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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Sep 06. 2022

이빠이와 만땅

민족주의가 아이들에게 이어지는 과정


우유 마시는 시간. 마침 시리얼이 있어서 우유와 함께 먹으라고 한 국자씩 담아주는데 한 아이가 와서 아양 떨며 말한다.

"와! 엄청 맛있겠네. 그쵸? 나 이거 좋아하는데."

"좋아해? 그럼 한 국자 더 줄까?"

"네, 많이 주세요. 이빠이."

그러자 옆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이빠이? 그게 뭔데?"

"왜, 이빠이가 뭐?"

"그게 무슨 말이냐구."

"야, 이빠이도 모르냐? 만땅이잖아."

"만땅? 헐. 그건 또 뭐래."

"가득 달라는 말이지 뭐냐. 선생님, 맞죠?"

"응. 맞아. 근데 친구들은 이런 말을 안 들어봐서 잘 모르나 봐"

"그니깐요. 어떻게 이빠이를 모르냐구요. 유치원도 아니면서. 1학년이 됐으면 이 정도는 알아야죠. 어이구, 참 나원(할머니 말투)."

"아, 그런가?"

"그렇죠. (아이들을 향해) 야, 그니깐 니들도 책을 읽으라니깐."

그러자 아까부터 그 아이를 관심 있게 보던 아이가 타박하듯 말한다.

"야, 책 읽어도 '이빠이' 안 나올 걸. '이빠이'는 일본말이거든. (나를 보며) 선생님, 맞죠?"

"응. 그런가 봐."

"(아이를 향해) 거봐. 넌 한국 사람이 왜 일본말을 배우냐? 일본 사람 될라고 그러냐?"

"야, 나 일본말 안 배우거든! 그냥 아는 거야."

"헐. 뻥치시네. 안 배웠는데 어떻게 일본말을 아냐?"

"이빠이 일본 말 아니거든. 진짜야. 우리 할머니도 아는 말이라니깐."

"헐. 니네 할머니가 어떻게 알아? 일본말 배웠냐?"

"아니."

"근데 일본말을 안다구? (나를 보며) 선생님, 얘네 할머니 일본말 안대요!"

"그러게... 근데 어른들 중에는 일본말 아시는 분들이 꽤 있나 봐."

"배우지도 않았는데도요?"

"배우시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와서 다스릴 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억지로 일본말을 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배우셨나 봐."

"아, 저도 알아요. 일본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와서 쌀도 뺏어가고. 그래서 유관순 언니도 죽었잖아요. 만세 부르다가. 아우내 장터에서. 일본 놈 땜에. 맞죠?"

"야, 안중근 의사도 있어.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뺏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안중근 의사가 어디 지하철 역인가에서 총으로 쏴 죽였잖아요."

"야, 옛날에 지하철이 어딨냐? 기차역이지. 하얼빈 기차역."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가 손으로 다른 아이를 쏘는 흉내를 내며 얍, 죽어라. 빵빵! 외친다. 그러자 그 아이는 교실 바닥으로 쓰러지며 죽는 흉내를 낸다. 또 어떤 아이는 의자 위로 올라가 손을 위로 번쩍 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 한다. 그 와중에 책상이 흔들려 시리얼 탄 우유 그릇 한 개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군다. 쏟아진 우유가 퍼져 나가자 주변 아이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의자 위로 올라가 소리 지른다. 선생님, 우유 쏟아졌어요! 순식간에 교실이 소란해진다. 나는 우유를 다 마신 사람은 운동장에 나가서 놀라고 말하고 교실 바닥을 닦은 다음 걸레를 빨아 널고 아이들이 먹은 일회용 수저와 플라스틱 그릇들을 챙겨 운동장 수돗가에 가져가 설거지를 한다. 그러자 아까 '이빠이'라고 말한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건다.

"선생님, 저는 이빠이가 일본말인 지 몰랐어요. 진짜예요. 근데 애들이 저보고 일본 사람이 되라고 그러잖아요. 전 싫은데."

"아이고, 일부러 알고 한 말도 아니고 모르고 했는데 친구들이 그런 말을 했어?"

"네. 저는 진짜 몰랐다구요. (울기 시작한다.)"

"아이고, 친구들이 너무했네. (임금님 말투를 흉내 내며) 고얀 지고! 내 이놈들을 당장...!"

나는 팔짱을 낀 채 일부러 화난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놀림받아 울고 있는 아이와 내 표정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무겁다. 나는 매우 흥분한 척 말을 더듬으며 큰 목소리로 말한다.

"(임금님 말투로) 네, 이, 이, 이 놈드을~~! 너, 너,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빠이... (까먹은 척하며) 음... 그러니까... 이빠이는 이빠이인데... (아이를 보며) 쟤네가 너한테 뭐라 그랬더라?"

"일본 사람이나 하라고요."

"아, 맞아. 너네는 왜 그런..."

그러자 불려 온 아이 중 하나가 억울하다는 듯 불쑥 말한다.

"아, 그게 아니라요. 일본말 자꾸 해서 일본 사람 될 거냐고 그런 거예요. 지가 일본 말 안 하면 되는 거라구요."

"야, 내가 일본말인지 알고 그랬냐? 난 진짜 몰랐다니깐!"

"(우는 아이 눈물을 닦아주며) 맞아. 일본말인 줄 몰랐을 거야. 사실 선생님도 예전엔 몰랐어."

"헐. 선생님인데도 몰랐어요?"

"응. 선생님 엄마 아빠가 쓰니까 당연히 우리말인 줄 알았어. 부끄럽지만... 지금도 가끔 모르고 쓸 때가 있어."

"헉! 뭐라고 썼는데요?"

"오뎅. 그거 일본말이거든. 어묵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까먹고 오뎅이라고 말할 때가 있어."

"헐. 나도 오뎅인 줄 알았는데."

"우동도 일본말이야. 가락국수라고 해야 하는데."

"헐. 우동도 일본말이라니!"

"오뎅이랑 이빠이는 다 일본말이야. 그것 말고도 많아. 빤쓰도 일본 말일 걸?"

"헐. 우리 엄마도 빤쓰라 그러는 데. 가끔 팬티라고도 하지만."

"응.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일본말이 꽤 있지만 우리말인 줄 알고 쓰기도 하나 봐. 이빠이처럼."

"그니깐요. 근데 일본 놈들은 지네 말을 지네 나라 사람이나 쓰지 왜 우리나라 사람한테까지 쓰라그랬냐구요."

"(다른 아이가) 일본 놈들이 나쁜 놈들이니깐 그렇지. 위안부 할머니들도 끌고 갔잖아."

"야, 위안부 할머니가 뭐냐? 원래는 언니들이었는데 지금은 늙어서 할머니가 된 거지. 으이구."

"아냐, 위안부 할머니야. TV에 나왔어."

"야, 아니라니깐. 어렸을 때 끌려갔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었으니깐 할머니가 된 거야. 엄마랑 영화에서 봤어."






"일본 진짜 나빠. 독도도 지네꺼라구 우기잖아. 거기 있는 강치도 다 잡아가고. 어휴, 나쁜 놈들."

"야, 니네 걱정 마. 일본 이제 망한대. 곧 지진이 나서 폭삭 가라앉는대. 맞죠, 선생님?"

"아, 그래?"

"네. 영화에서 봤는데 엄청 큰 쓰나미도 오더라고요. 사람들이 막 죽어요."






"아이고, 그럼 일본 사람들은 어떡하지?"

"(죽는 표정을 하며) 전부 다 깨꾸닥이죠. 바다에 가라앉는데 어떻게 살아요?"

"아이고, 큰 일이네..."

"에이, 뭐가 큰 일이에요? 잘 된 거죠. 그러게 왜 나쁜 짓을 많이 하냐구요."

"그러게. 옛날에 일본이 우리나라한테 나쁘게 안 했으면 앞으로 지진 날 때 우리가 일본을 도울 텐데."

"그니깐요. 그럼 우리 할머니도 이빠이라고 말 안 배워도 됐겠죠."

"맞아요. 일본은 할 말 없어요. 지네가 잘못한 거니깐. 다 죽어도 돼요."

"근데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우리 조상님을 괴롭힌 사람들은 지금 일본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의 조상이거든. 자기 조상이 옛날에 잘못한 일 때문에 지진이 나서 죽는다면 억울하지 않을까?"

"할 수 없죠. 그러게 왜 조상이 잘못하래요?"

"(옆 아이가)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자기는 잘못이 없잖아. 조상이 잘못한 거지."

"그니깐 왜 일본에서 태어나냐구. 차라리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든지."

"야, 일본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냐? 태어나보니 일본인데 어떡해? 그런 건 바꿀 수가 없어."

"(다른 아이가) 그럼 일본을 도와주기는 도와주는데, 대신 자기네 조상들처럼 나쁜 짓 하지 말라고 그럼 되잖아.."

"야, 걔네가 말을 듣겠냐? 유관순 언니도 죽였는데."

"그니깐 진짜로 절대 안 그런다고 약속하라 그래야지. 만약에 또 그러면 그땐 지진 나도 안 도와줄 거라 그러면 되잖아. 지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 안 듣겠냐?"






나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어휘를 검색해 인쇄한 다음 칠판에 붙인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와서 읽는다.

"헐. 닭도리탕이 일본 말이라고요? 아닐 걸요?"

"아, 아닌...가?"

"네, 아니에요. 제가 알아요."

"(다른 아이가) 야, 일본 말이라잖아. 좀 믿어라."

"야, 아니거든! 우리 엄마 식당에 엄청 크게 붙어 있거든. 일본 말이면 붙여놨겠냐? (단호한 표정으로 날 보며) 닭도리탕은 일본 말 아니에요. 다시 검색해 보세요."

"아, 그럴까?"

"(검색 결과를 보여주며) 아이고, 일본 말 맞는 거 같은데? 닭볶음탕이라고 해야 하나 봐."

"진짜죠? (연필을 꺼내며) 그럼 이거 써다가 우리 엄마한테 보여줘야겠어요."

"엄마께 보여드리면 어떻게 되는데?"

"당장 메뉴판 바꿔야죠. 일본 말이라면서요."

"그러면 큰돈이 들 텐데... 다음에 바꿀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바꿔야죠. (화난 표정으로) 에잇, 일본 놈 때문에 이게 뭐야!"

방과 후, 나는 아이 부모님께 전화해서 아이가 식당 메뉴판에 대해 이야기할 것 같다고 말씀드린다. 학부모님은 웃으며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부모로서 기쁘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아이가 외래어 대신 우리말을 쓰는 것은 교육적으로 좋은 일이지만, 이번 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아이의 정서에는 안 좋을 수도 있으니 이성적인 대화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린다. 다음 날, 아이는 학교에 오자마자 자기네 식당 메뉴판을 다시 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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