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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나 Dec 24. 2024

어린 사수와 중고 신입 EP 4

EP 4 : 네 하던 대로 하세요

4. 네 하던 대로 하세요


요컨대 내가 일을 시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이무기씨가 퇴사를 논했다. 퇴사는 명백한 가불기다.

일을 다 정리하고 퇴사를 꺼낸 이유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봤다.


1번. 정말 퇴사를 하려고 했다.

2번. 시킨 일을 하기 싫어서 수를 썼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2번이 더 가까웠다. 영리하게도 직속 상사인 내가 시킨 일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으니 내 상사인 대리님에게 말을 한 것이다. 둘 중 뭐가 되었든 책임감이 없는 행동에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화가 났다. 머리를 차분하게 식히고 이무기 씨에게 할 말을 메모장에 정리했다. 나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할 말을 정리하면서 생각을 비우는 습관이 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무기씨는 평소와 똑같이 근무태만이었고, 대리님과 부장님은 이무기씨를 회유할 방법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대리님에게 아무래도 제가 일 시킨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며 이야기를 해보겠다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걱정을 하면서 말렸지만 제가 악역을 자처하겠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무기씨의 대타를 자청했다.


이무기씨를 끌고 비공식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사회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터라 흡연자인걸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강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담배를 물었다.


술자리와, 담배타임에서는 늘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법이다. 알코올과 니코틴이 긴장감을 풀어주는 건지 조금 더 감춰왔던 본심을 쉽게 꺼낼 수 있게 된다.


나 : "얘기 들었어요. 퇴사하신다고 하셨다면서요? 혹시 제가 일 시켜서 그런 건가요."


아직 사회화가 덜 된 시점이라 사람을 꼬드기는 법을 몰랐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며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었다. 나 너 싫어를 몸소 표출하며 싸가지가 없어진 나.  


아무기 : 아닙니다. 그냥 제가 힘들어서...


힘들어? 네가? 사람은 늘 자신의 고단한 처지는 크게 받아들이고 남의 고단한 처지는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남의 힘듦을 이해하기에는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었다. 힘들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반박하고 싶은 말들이 투성이었다.


병원일은 처음이라 업무가 익숙하지 않다. 적응하기가 힘들다. 나는 당신이 무슨 노력을 했는지 하다못해 인수인계서를 보다가 궁금한걸 내게 물어보기라도 했는지 따졌고.


컴퓨터 작업이 힘들다.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하다못해 타자연습이라도 해볼 생각을 해봤냐고 따졌고.


접수 수납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잡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 남들 바쁜 거 뻔히 보이면서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니일 내일 나누고 있는 게 언짢다-는 얘기는 속에 묻어두고 우리 병원이 좀 그래요...라는 말로 대체했다.


그래도 들어온 이상 책임감은 가지고 행동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가벼운 마음으로 퇴사를 논하지 말라고 열심히 해서 적응할 생각을 하라고, 모르는 거 있으면 제발 나한테 도움을 청하라고 몇 마디를 거들어주고 이무기씨의 똥 씹은 듯한 표정을 봤다. 네 알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휘적휘적 가버리는 모습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아 뭣 됐다. 강하게 느껴지는 뭣됌.


아니나 다를까. 이무기씨는 가장 편한 방법을 선택했다. 점심을 먹고 오니 김부장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곳에는 대리님도 계셨다. 이무기씨가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다며 솔직히 한계라고 일이 늘어나는 게 힘들다고 했단다. 퇴사는 안 하기로 했고 그 대신 당분간 이무기씨 일을 나보고 가져가란다. 지금 내가 1.7인분을 하고 이무기씨가 0.3인분을 하고 있는데 저보고 퍼센트를 더 늘리라고요?


이무기씨라면 껌뻑죽는 김부장 덕에 속에 열불이 나서 따지려고 했는데, 대리님이 내 앞을 막아서더니 자신이 일을 더 가져가겠다 했다. 김부장의 웃음과 나의 비웃음으로 회의는 끝났다.


회의 내용에 대해 데스크에 공유를 하려고 갔는데, 김쌤이 자리를 비우고 이무기씨만 혼자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를 꽉 깨물었다.



나 : "부장님 하고 얘기했어요. 선생님은 데스크 업무만 집중해 주고 인증 준비는 안쪽에서 고생해 볼게요. 업무 중에 이건 가져갈 거고, 이건 해주셔야 하고 -"

이무기 : (동태눈깔)

나 : "일이 더 많아져서 데스크 신경 쓸 틈이 없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은 못 도와줍니다."

이무기 : (동태눈깔)

나 : "저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더 말 안 할 테니까 하던 대로 하세요. 잘해보세요."



뒤돌아 사무실로 가는 나를 쳐다보는 이무기씨의 시선을 무시했다. 포기할 테니까 니 알아서 해보세요.


유치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유치한 방법이 제일 잘 먹히는 법이다- 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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