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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Mar 26. 2017

'여자'의 무기는 더 이상 웃음이 아니다.

<미스 슬로운> 속 눈부시게 빛나는 캐릭터, 슬로운


※ <미스 슬로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 리뷰는 3월 22일(수) 사전 시사회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로비스트’,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만큼 낯설게 느껴지는 직업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로비스트는 합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직업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로비스트가 합법인 것은 아니지만 '대관 업무'란 이름 하에 비슷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로비스트를 다룬 영화라고 하면 소재 자체 즉, 관객들과 만나는 처음 시작부터 어려워지게 마련일 것이다. 나 또한 역시 그렇게 느꼈으니 말이다. 이런 어렵게 느껴지는 로비스트 소재에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라니. 과연 이 영화는 얼마나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미스 슬로운>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미스 슬로운>은 내 관심 밖에 위치한 영화였다. 개봉하기를 애타게 기다려왔던 작품도 아니었고, 제시카 차스테인이란 배우는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단독 주연작이라는 점은 그다지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하지만 글의 시작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첫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판단이었는가. <미스 슬로운>은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야구방망이를 들고 산산이 깨부수어 버린 영화였다. 대중 영화의 틀 속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영리하게 전달하면서도, 사회의 흔해빠진 고정관념을 파쇄시키며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영화. 이런 수식이 전혀 아깝지 않은 영화가 <미스 슬로운>이다.



사실 총기규제와 같은 소재로 무너지고 붕괴되고 있는 미국 내부의 일면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학교 내 총기 사건의 비극을 다룬 <엘리펀트>, 이라크 파병으로 인해 파괴된 개인의 삶을 다룬 <엘라의 계곡> 등. <미스 슬로운>도 미국 사회의 균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이지만, 앞서 이야기한 영화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 한다. 감정의 공감을 위해 이 소재를 다룬다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영화의 틀을 차용해 관객들에게 대리 만족을 느껴주게 하고 이를 통해 더욱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게 가공되었다. 특히 이러한 점에 극대화된 면이 ‘미스 슬로운’이라는 캐릭터이다. 소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영화들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다른 측면으로 이야기해보고 싶다. '슬로운'이라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 말이다.





<미스 슬로운>에서 가장 먼저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것은 ‘미스 슬로운’ 캐릭터 자체이다. 슬로운 캐릭터는 우리가 대중 영화 속에서 흔히 만나보았던 남성 캐릭터의 성전환처럼 보인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철함, 일에 완전히 미쳐버린 워커홀릭, 그리고 특정한 누군가에게 구속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이 원할 때에만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쿨함까지. 대중 영화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남성 캐릭터의 전형적인 일면들이다.(문득 특징을 적고 나니, 제임스 본드 캐릭터의 특징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성 캐릭터의 특징을 여성 캐릭터로 옮겨왔을 때, 흔히 쉽게 저지르는 실수들이 있는데 여성 캐릭터들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불어넣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왜 이렇게 냉철해질 수밖에 없는지, 그녀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어릴 적 기억들을 플래시백으로 한 번씩 넣어주는 세련되지 못한 연출을 종종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스 슬로운>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쿨하다 못해 냉정한 그녀의 삶 속에서 그녀의 개인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 몇몇 장면에서만 그녀가 왜 그러는지에 대해 살짝 언급하는 부분들이 있기는 한데, 거기서 영화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뭐.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데 꼭 사연이 필요해?” 그렇게 무심한 듯 지나갈 수 있는 쿨함. <미스 슬로운>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면 영화나 캐릭터나 모두 쿨하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가 가볍지 않을지언정.


캐릭터의 ‘쿨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슬로운에게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총기 규제에 찬성하시는 거죠? 과거에 총으로 인해 사람을 잃은 상처가 있으신가요?”(영화 속에서 정확하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질문을 했던 모든 이들의 말속에는 이러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슬로운은 자신의 신념과 경험이 꼭 연관되어 있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미스 슬로운>의 독특한 지점은 바로 이 곳에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여성 캐릭터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쥐어주지 않는 것. 어떤 아픈 과거와 힘든 역사가 있어야지만 여성 캐릭터가 내러티브 속에서 살아남고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면, <미스 슬로운>은 도대체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도리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남성, 여성 이런 차별성을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정정당당하게 주장하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는 모습. 자신의 성별과 그 성별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은 이런 캐릭터가 다시 한번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통 영화 속이나 드라마 속에서나 사람들이 흔히들 어느 누구에게도 친절하지도 않고 냉정하고 쌀쌀맞은 여성들을 지칭할 때 ‘얼음공주’라는 별칭으로 부르고는 하는데 이는 특히 남성 주류 사회 속에서 성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채우는 일부로 작동하기도 하는 이 별명은 슬로운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데, 영화 속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드러난다. 팀 내에서 회의를 하기 전, 한 여성 캐릭터가 슬로운에 대해 평가하는 장면이 바로 이와 비슷한 지점들인데 거기서 여성 캐릭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얼음이 사람이 되면 슬로운이야.” 이는 ‘얼음공주’라는 한국식 별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농담처럼 비친다. 물론 슬로운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대해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즉, 슬로운은 누군가의 판타지로 소비되는데 불필요하게 자신의 신경을 쏟아붓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반응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슬로운. 영화는 그녀의 캐릭터를 단순히 평면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을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로 구축된다. 비록 그녀가 누군가나 대중들에게는 씹고 즐길 수 있는 가십거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캐릭터는 거기서 수동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미스 슬로운>에서 또 마음에 드는 것은 슬로운과 포드의 관계이다. 그저 돈을 주고받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관계로 이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진전이나 감정적인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승리에 집착하는 슬로운이 이를 호락호락하게 허락할 리가 절대 없다. 절대 틈을 내보이지 않는 그녀는 그만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서툴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나면 냉정하고 미친 듯이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몇몇 지점들이 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부분은 청문회에서 포드와 마주했을 때이다. 어떤 순간에도 법률 조항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면서 흔들리지 않았던 그녀는 포드가 법정으로 들어오는 순간 크게 흔들리고 만다. 모든 관객들은 그녀가 그와 호텔 로비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포드가 그녀의 약점이 되리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청문회의 흐름도 포드가 어떤 직업인지를 처음부터 알려주며 그녀를 완벽하게 궁지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이지만, 포드가 그녀와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하는 발언에 법정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술렁이게 된다. 나쁜 남자에서 한 순간에 그는 멋진 남자로 포지셔닝이 바뀌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포드와 슬로운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 로맨스가 피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그저 쿨하게 그 사건을 지나친다.





남성우월주의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미스 슬로운>에서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 드러나는 방식은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독특하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남성 위주로 점철된 주류 내러티브를 전복시키려는 시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냉철하고 강한 캐릭터(하지만 잔혹하리만치 승리에 집착하는) 그리고 그 캐릭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약점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무너뜨리려는 사나운 적들. 이는 전복이라기보다는 단지 기존의 캐릭터의 성별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차이점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슬로운이 입고 나오는 옷들을 더욱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슬로운은 호텔에서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한다. 그녀가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고, 신발을 준비하는 모습들이 쭉 연결되어 보이는데, 이는 마치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투를 준비하는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에 가깝다.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치면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사회 속에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보호하고 이기기 위해 모든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군인들이 자신의 총을 관리하고 다듬는 것처럼 그녀는 완벽한 옷차림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며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이는 남자가 출근할 때 깔끔하게 핏이 딱 떨어지는 슈트를 입고 출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남성이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처럼 그녀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을 펼치는 것이다. 이는 슬로운의 옷과 화장이 누군가에게 그저 잘 보이기만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 자기만족과 자기 방어의 수단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미스 슬로운>에서 우리는 제시카 차스테인의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연기를 제대로 접했던 작품은 <인터스텔라>에서였는데, 그 영화에서는 딱히 인상 깊은 연기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제로 다크 서티>, <마션> 등 다양한 영화 속에서 주로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연기해왔는데, <미스 슬로운>도 그녀가 기존에 맡아왔던 캐릭터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가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 속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의 얼굴이 아니라, ‘미스 슬로운’이라는 실제로 살아서 숨 쉬고 있는듯한 캐릭터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유난히 미스 슬로운의 얼굴 클로즈업이 비칠 때가 많은데, 그 순간은 캐릭터가 좌절하는 순간보다는 그녀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는 순간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슬로운이 청문회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의원을 향해 시원하게 한 방을 터뜨리는 순간, 그녀는 영화 속 어느 순간보다도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명확하게 펼쳐 보이는데, 그 순간 영화 속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의 얼굴은 사라지고, 슬로운의 클로즈업된 얼굴만 남는다. 가끔 어떤 배우가 너무 유명하거나 배우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한 경우에는 배우가 아무리 어떤 배역을 연기하고 있다고 해도, 배우의 얼굴이 그대로 올라오기 마련이다. 내가 그녀의 모습을 보았던 <마션>이나 <인터스텔라>의 경우에도 어떤 배역보다는 그녀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미스 슬로운>에서 그녀는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운다. 캐릭터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바를 배우의 클로즈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영화사 속에서 너무나 뻔한 보여주기 방식이지만, 제시카 차스테인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으로 인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설득당하고 매료되고 만다. 제시카 차스테인이 연기하는 '슬로운'이 아닌,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슬로운'이라는 여자에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슬로운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뤄내고 마는 것이 바로 슬로운이라는 캐릭터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슬로운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선거 캠프를 유리하게 만들어나가기 위해 에스미의 과거를 생방송 중 폭로하는 장면이나 계속해서 잠에서 깨어 일을 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일반적인 정서상 쉽게 용인될 수 있는 부분들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 캐릭터는 더욱 매력적인 것이 아닐까. 냉철하고 빠른 판단력에 미칠듯한 속도로 일을 처리하는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마주하는 것은 꽤나 무서운 일이다. 아무런 결점과 흠이 없다는 것은 캐릭터이건, 실제 사람이건 다른 이들로부터 어떤 공감도 받을 수도 없다. 너무 완벽하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거리감과 나의 이성을 벗어난 행동으로부터 오는 무의식 속의 공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 그녀의 행동은 남들에게 쉬이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들도 아니고, 그녀 자체도 남들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행동들도 아니다. 완벽해 보이지만 어딘가 틈을 가진 캐릭터 그리고 그 속에서도 찰나의 순간 보이는 인간성들.(에스미를 걱정해서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보기 위해 날아갔다던지, 자신의 팀원들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청문회의 정체를 폭로한다든지, 패배가 눈 앞에서 보이는 상황에서 포드와의 만난 뒤 그만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뻔했다던지) 그렇기에 슬로운이란 캐릭터는 단순히 남성 캐릭터의 성전환이 아닌, 대중 누구나 몰입할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영화 속에서 여성의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의 고정관념 속에서 오랫동안 자리했던 사고들이 있기에 영화 속에서 종종 이런 스테레오 타입화 된 여성 캐릭터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미스 슬로운>은 여성에 대한 지나친 억압을 보여주거나 과도한 방식으로 남성 캐릭터의 성역 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남성과 여성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중립적인 태도 '쿨함'을 유지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여성 캐릭터들이 가진 한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여성의 입장을 구구절절하게 드러내며 이러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보다 시종일관 쿨함으로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이런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우리를 놀라게 해줄 수 있을까. 그래도 우선은 <미스 슬로운>의 이 ‘슬로운’이 내 인생 최고의 여성 캐릭터일 것이다.


* 사족 : 근데 왜 하필 영화의 제목은 <Miss Sloane>일까. 다른 평범한 남성 주인공 영화들처럼 그녀의 이름만으로 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제목으로부터 오는 편견들을 영화를 보게 해주면서 깨부수고 싶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내 나름대로는 좀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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