어요. 제가 봤어요."
"그 돈을 택배 접수하거나 분류하는 분들과 나누어야 하나 봐. 네 포켓몬 카드는 얼마니?"
"5만 원요."
"아, 오만 원이면... 택배 아저씨가 1000원을 받는다고 가정할 때... 50군데를 배달하셔야 버는 돈이네."
"(놀라며) 헐! 50군데씩이나요? 엄청 바쁘겠네..."
"거기에서 택배 차에 기름 넣을 돈은 빼야 되겠지?"
"헐. 그럼 50군데보다 더 많이 배달해야 되겠네요. 한... 60군데?"
"거기에서 아저씨 점심 사 드시는 돈도 빼야 하고."
"허걱! 그럼 돈이 더 적어지잖아요!"
"그러게. 택배 아저씨 하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겠다. 어제처럼 비 오거나 깜깜한 밤에도 배달하시려면."
"(옆 아이가) 그니깐요. (카드 주인을 보며) 야, 니네 엄마더러 담엔 비 오는 날은 전화하지 말라 그래. 택배 아저씨 힘드니깐."
"야, 문자가 왔는데 택배가 안 오니깐 그렇지! 그럼 문자를 보내지 말든지!"
"야, 비가 오고 깜깜한데 어떻게 가냐? 그러다 차 빠지면 어떡할라구."
"싫음 택배 그만두면 되지. 누가 하라 그랬냐?"
"(내가 끼어들며) 택배 아저씨들이 힘들어서 모두 그만두시면 어떻게 될까?"
"누가 하겠죠."
"누가 할 것 같아?"
"돈 벌고 싶은 사람들. 많죠."
"(택배 노동자 시위에 관한 인터넷 기사를 보여주며) 이거 보니까 택배가 힘들어서 못 하시겠다는 아저씨들이 많은가 본데?"
"그럼 우리 아빠가 할 수도 있어요."
"아빠가?"
"네, 아빠가 말하는 거 들었어요. 코로나 땜에 손님도 없는데 가게 접고 택배나 뛸까 그랬으니깐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너네 아빠가 택배를 하시면 얼마를 받으면 좋겠어?"
"700원 보다 1000원 받으면 좋겠어요."
"맞아. 그러시면 좋겠다. 만약에 비 오는 날엔 어떻게 하시면 좋을까?"
"비 올 때는 배달 조금만 하고 깜깜하기 전에 집에 가야죠. 우산 쓰고 택배 배달하면 힘드니깐요."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 비올 때는 힘드니까. 근데 만약에 아빠가 문자를 먼저 보냈으면 어떡하지? 그랬는데 나중에 비가 올 수도 있잖아."
"(잠시 생각하더니) 그니깐요..."
"아빠가 고민되시겠다. 비가 와서 일찍 집에 가고 싶은데, 그러면 문자 받은 사람한테 전화가 올 수도 있잖아."
"그니깐요..."
"만약에 비 와서 일찍 집에 가서 쉬는데 전화가 와서 또 배달 나가야 하면 아빠 마음은 어떠실까?"
"짜증 나죠. 돈을 많이 받으면 몰라도. 1000원밖에 못 받잖아요."
"돈을 얼마 정도 받으면 짜증 안 나실 것 같니?"
"한... 5천 원?"
"아, 그러면 좋겠네. 근데 5천 원이면 천 원의 다섯 배니까... 택배 요금도 오천 원에서 2만 오천 원으로 올려야겠는데?"
"(다른 아이가 끼어들며) 헐. 완전 비싸네. 2만 오천 원이면 사람들이 택배를 아예 안 보내죠."
"아, 그런가?"
"얘 포켓몬 카드가 5만 원이잖아요. 택배비까지 더하면 7만 5천 원을 내야 된다고요. (카드 주인을 보며) 야, 니네 엄마가 사 주겠냐?"
"아니, 안 사줄걸. 5만 원짜리도 엄청 쫄라서 내 생일 선물로 사 준 거야."
"아이고, 그러면 어떡하지?"
"차라리 비 오는 날에는 문자를 보냈어도 택배를 안 보내면 되죠."
"아, 그런가? 근데 문자를 받은 사람은 택배를 기다릴 텐데? 너무 받고 싶어서 전화를 할 수도 있잖아."
"문자를 다시 보내면 되죠."
"문자를 뭐라고 보내면 좋을까?
여기까지 대화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만약 내가 택배회사에서 문자 보내는 일을 한다면 뭐라고 보낼지 내용을 써 보자고 했다.
<죄송합니다. 택배 기사님이 힘들어서 오늘 못 갈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포켓몬 카드를 택배로 받은 당사자 아이가 쓴 문자.
내게 문자를 읽어주면서 마치 절을 하듯 두 손을 모으고 꾸벅 인사를 했다.
가지런히 모은 손에서 아이의 고운 마음이 느껴진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약속과 책임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 책임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면 좋겠다.
대화 내내 택배 기사님 편에 섰던 아이가 쓴 글.
보내는 문자 외에 답장까지 적혀있길래 물어보니 실제로 택배 기사님께 이런 문자를 받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아이 엄마 또한 알았다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한 아이는 택배 기사님과 고객의 문자를 가상으로 썼다.
비가 와서 택배를 미처 배송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마음과 상황을 이해하고 택배 기사님을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