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창조성의 시작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라는 말이 있다. 하찮고 쓸모없는 일을 왜 하냐는 핀잔의 말이다.
10살 무렵, 밥이 안 나오는 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부모님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삼 남매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애를 쓰셨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엄마는 그 시절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게 여러 사교육을 시키셨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철없는 딸이었다. 그저 가방만 들고 학원에 왔다 갔다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주산이랑 웅변 배우기 싫어요. 미술 학원 다니면 안 돼요?”
“안 돼. 그림쟁이는 배고픈 직업이야!”
단호한 엄마의 말씀에 속상했지만, 더는 미술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가난한 집의 장녀로 태어나 배고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라셨다고 했다. 결혼해서도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야 했기에, 엄마에겐 쌀과 밥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친할아버지께서는 장남이었던 큰아버지는 대학교까지 공부를 시키셨고 큰 집엔 찰진 햅쌀도 보내셨지만, 우리 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치신 것 뿐 아니라, 찰기 없는 안 좋은 쌀을 보내셨다고 한다. 먹고 살기 빠듯했던 시절이라 자식들 중 장남에게 모든 것을 걸고 지원해 주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차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쌀조차 차별받았던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엄마 입장으로 보면 아주 속상하셨을 테다.
명절에 큰 집에 가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엄마의 마음을 몰랐던 우리 삼 남매가 큰 집의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프셨을 것 같다. 잘 사는 손위 동서를 보며 질투도 나셨겠지. 엄마는 시댁 식구들에게 불편한 기색은 내지 않으셨겠지만, 보란 듯이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하셨으리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고 사랑과 기도로 우리를 양육하셨다. 자식들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니 미술 학원은 엄마의 기준에서는 가르칠 필요가 없는 종목이었다.
나는 그때 미술 학원에 다니지 못했던 아쉬움을 마음에 접어 두고 잊고 살았는데, 딸은 패션디자이너로서 아들은 뮤지컬배우로서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생각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고 싶어했던 꿈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딸을 후원하지 못해서 속상하셨을 엄마의 마음이다. 요즘 나는 아이들의 성장을 후원하고 응원하는 것과 비례해, 스스로 느끼는 갈증도 깊어졌다.
내 마음속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스스로 인정하는 용기를 갖기로 다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창조성을 하루빨리 꺼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평소 흥미롭게 여겨지고, 하고 싶었던 것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두뇌 마사지를 하고, 30분 독서와 함께 1일 1포스팅을 통해 점점‘자기 탐색’을 하는 것이 나의 요즘 루틴이 되었다. 느슨해졌던 캘리그라피 작가로서 습작도 꾸준히 하면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사람들에게 재능을 나누고 싶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한 걸음 성큼 내디뎠다. 비록 쌀과 밥이 나오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길지라도 좋아서 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소중한 것 아닐까?
시작점은 ‘쓸모없음에서 시작되었을지언정, 쓸모가 있는 순간’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으니까.’
최근에 드로잉 작가 이기주 씨의 책에서 ‘무용한 것들은 낭만적이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작가의
말에 동감한다. ‘그렇지, 밥도 중요하지만, 쓸모없는 쓸모가 나에게는 더 소중해.’
혹시 나처럼 어릴 적 못다 이룬 꿈에 갈등이 있는 분이 계시면, 용기를 내보시면 좋겠다.
쓸모없으면 어떠한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잠자고 있는 그 아이를 깨우시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를 인정해 주고. 나아가겠다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고백이자 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