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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ul 02. 2015

1학년 아이가 공부를 받아들이는 법

공부로 먹고 살 아이는 어릴 때부터 다르다.

쉬는 시간.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는데 한 아이는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늘 쉬는 시간이면 축구를 하던 아이가 요 며칠은 저렇게 내내 자리에 앉아 있군요.

가까이 가 보니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아하, 집에서 전자사전을 가져 왔군요.

1학년이 보기에 쉽지 않은 내용인데도 얼마나 뚫어져라 이것 저것 보는지 모릅니다.


아이에게 뭐냐고 물으니, 대답 대신 백과사전 기능을 열어 보이는군요.

그러고는 이것 저것 눌러서 나오는 글마다 저에게 더듬더듬 읽어 줍니다.

공룡도 읽고 개구리도 읽고 심지어 버섯까지 읽다가 모르는 내용은 저에게 묻습니다.

모르는 말이 많아 자꾸 묻는 게 미안한지 물어 볼 때마다 미안한 지 녀석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는군요.

저 아이는 왜 학교에 와서 다른 아이들처럼 놀지 않고 전자사전을 열심히 보는 걸까요.

보통의 아이라면 노는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저렇게 공부를 할 리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저 아이가 그럴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습니다. 

4학년과 5학년에 있는 언니들 때문입니다. 저 전자사전은 언니들 것이거든요.

언니들 공부하라고 부모님께서 사 주신 겁니다. 언니들이 공부를 잘 하거든요.

그렇다 보니 집에서는 언니들이 저걸  독차지합니다.

아이도 저걸 보고 싶은데, 자기 차례가 오질 않으니 답답하지요.

그래서 언니들이 잠시 안 볼 때, 얼른 가져다 보는데 이게 또 만만치 않습니다.

언니들이 여간 해선 안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알 지도 못 하면서 뭘 보냐고 퉁박 듣기 일쑤지요.

더구나 엄마는 언니들 꺼 자꾸 만지면 망가진다고 못 만지게 하십니다.


아이가 울면서 자기도 사 달라고 졸라봤지만 통하지 않았대요.

넌 1학년이니 나중에 공부하고 지금은 놀라고 하셨다나요.

하지만 아이는 저게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언니들이 학교 간 다음에 살짝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겁니다.

그리고 학교 끝나면 집에 먼저 가서 언니들 책상에 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그것도 쉬는 시간에 밖에 볼 시간이 없는 거지요.

학교에서도 공부시간엔 꺼낼 수가 없으니 쉬는 시간만 기다리는 겁니다.

화장실 갈 때도 가지고 가고, 친구들이 놀자고 억지로 끌려나갈 때에도 들고 갑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네 탈 동안 옆에 앉아서 들여다 봅니다.

이쯤 되면, 저 아이가 왜 벌써 한글을 다 뗀 것도 모자라 전래동화, 외국동화 모르는 게 없고

과학, 사회 쪽 지식도 어지간한 언니들보다 뛰어난 지 이해가 됩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스스로 하게 만들 수 있느냐고, 많은 부모님들이 물어오실 때마다,

전 전 저런 아이의 예를 말해 드리곤 합니다. 저런 아이는 해마다 학급에 몇 명은 꼭 있거든요.


저런 아이들은 우선, 내면에 있는 지적 호기심의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알고 싶은 게 많으니 수업태도가 좋습니다. 그리고 질문도 꼼꼼하게 하지요.

선생님에게 배운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 끝없이 책을 붙잡고 삽니다.

TV도 이왕이면 교육방송이 더 보고 싶고 엄마가 도서관에 데리고 가는 날을 기다립니다.


알고 싶은 마음이 크니 공부가 즐겁고 아는 게 많아지니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깨가 으쓱해지지요.

넌 어쩜 그렇게 아는 게 많느냐고,

공부 잘하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친구들에게 받다 보면

또래집단으로부터  인정받을 때의 짜릿함을 알게 됩니다. 중독성이지요.

계속 인정받고 싶어서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삶의 질로 볼 때, 저렇게 공부에 매달리는 아이가 꼭 그만큼 행복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공부에 의해 학교나 직장의 선택권이 좌우되다 보니 공부는 큰  변수입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는 지적 호기심이 많고 배우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아이의 지적 호기심, 학습에 대한 욕구는 양육환경과 밀접환 관련이 있습니다.

키우기에 따라 저런 아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럼 어떻게 기르면 저런 아이가 될까요.

많은 이론과 주장이 팽배합니다. 모두 옳은 말들일 겁니다.

하지만 우선 저런 아이가 안 되는 경우, 즉 그 반대의 경우를 보면 좀 더 쉽습니다.

책가방이나 입을 옷을 챙겨주거나 밥을 떠 먹이고 생선 가시를 발라 줘 가며 기르는 아이는 어떨까요.

저렇게 클 가능성과 점점 멀어지겠지요. 아이 입장에서는 굳이 공부해야 할 절박함이 없으니까요.

어제도 엄마가 나를 챙겨줬고, 내일도 챙겨 줄 텐데, 굳이 먼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할까요.

다만 공부를 좀 하면 엄마가 기분 좋아하니까 적당히는 합니다.

머리도 좋고 호기심도 많은 아이들이 적당히 중간 학력, 또는 중상위 학력을 유지하는 선에서 주저앉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온몸을 던지게 하는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 아이의 경우는 다르지요.

당장 언니들의 전자사전을 자기가 가질 시간이 부족합니다. 더구나 엄마까지 언니들 편을 들지요.

그러니 아이는 절박한 겁니다. 그래서 놀이시간도 포기하고 저렇게 짧은 시간이나마 공부를 하는 거지요.

공부라는 생각도 못합니다. 그냥 언니들이 보는 걸 자기도 알고 싶은 겁니다.

언니들이 엄마와 얘기하는 걸 자기도 알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언니들이 뉴스를 볼 때 자기도 기어이 뉴스를 보고야 맙니다.

그러다 보니 싱크홀도 알고 IS라는 단체도 알고, 심지어는 풍뎅이 애벌레의 1령, 2 령도 줄줄 아는군요.

어쩌면 저 아이의 언니들과 엄마는 저 아이를 교묘하게 공부로 이끄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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