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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zi Apr 20. 2022

010. 나의 반응 패턴, 꼬리표 그리고 터널 밖으로

자기 자신을 치유하며 살아가기

나는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데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당혹스러움, 불안을 크게 느낀다. 순간 앞이 까마득하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하며 후회를 하기도 하고, ‘좀 더 신중할걸’하며 자책까지 가기도 한다. 막막한 마음에 더 큰일이 날까 봐 조바심에 휩쓸리고, 해결 방안을 찾아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 못 될 것 같다. 이것이 내 패턴이다. 이럴 때는 잠시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들이 끝까지 솟았다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필요한 만큼 지나다 보면 이 감정이 거품 같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어긋지고 잘못된 것 같은 일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들을 종이에 적어보면, 생각보다 해야 할 일들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아야 4~5줄의 프로토콜로 확인하고 끝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간 밤에 온 메시지들을 확인해보니 계약서 및 계약금 지급을 서둘러 달라, 모션 그래픽으로 구현할 활동 내용의 추가 자료들은 언제쯤 받게 되느냐, 성우 관련 건은 그렇게 진행된다면 비용 소모가 크다, 마지막으로 대안으로 제시한 날짜는 우리가 일하지 않는다 등이었다. 자, 그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지금 정리를 해보자. 계약금은 일찍 기안을 작성해서 팀 내 결제가 이뤄져 주중 지급될 수 있도록 하면 되고, 추가 자료들의 경우 무엇을 보내야 할지 먼저 제안을 해달라고 부탁한 다음 담당자와 소통할 수 있도록 다시 확인해주고, 성우는 그렇다면 1개의 동영상은 남자 성우로, 2개는 여자 성우로 가는 방향을 타진해보고, 어제 예약을 추진했던 동료에게 연락을 해 상황을 이야기하고 공간 대여 상황을 확인하면 된다. 만약 해당 날짜가 도저히 안될 경우에는 최후의 방법으로 한 주를 늦추는 것까지 생각해보기도 했으니 더 놀랄 것은 없다. 지금 당장 할 수는 없고, 오후 5시까지 기다렸다가 근무시간 1시간 안에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살면서 알게 된 나의 반응 패턴이다. 기질(Tamparament)이나 성격(Character) 둘 중에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조금 애매할 것 같아서 일단 이렇게 표현했다. 반응 패턴을 알게 되면 휩쓸리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조절하고 대응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상황에서 예전의 나는 그 불쾌한 감정들을 곱씹고 또 곱씹는 겁에 질린 소와 같았다. 지금도 그런 부분들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내가 건강하게 살기 어려울 것 같아 이제는 감정이 소화되는 과정을 우선 견디고(아직은 ‘바라본다’, ‘지켜본다’라고 초연하고 멋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 이후에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지금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래야 나도 살고,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산다.


자신에 대해 꼬리표를 붙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나는 나 자신이 이렇다, 저렇다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쉽게 정의 내리는데 이 정의는 때론 부당하고 폭력적이다. 정의라기보다는 평가에 가깝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편하기 위해서다. 일관성 없고, 모순이 가득한 이 세상에 내 머릿속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질서는 나의 언어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하는 임의로 창조된 세계다. 진실은 규정된 언어 너머에 있는데 믿는 데로 세상을 보기 위해 나는 몇 되지 않은 얄팍한 언어를 붙잡고 그것이 다인 줄 알고 산다. 나는 이렇다는 표식을 스스로 몸 구석구석 찍어놓고 비슷한 경험들만 해나가며 ‘나라는 사람? 역시, 그러면 그렇지’한다. 그게 나이가 주는 현명함이라고 믿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앞의 이야기 한 반응 패턴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꼬리표를 붙이는 때이다. 일이 틀어져 다시 큰 불안이 나를 삼켰다. 이 강렬한 감정에 달궈진 쇠꼬챙이를 들고 ‘나는 불안하고 늘 신중하지 못하게 일을 처리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라는 주홍글씨를 세겨버렸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내가 부여한 질서에 맞춰진 늘 변함없는 세상이라는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 낙인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며 살 확률이 커진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차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춘 사람인데 거기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불안의 컴컴한 터널 속에서 핸들을 꺾어버리고 돌아선다. 경험이 제한되어 이 속에서 끝 모를 비애와 좌절 그리고 무기력함을 만난다.


스스로 세긴 낙인들을 잘 살펴봐야겠다. 패턴에 휩쓸려서 부당하게 붙이고 다니는 것들엔 무엇이 있을까? 아픈 상처에는 좋은 약을 발라주어 새살이 돋을 수 있게 돌봐주고 싶다. 터널 너머로 건너 가 그다음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잘 도와줘야겠다.


햇빛이 비치지 못한 곳엔 한 낮이어도 여전히 서리가 끼어 있다. 고루고루 빛을 비춰주면 얼었던 땅도 곧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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