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태국 도망기 34

치앙마이, 또 봄세.

by Chiang khong

9.12. 월


이 기분은.


마치 매일 지겹다고

때려치우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직장을
마침내 박차고 나오던 날
나도 모르게 자꾸만 회사의 정문을 뒤돌아 보며 느껴지던
목구멍 깊숙히 울려 퍼지는 공허함
바로 그것이렷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뒤로하고
위장을 채우기 위해 시장으로 나선 길이었다.
로터스 앞 체중계에 1밧을 밀어 넣고
나는 기적을 만났다.


아아!!


처음으로 65.7!


드디어 숫자가 바뀐 것이다!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이 소식을 어서 빨리 남자 친구에게 알려야겠다는 기쁜 마음도 잠시.
내일 치앙라이를 거쳐 치앙 콩으로 6시간을 이동하니

오늘 하루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자기 합리화!
다이어트 최대의 적!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얼씨구나!


블루베리 와플과 하얀 생크림 요구르트를 들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시장에서 사 온 요염한 복숭아는 나중에 우유 넣고 쉐이크 해 먹기로 하고
사카린을 주입시킨듯한 단맛의 끝판왕 포도를 딱꽁 (회색앵무)과 나눠 먹었다.


인터넷으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뒤
그래 마지막이다!

또 점심으로 탄수화물인 밥 한덩이와 매콤하고 부드러운 그린커리
거기다 계란 프라이까지 추가로 먹었다.

먹는데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이대로 있으면 4일 동안 풀만 먹었던 게 물거품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다시 풀로 돌아가자 싶어 자전거를 끌고 탄닌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라차밧 앞에 살 때는 걸어서 7분 거리인 이곳을
이젠 자전거 타고 20분 넘게 가야 한다.

화물차, 자동차, 벤, 오토바이, 뚝뚝, 썽태우와 경쟁하며
소독차 같이 뿜어내는 그네들의 매연을 흡입하며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 가며 가야 하는 것이다.


가기 전 라차밧 앞에 있는 그린 버스 체인점에서 수수료 20밧을 내고
총 186밧에 내일 아침 9시 30분 치앙라이행 그린버스를 끊었다.

치앙라이에 도착하는 대로 올드 터미널에서 치앙콩 로컬버스로 갈아 타면 끝!


드디어 떠난다.
지겨운 치앙마이!


6월 초 메짠에서 돌아온 뒤
3개월 반을 있었다.


2개월 덜컥 라차밧 대학 앞 맨션을 계약해 버리는 바람에
남자 친구도 나도 발이 묶였다.


남자 친구는 라오스로 미얀마로 2주 정도 여행겸 비자 갱신으로 콧바람을 쐬고 왔다지만
나는 7월 28일 치앙 콩에 비자 연장하러 간 단 이틀만 제외하고는
정말인지 잡초처럼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 친구와의 수많은 추억을 묻고 나는 이곳을 등진다.
남자 친구가 노래를 불렀던 캠핑도 가지 아니하고
오토바이로 빠이에 가자, 북부를 한 바퀴 돌아보자는 제안도 단칼에 거절해
그의 마음을 시퍼렁둥둥하게 만들고는
뭐가 좋다고 매일 시장이며 중고샵이며 쇼핑몰이며 돌아다녔던 것일까.

뭐에 씌어 M의 숙소에 기어들어와
한 달을 머물렀던 것일까.


알 수 없다.

치앙 콩으로 떠난다는 말을 하자
다음 주에 잠깐 볼일 보러 갈동안 숙소 좀 봐달라던 M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는 서운한지 말이 없어졌다가
어제 오늘 갑자기 어마어마한 폭풍질문들을 해댔다.


샐러드를 사와 토끼처럼 우물우물 씹어대니
평소보다 설탕이며 밀가루며 먹는 양이 많아서 였는지
얌전하던 위와 식도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겨우 적응했는데
이 무슨 짓이냐며 주먹을 불끈 쥐고 봉기에 나선 것이다.


인터넷을 하며 소화를 시키던 나는
어디선가 거대하게 몰려오는 끝도 없는 공허함에 화들짝 놀라
기어코 치킨 팟타이를 먹으러 나섰다.


치킨 팟타이.
양상추도 파도 없는 45밧 치킨 팟타이.


작년 이맘때 처음 일을 시작하는지
한없이 어리바리하며 정신 못 차리던 새로 온 언니는
1년이 지난 오늘 거대한 무쇠솥에 기름을 신나게 뿌리고 재료를 휘리릭 쏟아내더니
순식간에 치킨 팟타이를 완성해 냈다.


장족의 발전이다.


치킨 팟타이까지 먹고 이대로 집에 가면 또 누워서 인터넷을 할 것 같아
잠시 치앙마이를 걷기로 했다.

오랜만에 왓 째디 루앙에나 가볼까.
하지만 역시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기는 뭔가 아깝다.
뒤따라온 서양인들도 아쉬운 듯 밖에서 사진만 찍어대더니 돌아가 버렸다.

중국인들이 버스를 대절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바람에
이제는 20밧을 내야만 입장할 수 있다.

왓 쑤언 독도 마찬가지 사정.
이러다가 왓쨋욧도 왓쁘라싱도 모두 유료가 될까 봐 걱정이다.


길을 걸으니 남자 친구가 몰던 오토바이 뒤에 앉아
유유자적 돌아다니던 생각이 떠올라 싱숭생숭해 졌다.


나는 그에게 너무나도 해준 게 없구나.

있을 때 잘했어야 했건만 꼭 떠나고 나서야 이런다.

그래.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봤자 다 무슨 소용인가.
가끔 페이스북으로 대화를 할 때
나는 지난날 내가 했던 과오를 용서받고자

이것도 미안해
저것도 미안해 하고 말한다.

이런 뜬금없는 나의 사과에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무슨 말?
그는 재빨리 말을 돌려 버린다.


그가 운전해서 구석구석 보여준 모든 곳들.
왓파랏,왓 도이수텝,보쌍,싼캄팽,도이사켓 온천, 람뿐,살라피,반타와이,항동
매림, 치앙마이 시내 등
수없이 갔던 와로롯 시장과 로빈슨과 시장 시장 시장들을
만약 썽태우로 갔다면
돈으로 당장 따져도 금액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어디든 데려다줬다.
말만 하면 정말인지 어디든!


그렇게 하루 종일 날 위해 운전해 준 사람한테
나는 시장에서 사 온 샐러드에 소스만 뿌리면 될 것을
귀찮아하며 생색내며 해주거나
투덜대기 일쑤였다.


자꾸만 반성문 쓰는 것만 같다.

내가 만약 그의 나이이거나
돈에 여유가 있다면
그가 있는 뉴질랜드로 당장 날아가버릴 텐데...


보고 싶다.
마음에 구멍이 자꾸만 숭숭 뚫리는 것 같다.
그 사이로 오고 가는 바람이 쎄다.


치앙 콩에서 이 모든 공허함을 날리고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맞이해야지.

(급 긍정 마인드

이래서 내가 좋다. ㅎㅎ)


잘 있어, 또 봐.

치앙마이!!!!





오늘도...

sticker sticker

내일부터 다시 시작!

블로그도 매일매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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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구덩이에서 캐온 워터 코인들.

아주 쑥쑥 잘 자라주고 있다.

물 만 주면 되니 다음 방 주인이여, 부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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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째린에 빵을 던지면

신성해서 먹지 아니한다는 물고기들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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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파 카오 벽면의 조각.

여자의 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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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차팟 대학 앞의 30밧 팟카파오와 함께 그리워질

왓 파 카오 근처 골목 식당의 50밧 그린커리.

그리고 치앙마이 게이트 노점 쥬스 아주머니의 과일 쉐이크도.

라차팟 20밧 오믈렛도.

30밧 콘 치즈 감자튀김도.

탄닌의 1g 10밧 샐러드 바도

근처 10밧짜리 과일팩도

허니비의 8밧 찹쌀떡도

로빈슨 에어포트 프라자의 60밧 비빔밥도

치앙마이 게이트 30밧 채식부페도 모두모두 그리워 지리라.


치앙콩에선 뭐 먹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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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치앙마이의 하늘은 언제나 옳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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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의 자전거를 굴리다 만나던 소박한 치앙마이 골목들.

마음을 따뜻하게 해줘서 고마웠어.

-걱정마시게나. 치앙콩은 이런 골목이 천지 삐까리 일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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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나면 누가 과일이며 야채며 챙겨주노...

누가 똥싼 신문지 갈고 물 갈아주노...

누가 누가 뽀뽀해주고 머리 쓰담 해주고 말 걸어주노...

제발 누군가가 와서 듬뿍 사랑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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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같기도 하고 독수리 같기도 한 이녀석이 제일 눈에 밟힐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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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 주세요. 긁 긁 해 주세요~

할때는 고개를 팍 수구리지만

싫을때는 손가락에 빵꾸 뚫리게 물어대는 회색앵무 탁콩.

올해 3살. 오래 살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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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냥이 스토커들의 천국 치앙마이!

사방천지 길냥이들이다.

은근 캣 카페도 많다.




참..

나란 여자는 미련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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