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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 VS 생성형 AI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

by 송단아

나는 아날로그적인 사람입니다. 키보드보다 연필로 쓰는 것이 좋고, 사람이 없는 은행에 들어갔다 놀라서 나온 적도 있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자마자 테이블에서 계산하는 것보다 다 먹고 일어서면서 주인장에게 “잘 먹었습니다. 많이 파세요.” 하고 나오는 게 좋습니다. 헤아려 보니 한둘이 아닙니다. 키오스크 앞에서 머리 위에 안경을 얹고 쿠폰 사용이나 적립을 못 해 쩔쩔맨 적도 있습니다. 뒤로 점점 꼬리가 길어진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겨드랑이에서 땀이 다 날 지경입니다. 젊은이들은 한숨이 나오겠지요. 못하는 심정은 정말 환장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심드렁하게 배울 생각은 안 하고 눈감고 버텨왔습니다.

카메라.jpg

여기 시 한 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같은 곳을 맴도는

지구인의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지구는 둥글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길을 잃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메타버스> 중에서


이 시는 사람이 쓴 걸까요? 아님, AI가 쓴 것일까요?

비디오 생성 AI '소라'가 만든 영화 예고편 영상도 한 편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비공개라고 하네요) 우주 공간에서 하얀 우주복을 입고 그 위에 빨간 털모자를 쓴 사람이 달 표면을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과 미래의 경계를 흐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영상 속 사람은 진짜 사람일까요?


최근 OPEN AI사가 만든 우주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더 이상 AI를 외면하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생성형 AI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생성형 AI가 무엇인지, 우리 삶에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40여 분 분량의 짧은 온라인 강의를 듣고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으로 기술의 발전 앞에서 두려움과 회피의 감정을 느껴왔던 저에게 이 영상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AI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스럽다’의 개념은 우리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는 “진짜 사람 맞아?” “이 글 혹시 AI가 쓴 글 아니야?”처럼 인간다운 것과 AI스러운 것의 진위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간다운 것과 AI스러운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살짝 미간을 좁히며 Copilot에게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알려줘.” 그러자 Copilot은 인간다움이 단순히 감정이나 직관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윤리와 가치, 관계와 공감 능력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고 답합니다.


일상에서 인간다움을 뺀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친구와의 따뜻한 대화,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행동 등 모든 순간이 다 인간다움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AI 덕분에 ‘인간다움’의 본질을 다시 묻고 있습니다. AI와의 경계가 빠르게 흐려지는 지금, 이러한 인간다움을 어떻게 유지하고 더 인간다워져야 할까요?


생성형 AI의 시대에선 사장님만 있고 직원은 없는 1인 기업의 형태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끼리 서로 공감하고 배려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돕는 일을 빼앗긴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너무 삭막합니다. 윤리적 가치가 다 말라비틀어지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외톨이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자신을 자주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어머님 세대는 나이 50이 넘으면 할머니 소리를 들으셨습니다만, 지금은 환갑을 지나 칠순의 언니들도 할머니라는 호칭을 붙이기가 애매할 정도로 젊습니다. 그러나 속내는 AI 세상이 아주 두렵습니다. (물론, 전혀 안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들은 60~70년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왔는데, ChatGPT가 세상에 나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딱 두 달이 걸렸다는 그 획기적인 디지털 세상은 우리의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뀔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습니다. 허겁지겁 따라가려고 해도 날아가는 기술의 발전은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도 어려운 시니어들에게 AI는 더욱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이니까요.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접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위에서 소개했던 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 시는 사람이 쓴 시라고 합니다. “메타버스” 속에서 같은 곳을 맴도는 지구인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 속에서도 길을 잃는 우리의 모습을 데자뷔로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더욱이 앞으로 100세, 아니 그 이상을 살아가야 하는 시니어는 이 변화와 혼란 속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요?




호주머니에 워크맨이 처음 나왔을 때, 휴대용 CD 플레이어, 삐삐, 벽돌만 한 휴대전화가 등장했을 때 "이건 뭐지?" "이건 어떻게 쓰는 거야?"라고 궁금해하던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네요. 새로운 것은 언제나 놀라움이자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받아들이고 사용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은 당연하니까요.


앞으로 얼마나 더 대단한 것이 세상을 놀라게 할지 알 수는 없지만, 챗GPT 같은 생성형 AI 기술처럼 단박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단히 빠른 변화의 물결을 마치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올라타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람과 AI 사이에 지켜야 할 경계는 어느 정도 명확해야 합니다. 사람이 '인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하고, AI는 'AI스러워야' 공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올곧은 디지털 세상은 모두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온고지신 (溫故知新)’ 이란 말도 있듯이,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미래도 없습니다. 앞으로 노령 인구는 더 많아질 것입니다. 미래에 양보한 과거를 터부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해 준 시니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돕는 방법을 찾아야겠죠.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정체성과 인간다움을 잊지 말고,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AI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잃지 않는 것 아닐까요? 결국, '사람이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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