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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an 30. 2021

가족과 나, 그 사이의 아이러니

<페어웰> 단평 


※ 본 리뷰는 <페어웰> 사전 시사회를 통해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주관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그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빌리. 자취방에서 미국에 있는 본가로 돌아간 빌리는 심상치 않은 집안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신과 바로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했던 할머니에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위해서 할머니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기로 결심하고, 혹시나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빌리가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은연중에 알릴까 봐 두려운 마음에 그녀만을 두고 모두 중국으로 떠난다. <페어웰>은 우리가 다소 이해하기 힘든 거짓말로부터 시작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그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 죽음을 알게 될 경우 그 사람이 암으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죽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빌리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뵙기 위해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떠난다. 


사실 빌리는 이 영화 속에서 이방인이나 다름없다.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그녀의 사고방식은 가족들의 사고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계속해서 할머니에게 자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갖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가족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들은 채 만채하고 그녀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분명 중국인이라는 국적을 갖고 있지만, 그녀의 중국어는 자연스럽지 않다. 이따금 다른 가족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할머니를 봐주시던 의사를 만났을 때는 중국어보다 영어를 편하게 사용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하기도 한다. 빌리가 가장 괴리감을 느끼는 지점은 삶과 죽음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입장인 빌리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꼭 마지막까지 비밀로 해야 한다는 가족들. 동양과 서양, 가족과 개인, 삶과 죽음에서 빌리는 이 모든 틈 사이에서 어디에도 완벽하게 녹아들지 못하는 이방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와 가족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할머니의 마지막을 평온하게 보내드리기 위해 가족들은 그 앞에서 최대한 밝아 보이는 연극을 연출하고, 할머니의 마지막을 위한 알리바이로 사촌의 결혼식을 만들어낸다. 그 덕에 할머니는 신이 나서 결혼식장을 알아보러 다니고 오히려 생기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따금 그녀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소리 없이 찾아와 가족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도 한다. 처음 빌리는 중국으로 온 이후에도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이야기에도 꿈쩍하지 않고, 결혼식 날은 속절없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빌리는 처음에 자신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독감만을 느꼈지만, 가족 각자와 잠깐씩이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죽음을 가리기 위해 마련된 결혼식 자리였지만 빌리는 그곳에서 온전한 웃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미소는 지을 수 있게 된다. 


<페어웰>에서는 가족이기에 모든 것을 다 이해해야 한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어떤 가족에게든 나 개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그런 사실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가족 전체를 와해시키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페어웰>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모든 것을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면서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부분은 나에게 미지의 영역인 여백으로 남겨놓고 상대방에게 그런 부분이 있다고 수용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화로운 가족이 무조건 행복하다는 할리우드식 해피 엔딩이 아닌, 어딘가 모르게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빈 공간이 있더라도 한 개인 자체를 받아들여 주는 것. 가족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처럼 보일지 모르더라도, 가족이라고 해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오만이 아닐까.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속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것. <페어웰>은 가족과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시대에서 서로에게 "안녕"이라고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가족을 만날 그때까지 "안녕"이라고 쉼표를 찍자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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