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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Nov 13. 2017

‘생’이라는 놀라운 유화

자신의 삶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파울라>의 파울라

※ 영화 <파울라>의 엔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울라’라는 화가의 이름은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보다는 수많은 다른 화가들의 이름이 더욱 익숙하다. 고흐, 램브란트, 피카소, 모네 등 등 등. 우리들에게 익숙한 화가의 이름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프리다 칼로, 까미유 끌로델 정도일까. 이들보다 먼저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화가의 길을 걸었던 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바로 파울라 모더존 베커. 그녀는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이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누드 자화상을 발표한 화가였다. 우리에게 이름마저도 너무나 낯선 그녀. 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억압이 존재했던 19세기에서 그녀는 어떻게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불꽃같은 생을 그린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녀의 이름을 딴 <파울라>라는 영화를 통해서.




<파울라>의 오프닝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아닌, 그녀가 들고 있는 커다란 캔버스의 뒷면과 마주한다. 곧이어 들리는 대사는 캔버스를 들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재능이 없다고, 너도 이제 24살이 되었으니 취직이나 결혼을 하라고 한다. 그녀를 향해 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이다. 그녀는 캔버스를 든 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 그녀는 결국 집을 나와 보릅스베데라는 미술 공동체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처음 오프닝에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할 것이다. 그녀가 들고 있는 캔버스는 일종의 프레임이다.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결혼이나 취직이라는 것은 그 당시 그 나이 때 여성이 해야만 하는 의무였고, 아버지는 그 시대의 프레임으로 그녀를 억압하고 구속했던 것이다. 캔버스의 그림이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존재와 제대로 마주하기 전부터 여성을 하나의 분리된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존재 자체에 하나의 프레임을 씌운 채 수많은 억압을 행한 그 당시 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을 대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울라> 곳곳에는 이처럼 그 당시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녀가 들어간 미술 공동체 ‘보릅스베데’는 자연주의적 양식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맨 처음 그녀가 자신의 도구들을 챙겨서 씩씩하게 그곳으로 들어갈 때, 그곳의 화가들이 집 밖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모두 ‘남성’이고, 여성들은 그 옆에서 물감이 짜인 팔레트를 들고 서 있다.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기에 여성이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파울라는 그곳에서 새롭게 그림을 그리려 했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만 심취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는 그곳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파울라는 단순히 자연을 그리는 것을 넘어서 계속해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출해내고자 했다. 그녀가 집시들과 가까이 지내고 그들의 그림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도 자연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 세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녀 주변에 있는 모든 남성들은 그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를 가르친 프리츠 마켄젠은 특히 그녀를 무시하며 위압적으로 대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뿐이었다.


그녀는 보릅스베데에서 오토 모더존을 만나 결혼했지만, 대부분 여성 예술가의 삶이 그러하듯 그녀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남편의 그림은 다른 이들에게 높은 가격을 받으며 팔렸지만, 그녀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줄로만 착각하는 그런 그림에 불과했고, 그녀의 작업은 마치 취미처럼 비쳤다. 파울라는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릴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떠난다. 여전히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고 남편의 돈에 의지해야 했지만, 그림에 대한 그녀의 열정만큼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꿈은 안고 프랑스로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만, 프랑스의 환경도 여성에게 자유로운 곳은 아니었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 클라라 베스트호프는 자신의 분명한 꿈을 갖고 있었지만 파리에서는 로댕의 작품을 위한 회반죽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고, 두 사람이 가는 술집에서 만난 까미유 끌로델은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채 술에 취해 자신의 삶을 비관했다. 어디를 가도 ‘여성’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애인처럼 남성의 어떤 ‘대상’으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파울라의 예술적 고뇌는 생존의 문제와 미묘하게 얽혀있다. 그녀가 살던 파리는 어찌 되었건 돈이 있어야만 하는 세상이었으며, 그녀는 그 돈을 오직 남편을 통해서만 충당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림을 팔 수 있는 곳은 없었고, 그녀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돈 대신 자신의 그림을 집값으로 내고자 했지만, 그녀의 그림은 '돈'으로 거래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어디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여성 예술가의 삶이란 어쩌면 예술에 대한 그녀의 고뇌보다도 당장 살아가야만 하는 생존이 더 시급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붓을 놓지 않는다. <파울라>에서 ‘파울라’라는 존재 자체에 묘하게 끌렸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붓질이었다. 사물을 보고 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말없이 사물을 응시하고 그 뒤에 붓에 물감을 묻힌 뒤 무심하게 캔버스 위에 턱 하고 묻히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그녀. 영화 속 곳곳에서 그렇게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순간들이 있는데, 하나는 오토 모더존의 딸을 그릴 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 때이다. 상반신을 모두 벗은 뒤, 호박 목걸이를 건 채 캔버스에 물감을 묻히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참으로 황홀했다. 남성이 여성의 누드를 볼 때처럼 어떤 성적 대상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마주하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자유분방하게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는 붓질. 그 단순한 붓질 하나만으로도 파울라라는 인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었고, 그녀의 영혼까지 연기한 카를로 주리의 특출함도 함께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파울라>의 엔딩은 그녀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오프닝과 대조적이다. 자신의 딸 '마틸다'를 낳고 쓰러진 파울라. 바닥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이 한동안 비치다가 화면은 이내 그녀의 그림이 모여있는 어떤 방으로 전환된다. 그 방에는 일생동안 600여 점의 그림과 10,000여 점이 넘는 스케치를 그려왔던 그녀의 생이 압축되어 담겨 있다. 그녀의 그림들이 비친 뒤, 결혼 6주년 기념으로 그린 그녀의 자화상 뒤로 '파울라'가 걸어 나온다. 관객들이 처음 마주하지 못했던 그녀의 얼굴을 이제는 똑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잠깐 동안 응시한 뒤, 다시 그림 뒤로 사라지는 그녀. 관객들은 처음에는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고, 이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났지만, 파울라, 그녀는 그림 속에서 살아남아 불멸이 되었다.  





“내 삶은 축제다. 짧지만 강렬한 축제이다”
“세 점의 그림과 아이 하나, 내 인생은 축제가 될 거야”

그녀는 자신의 짧은 생 동안 여성에게 주어진 장벽을 수없이 파괴하고자 했다.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는 자유로워지고자 했지만, 현실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욱 단단했고 견고했다. 자신의 자화상에 이름을 넣었지만, 남편과 헤어진 뒤 중간 이름을 지웠던 것처럼 누군가의 아내로서가 아닌 독립된 한 명의 화가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 그녀의 생은 그녀의 그림처럼 수없이 많은 색들이 덧칠해져 완성된 하나의 유화였다. 기쁨과 슬픔, 고통, 자유로움, 아름다움 등 모든 감정과 감각들이 어우러져 완성된 유화.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새로운 색으로 덧칠할 수 없지만, 그녀가 살아갔던 흔적들은 분명하게 남아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비춰주는 하나의 축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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