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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ul 09. 2015

아이들, 선하다

나는 1학년 담임

우리 반 아이 7명 중 받침이 있는 글씨를 제대로 읽고 쓰는 아이는 아직 없다.

2명은 겹받침이나 모음조화, 자음접변이 있는 낱말을 빼고는 잘 읽는  편이고

또 2명은 읽기는 어느 정도 되나 쓰기는 기본적인 자음, 모음 외에는 쓰기가 어렵다.

나머지 아이는 아직 자음, 모음의 조화로 글자가 이뤄진다는 건 잘 모르지만 경험으로 짐작해서 읽고 쓰는 수준이다.


그렇다 보니 그림일기를 쓸 때 글씨가 틀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이 글씨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전까지 자기가 읽고 쓰던 글씨의 수준에 비해 초등학교 들어와서 매일 받아쓰기를 하기 때문에

자기가 한글을 엄청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난 이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의 이런 자신감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우리 반, 1학년 아이들.

글씨를 익히기 시작하면서 자기들이 글씨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가 보다.

그래서 툭하면 받아쓰기를 하자고 조른다.

난 아이들의 요구에 밀려 억지로 하는 척 하며 받아쓰기를 불러 주는데,

내가 불러 줄 문제를 칠판 이 구석 저 구석 여기 저기에 미리 써 놓는다.

아직 글씨를 모르는 아이가 보고 쓰게 하려는 의도다.


칠판을 보고 쓰기 때문에 대부분 제대로 쓰지만  그중엔 칠판을 보고 써도 틀리는 아이도 있다.

난 아이들이 맞게 썼든 틀리게 썼든 다 쓴 아이에겐 모두 별을 그려준다.

그렇다고 일부러 대충 받아쓰기를 하는 아이들은 없다. 아이들, 마음이 선하다. 

하지만 어쩌다 가끔 이르는 아이도 있다. 선생님 애들이 칠판을 보고 써요.


또 왜 백점을 안 주고 별을 그려주냐고, 별 대신 백점이라고 써 달라는 아이도 있다.

백점 보다 더 잘 했을 때 별을 그려준다고 말했더니 그래도 자기는 별 말고 백점이라고 써 달라고 한다.

자기는 힘들게 입학 전에 글씨를 연습하고 와서 칠판을 안 보고도 쓸 수 있는데,

다른 아이들은 글씨도 잘 모르면서 칠판을 보고 써도 별을 받으니 그런 게 어딨냐며 따진다.

그 아이에게는 받아쓰기가 친구들을 이기고 선생님의 칭찬을  독차지하기 위한 수단인가 보다.


그 아이는 한글 공부를 하면서 엄마에게, 이렇게 해야 친구들 보다 잘 하고 선생님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을 것이다.

이런 양육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이가 고학년이 된 어느 날, 자기보다 공부를 더 잘 하는 아이를 만났을 때,

기다렸다는 듯 손쉽게 공부를 포기해버리는 상황과 마주하고서야 알게 된다.

그럼 엄마들은 왜 공부 자체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보다 친구를 이기기 위해서라는 논리를 먼저 앞세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는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승부욕을 부추기는 건 쉽고 효과가 빠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려도 충분히 기다렸다가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할 때 가르쳐 주면 공부의 즐거움과 편리함을 알 텐데,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서두르게 되었을까. 그러다 끝내 아이로  하여금 공부에 질려 나가떨어지게 만들었을까. 아프다.



오늘의 받아쓰기.

이왕이면 재미있게 해 보려고, 난 일부러 중간중간 재미있는 낱말을 문제에 넣는다.

전학 간 친구에게 잘 가라는 말도 넣고,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는 말도 넣는다.

그리고 이번엔 '선생님 바보'라는 말도 넣어 보았다.

아이들이 꺄륵꺄륵 웃으며 그 말을 받아 적는데 한 아이가 쓰고 나서 다시 지우개로 '바보'라는 말을 슥슥 지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선생님은 바보 아니잖아요. 그런다. 그동안 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많았을 텐데,

그걸 생각하면 모르는 척 바보라고 쓸 만도 한데, 말랑말랑 작은 손으로 지우개를 문지르는 걸 보니

내가 오히려 아이 마음에 모진 일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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