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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Apr 18. 2021

공포가 트라우마를 불러 내는 순간

<제럴드의 게임> 단평

※ 본 리뷰에는 <제럴드의 게임>에 대한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럴드의 게임>은 2017년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이 영화는 한적한 별장으로 떠나는 부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주인공인 '제시'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심리 드라마로 전환된다. 무료해진 부부관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제시는 남편과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하지만, 남편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그 시작은 어긋나 버린다. 자신의 양손에 묶은 수갑을 남편이 풀어주지 않은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돌연 쓰러져 사망한다. 한적한 별장에 이웃이나 일하는 사람이 올리도 없는 절체절명의 절망적인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패닉에 빠진 제시 앞에 환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에 자신이 불쌍하다고 먹이를 주었던 개가 나타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편 시체의 팔을 뜯어먹고, 제시는 이 순간부터 이성을 잃어버린다. 영화는 위기의 상황에 빠진 여성의 내면을 지루하지 않게 풀어내기 위해서 두 가지 환영을 불러낸다. 하나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해 개에게 팔을 물어뜯긴 남편이며, 다른 하나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제시의 머릿속에서 떠오를 법한 수많은 생각들을 두 사람의 환영이 끊임없이 대변해 이야기하면서 영화는 한 인물이 극을 이끌고 가는 영화가 처할 수도 있는 '지루한 상황'들을 만들어 내지 않으려고 한다. 남편의 환영은 제시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대변하며, 제시 자기 자신의 환영은 제시의 내면 속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성으로서 제시가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


단순히 '제시'라는 여성이 처한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생존기를 그려내는 것으로 보였던 <제럴드의 게임>은 제시와 남편 두 사람이 점점 더 깊은 대화로 이어나갈수록 제시가 자신의 겉모습 밑에 깊숙이 감춰놓았던 트라우마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남편과 잠깐 동안 이뤄진 대화에서도 나타나듯, 제시와 남편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남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남편은 제시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 제시는 이 단서들을 통해 자신이 남편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 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 이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제시가 이렇게 자신의 현실을 외면했던 것 그 밑에는 더욱더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던 이야기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심지어 어머니와 다른 형제자매들이 개기일식을 보러 가고 자신은 아버지와 단 둘이 남은 사이에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 마우스(어린 시절 제시의 이름)는 아버지가 부드러운 어조로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는 협박을 당한 뒤, 영원히 그 사실을 없는 일로 치부하고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은 이러한 트라우마를 공포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불러낸다. 인간이 아주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는 감정인 공포를 통해 그 공포 수면 아래 깊숙이 억압되어 있던 트라우마까지 불러낸다. <제럴드의 게임>에서 제시가 처한 상황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더욱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영화는 또 다른 공포의 존재인 문라이트맨을 불러낸다. 끔찍한 첫째 날 밤 제시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어떤 환상 같은 존재를 발견하고 그 존재가 남편, 또 다른 자신처럼 환영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발자국을 발견하면서 그 존재가 단순히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그곳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제럴드의 게임>에서 공포와 트라우마는 동시에 극복된다. 달에 완전히 가리어진 해처럼 영원히 자신의 비밀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제시. 그는 어린 시절 개기일식이 끝난 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 깜짝 놀라 두려움에 유리컵을 깨고 말았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자신의 어린 시절 아픔을 직면한 그는 현실에서 다시 한번 진정으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유리컵을 깨고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엄청난 신체적인 고통을 견뎌낸뒤, 수갑에서 빠져나온다. 수갑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를 움추러들게 만드는 남자들을 상징한다. 한쪽 수갑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한쪽 수갑은 죽은 남편이 채운 것이었고 이 수갑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끔찍한 상처를 내고 살가죽을 드러내면서까지 탈출하는 그 순간 보이는 고통은 단순히 신체적인 고통뿐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해야 하는 고통을 외면적으로 드러낸 것과도 같다. 어쩌면 그에게는 신체적인 고통보다 자신의 상처를 마주해야 하는 그 고통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순간을 모면하고 제시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서 환상인 것처럼 서있던 문라이트맨에게 결혼반지를 넘긴 채 그 집을 서둘러 떠난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해결과 자신의 팔을 치료하는 현실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까지 만들면서 제시는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문라이트맨이라는 두려움이 남아있었는데, 한 신문기사를 통해 문라이트맨이 실제로 있는 범죄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문라이트맨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법정이 찾아간 제시는 그에게 말을 걸고, 문라이트맨은 그가 공포에 질려서 자신에게 했던 말을 반복한다. 과거의 자신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자신을 비로소 품에 안은 제시에게 이제 더 이상 '공포'는 없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존재가 어느 순간이든 자신을 찾아와 괴롭힐 수 있는 실체가 없는 환상이 아닌, 실체가 있는 범죄자라는 현실을 직면하고 깨달은 제시는 문라이트맨에게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군요"라고 말한다. 문라이트맨에게서 제시의 아버지와 제시의 남편 얼굴이 겹쳐져 보인 것처럼 제시는 비로소 자신을 억압하고 있던 모든 공포에서 벗어나 신체적인 억압만이 아닌 정신적인 억압에서도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스릴러, 공포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치유 영화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제시의 삶처럼 누군가에게 항상 가리어져 그늘진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제시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힘내라고 손을 내밀어주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도 가리어지지 않고 쨍한 햇빛 아래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제시의 모습은 억압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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