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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26. 2015

아이의 유쾌함은 어디서 오는가

마음이 건강한 아이의 삶


아침 시간.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는데 코끼리 동상에 올라 간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평소엔 형님들이 노는 곳이어서 1학년 차례가 잘 안 오는 곳이다.

그래서 기념 사진을 찍어 주는데 난데없이 손가락 두 개가 달팽이 뿔처럼 쏙 올라온다.

한 아이가 내가 사진을 찍는 걸 보고 쏜 살 같이 달려 와 손가락을 들이 민 것이다.


동상 위에 있던 아이들, 갑작스런 방해꾼에 난리가 났다.

선생님이 자기들 사진 찍어주는데 너는 왜 갑자기 끼어드냐는 것이다. 

손가락의 주인공, 넉살 좋게 웃는다. 아, 미안 미안. 나도 같이 찍게 껴 줘.

그러자 남자 아이들 한 아이가 중재를 한다. 야, 너는 우리 찍고 난 담에 올라와서 찍으면 되잖아.

그러면서 빨랑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는 한 편, 나더러 저 아이 빨리 쫓으라 그런다.

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두리뭉실하게 답한다. 아유, 사진을 찍긴 찍어야 되는데 큰일 났네.

그러자 그 아이, 내 앞에서 팔짝팔짝 뛰며 말한다. 그럼 쟤네 먼저 찍어 주시고요. 저도 꼭 찍어 주세요, 히히.

내심 이 아이도 동상 위에 올려 주고 같이 찍어 주고 싶은데

분위기를 보니 그건 안 되겠고 할 수 없이 그 아이들 먼저 찍어주고 이 아이를 따로 찍어 주기로 한다.


동상 위 아이들 사진을 찍고 나서 그 아이를 찍으려고 하나, 둘, 셋하며 셔터를 누르려는데

아이가 갑자기 내 쪽으로 한발 껑충 뛰며 왼쪽 다리를 한 껏 뻗더니 고개를 제끼며 손을 쭉 뻗으며 브이자를 한다.

아이가 이런 포즈를 할 줄 모르고 가까이 서서 찍던 나는 얼결에 아이의 한쪽 다리가 잘린 사진을 찍고 말았다.


헉. 다시 찍어 주자니 아이의 흥이 떨어질 거 같고

그렇다고 이상한 구도의 사진을 보여주자니 미안해서 우물쭈물 하는데

자기 어떻게 나왔는지 보고싶다며 내 핸드폰을 날름 뺏는다.

그걸 보고 오예 이러면서 우히히 웃고는 그네를 향해 달려 간다.

그 모습이 운동장 옆 과수원 사과꽃처럼 싱그럽다.

나도 모르게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저 놈, 참 성격도 좋네.





무엇이 저 아이를 유쾌하게 만드는가.

동상 위의 아이들이 뭐라 그러는데도 화를 내거나 토라지지 않고 밝게 웃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사진을 결국 얻어낸다. 

저 아이만의 넉살이기도 하고 자부심이기도 하고 삶의 여유기도 하다.


대부분의 1학년 아이들은 이럴 때, 동상 위 아이들과 맞서 싸운다. 자기가 질 걸 알면서도 싸운다.

그러다가 상대에게 밀릴 것 같으면 울면서 내게 와 일러바친다. 그러면 해결 될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지금 억울한 감정 상태기 때문에 세상 모든 이들도 그렇게 믿어 줄거라는 것이다.

1학년이라는 나이가 타인의 감정을 읽을 능력은 아직 안 되는, 그래서 모든 상황과 감정을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형제와 다투거나 교실에서 친구와 다툴 때,

엄마나 담임에게 일러서 야단을 맞게 하는 방식은 자기 힘이 아닌 제 3자의 힘으로 상대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아이들이 이 방식에 매달리는 까닭은 이 방식이 잘 통하기 때문이다. 어른과 함께 하면 상대가 금세 위축 되기 때문이다.

또 자기가 이르기만 하면 엄마든 담임이 나서서 대체로 자기 편을 들어주니

일일이 자기 힘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아도 되어 편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이가 저학년을 벗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3,4학년만 되어도 친구들과의 갈등에서 담임의 권위를 빌리려는 행위 자체를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때가 되어서도 친구들을 이르는 아이들은 뭔가 부족한 아이라고 인식된다.

아이들은 자기 주장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어른을 개입시키는 행동을 '찌질하다'고 말한다.

이는 이 시기가 의존적 자아에서 점차 독립적 자아로 발전하는 시기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갑자기 찌질한 아이로 취급 받는 까닭을 잘 모른다.

그저 학급 아이들의 자기와 어울려 주지 않고 자기를 따돌린다고 계속 이른다.

그건 또 다른 '찌질함'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비슷한 패턴으로 확대 반복된다.

울음을 터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어릴 때 부터 자기 힘으로 현장에서 시비를 가리는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은 아이는

독립적 자아로 넘어가는 대신 의존적 자아로 남으려는 경향이 있다.

말만하면 어른들이 나서서 해결해 주고 그런 경우 승률은 거의 100프로인데

굳이 말도 잘 못하는 자기가 나섰다가 잘 안 되면 망신을 감수해야 하는 일을 굳이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교묘하게 자신의 책임을 어른이 거절 못하게 떠넘기면서 어른이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주길 원한다.


그런데 저 아이는 여간해서 그러지 않는다.

일러바칠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자기가 해결을 한다.

잠시 뒤에 가 보면 거의 매번 함께 놀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저 아이는 실질적인 또래의 리더가 된다.

아이들은 시비를 가리거나 뭘 하고 놀 지를 결정할 때, 저 아이의 의중을 먼저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면 그 아이는 또 유쾌하게 선뜻 나서서 친구들의 의견을 조정하고 놀이를 이끈다.

저 아이 속에는 사사건건 바락바락 대드는 동생을 귀찮다고 내치지 않고 들어 준 형제들과

늦둥이 동생으로 인해 쌓였을 형제들의 스트레스를 대신 풀어 주고 이해시킨 부모의 인내가 있다. 그 또한 아이의 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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