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희운 Aug 15. 2019

어른들에게 쫓겨난 어른이들의 ‘집’

아이들이 그토록 찾아헤맸던 <우리집>에 대하여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우리집>의 엔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히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 학생들이 농담 식으로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단편 영화를 찍어야 할 때 피해야 하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동물을 다루는 것이고, 하나는 노인을 다루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바로 어린아이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재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현장에서 이들을 컨트롤하기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세 가지 소재는 단편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흔히 말하는 상업 영화에서도 기피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벌써 두 편의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이 있다. 바로 <우리들>과 이번에 개봉하는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이다.



전작인 <우리들>이 많은 호평을 받아 궁금해하고 있던 차에 <우리집>을 보게 되었다. 영화는 아이들이 나오지만 아이들의 순수함을 다룬다기보다 세상에 찌들어버린 어른들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현실을 다룬다. 이는 첫 장면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식구들의 밥을 챙기는 하나와 달리 모든 식구들은 서로 싸우기 바쁘다. 항상 남의 탓만 하는 부모님과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 오빠. 식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자고 하는 하나의 말이 무색하게 가족들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그 가운데 영화의 타이틀이 뜬다. 영화 속 하나의 가족이 묘사되는 풍경은 ‘영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것은 영화가 어떤 현실을 영화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스크린 속으로 옮겨온 느낌에 가깝다. 이러한 삭막하고 편안하지 못한 ‘집’이라는 공간에서 하나는 가족들을 어떻게 해서든 하나로 모으기 위해 밥을 먹자고 하고, 여행을 가자고 말하지만 부모님과 오빠는 하나의 이런 모습을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가족을 다시 화합시키고 그 가족을 책임지려고 하는 하나의 성향은 유미, 유진 자매를 만나 더욱 강화된다. 바쁜 직업으로 인해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유미, 유진 자매는 항상 어른 없이 둘이 다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이들과 친해진 하나는 가족들이 먹어주지 않았던 자신의 ‘밥’을 유미, 유진 자매에게 계속 먹여주면서 자신의 진짜 가족을 대체할 다른 대상을 찾는다. 하나는 마치 가장처럼 아이들을 챙겨주면서 자신이 가족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소속감을 강하게 느끼고 유미, 유진 자매도 그런 하나를 친언니처럼 따른다. 그렇기에 하나는 유미, 유진 자매의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내쫓고 두 자매를 지켜주기 위해 집안을 막 어지럽히고, 마지막에는 어린 자매들을 데리고 그들의 엄마, 아빠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결국, 이 여행으로 인해 이들이 진짜 ‘가족’이 될 수 없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서로 깔깔거리고 즐겁게 웃으면서 만들었던 상자로 만든 아이들의 ‘집’은 먼 여행길에서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고, 서로의 진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들은 결국 그들이 피를 나눈 진짜 가족이 아닌 그저 서로의 곁에 머물러서 잠시 위로를 받고자 했던 ‘가족’의 대체품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결국 하나와 유미는 각각 마음속에서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어른들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퍼부으면서 상자로 만든 집을 발로 밟아 부서 버리고 만다. <우리집>이 가장 서글퍼지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다 컸다고 하는 어른들마저 마음속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계속 바라고 찾고 대체품을 찾는데, 한창 사랑을 받고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들이 왜 어른들 틈 속에서 쫓겨난 채  어른들의 모습을 닮아가야만 하는가.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사람들이 두고 간 텐트 속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이곳이 자신들의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어린아이들도 이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이뤄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화의 엔딩은 하나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가족들이 다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가장 원하고 바라는 순간이 모든 것이 다 무너진 시점에 이뤄졌다는 것은 굳이 아이들이 알아도 되는 ‘현실’이 아니다.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계속 쫓겨나서 그 어디에도 평안한 자신들의 집을 만들 수 없었던 ‘어른이’들. 아무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가 삭막하고 힘든 것이더라도, 어린아이들에게 굳이 이런 시련을 겪게 하고 간접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정말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을까? 이런 마음에 괜히 <우리집>의 엔딩이 더욱 서글퍼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슬픔은 틀리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