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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Aug 04. 2021

지금, 이 시기에 알맞게 당도한 히어로

<블랙 위도우> 단평

※ 본 리뷰에는 <블랙 위도우>에 대한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개봉이 밀린 <블랙 위도우>를 기다리면서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 중 하나는 이미 엔드게임에서 결말을 맞이했던 캐릭터를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가에 대한 염려였다. 이러한 염려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다른 염려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이 캐릭터를 그대로 보내기 싫다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만큼 <블랙 위도우>는 최근에 나온 마블 솔로 캐릭터 무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였고, 이 한편만으로 이 캐릭터를 끝내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큰 영화였다. 


<블랙 위도우>의 스토리는 시빌 워 이후 쫓기는 신세가 된 나타샤가 자신을 쫓던 세력을 피해 인적이 드문 노르웨이로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곳에서 한동안 몸을 숨기려고 하던 중 나타샤는 의문의 공격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져 부다페스트에 있는 또 다른 비밀 장소로 이동한다. 나타샤는 그곳에서 어릴 적 자신의 동생이 옐레나를 만난다. 나타샤는 옐레나로부터 자신이 있었던 레드룸 조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레드룸이 아직도 건재하며 거기에 여전히 수많은 소녀들이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레드룸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가 어벤저스 동료들과 함께 있기에 나타샤를 건드리면 동료들이 복수하러 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 나탸사는 레드룸을 찾아가 그곳을 완전히 파괴해버리기로 마음먹는다.


<블랙 위도우>는 여성 히어로를 메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캡틴 마블>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비슷한 면은 있을지언정 완전히 같은 카테고리 내에 속한 영화는 아니다. <캡틴 마블>은 한 히어로가 자신의 숨겨져 있던 진짜 힘을 발견하는 성장 과정에 있는 영화이고, <블랙 위도우>는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직면함으로써 진짜 '히어로'로 거듭나는 영화이다. 자신을 억압하는 환경과 남성들을 모두 제압하고 완벽하게 강한 힘을 가진 <캡틴 마블>의 캐럴 댄버스도 좋은 캐릭터였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블랙 위도우>의 나타샤 로마노프가 훨씬 더 마음에 와닿았다. 엄밀히 말한다면 나타샤 로마노프는 다른 슈퍼 히어로들처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떤 히어로보다 가장 인간적으로 접근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가 이를 해내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삶을 사는 방식과 유사한 부분들이 많아 여기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깊이 몰입하게 된다. 


일반적인 히어로물에서는 '히어로'들은 모두 완벽해 보인다. 그들은 한치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이 보이고,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것이 윤리적으로 크게 위반되지 않는 선에 있는 한 다른 이들의 삶을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 잘못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느냐이기 때문이다. <블랙 위도우>에서는 캐릭터의 잘못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타인의 공격을 완벽히 따라 하는 태스크마스터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나타샤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분명하게 깨닫는다. 악당을 처리하기 위해 한 개인의 생명보다 대의를 중시했던 그는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대의가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을 분명하게 위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히어로의 모습은 사실 우리가 평상시 영화 속에서 봐왔던 히어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영화에서였더라면 나타샤가 과거 자신의 실수와 마주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블랙 위도우>에서는 이런 장면 하나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나타샤가 과거 자신의 잘못과 마주하고 그 잘못을 어떻게 해결해나가는 지를 보여준다. 히어로 영화에서, 특히 지금 이 시기에 개봉한 여성 히어로 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이 나오는 것은 내게 있어서 굉장히 의미 심장하게 다가왔다. 2년 전 <캡틴 마블>이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면 그 뒤에 개봉한 <블랙 위도우>는 항상 자신의 가능성을 제대로 펼치지 못 던 여성이 실수하고 잘못하고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내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실수를 저지른 뒤 그 실수를 다른 남성이 해결해주고 결국에는 그 남성으로부터 구원받는 민폐 타입의 여성 캐릭터가 아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겪고 마주할 수 있는 인간적인 여성의 삶을 히어로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싸움에서 아무리 부수고 깨지고 다치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일어나 결국에는 레드룸을 깨부수고 소녀들을 구해내는 나타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여성 관객들은 환호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대중 영화 속에서 항상 남성이 메인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을 봐왔던 여성들에게 <블랙 위도우>는 참으로 단비 같은 영화이다. 수많은 자본이 들어간 대중영화에서 메인으로 활약하는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나'처럼 실수하고 잘못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여성 히어로의 모습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라는 변수로 인해 조금 늦게 당도하긴 했지만, <블랙 위도우>는 오히려 우리 여성들에게 가장 적합한 때에 개봉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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