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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Feb 27. 2017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컨택트>, <그녀>에서 나를 비추는 ‘타인’을 보았다.

**이 리뷰에는 <컨택트>, <그녀>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존재는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미지의 존재로부터 나 자신과 닮은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어떠할까. 혹은 단순히 내 삶의 편리함을 위해 있던 존재가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 존재라면 어떨까.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컨택트><그녀>. 서로 닮은 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두 영화를 엮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욕심일 수도 있고 나의 무리한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가 같은 인간의 내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실 ‘나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스릴러라는 형식을 빌려서 자기 자신의 정신병을 마주한 <뷰티풀 마인드>라던지, 자기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분리해 그 죄인을 조사하는 사건으로 기억을 바꿔치기했던 <셔터 아일랜드>라던지. 보통 이렇게 존재와 연관된 스토리라고 생각했을 때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었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늘 그러하듯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내부를 탐색하는데 집중했다.      


(좌) <컨택트> 스틸  / (우) <그녀> 스틸


<컨택트><그녀>는 이러한 측면에서 독특한 영화들이다. 내부가 아닌 외부를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는 두 영화들. 이 두 영화를 더욱 묘하게 만드는 것은 그 외부라는 것이 나와 똑같은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컨택트>에서는 외계인이, <그녀>에서는 인공지능이 나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 자신을 탐구해나간다. 두 영화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외부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컨택트>는 타인을 거울삼아, <그녀>는 목소리를 내면의 소리처럼 만들어서 보여준다.      


<그녀> 스틸


인공지능과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그녀>. <그녀>의 세상 속에선 사람과의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지자 이제 인공지능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사만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실체를 만질 수 없는 존재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사만다는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진리의 특징에 가깝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정작 손에 잡히거나 눈에 만져지지 않는 것들처럼 사만다는 자신의 목소리로 테오도르를 이끌어나간다. 말 그대로 내면의 목소리가 외부의 존재를 인도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인 것이다. 사만다의 말만 믿고 눈을 감은 채 밖으로 나가서 메뉴를 주문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이나 테오도르가 대필해준 편지를 대신 모아서 책으로 출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만다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좌) 캐서린과 이야기하는 테오도르 / (우) 에이미와 이야기하는 테오도르


<그녀>에서 테오도르는 총 3명의 여성과 연관되어 있다. 사만다(목소리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테오도르와 깊은 관계라는 점에서 여성이라고 칭할 수 있다면), 에이미, 캐서린. 인간관계에 있어서 제대로 된 관계를 하지 못하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테오도르는 그나마 친구 에이미 앞에서는 편한 모습으로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테오도르 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사회화된 모습에 가깝다. 친구 사이와 연인 사이의 모습에서 달라지는 것처럼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아무런 가면도 걸치지 않은 편안한 자신의 상태로 돌아온다. (이는 에이미가 인공지능과 연애를 할 때도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거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전달해주지 않고 오롯한 자기 자신으로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테오도르에게 있어서 사만다는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인공지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테오도르가 전 부인 캐서린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유난히 위축되어 있지만, 사만다와 함께 할 때 그는 언제나 어깨를 당당히 펴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이 앞에서 무조건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보여줘도 두렵지 않은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으로 있게 만들고, 그가 자신의 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만다가 테오도르의 컴퓨터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인데,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의 정보가 축적되어 한 인간을 이루는 것처럼 <그녀>에서는 컴퓨터가 여러 가지 데이터베이스를 갖춘 하나의 인격체와도 같이 묘사된다. 물론 인간은 훨씬 더 복잡한 존재이지만 <그녀>에서는 컴퓨터가 인간의 비유처럼 드러난다.(인간과 컴퓨터가 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이 점점 더 인간화되어있다는 측면에서) 사만다는 그 축적된 정보를 통해 테오도르란 인간에 대해 알아가며, 그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와 관계를 나눌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사만다가 테오도르의 내면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부분이 된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는 이러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오픈할 수 없으며, 설사 오픈한다고 해도 그 모든 데이터를 받아들일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아닌 이상. 그런 의미에서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이상적인 자아가 되어 그를 인도해준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떠나는 지점도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차원 더 높은 차원으로 가기 위해 테오도르를 떠나는 사만다. 진리를 알려주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만다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는 것도, 내면의 목소리가 테오도르가 단순히 현재 있는 곳에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오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컨택트> 스틸


이처럼 <그녀>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는 인간의 외로움, 고독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관한 것들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들처럼 외부의 목소리를 통해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컨택트>는 어떨까. <컨택트>는 사실 SF영화 인척 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나타내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는 상대방 모두 윈윈 하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사실은 진정한 를 찾아가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컨택트> 스틸


새롭게 창조된 언어를 통해 전 세계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외계인의 존재. <컨택트>에서 이 외계의 존재는 단순히 이세계(異世界)에서 온 이방인이 아닌 나의 또 다른 일면과도 같다. 하나의 스크린을 두고 마주하는 외계인과 루이스의 모습은 마치 거울과도 같다. 속설에서 떠도는 이야기 중 거울 속에 비치는 나 자신의 모습은 나를 투영한 것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나의 모습이라는 설처럼 마주한 루이스와 외계인의 모습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인간들을 정복해서 도륙하는 것이 아닌, 인간들을 파괴하기 위한 악한 신의 모습이 아닌 죽음이라는 순리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외계인의 모습. 이는 지구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맨 처음 외계인들이 있는 방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외계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들이 나를 해칠지도 모르는 타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스만은 달랐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루이스는 끊임없이 배우고자 했었고, 그들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쳐주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로 인해 전 세계 곳곳에 위치한 12개의 쉘에서 오직 루이스만이 그들과 진정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교환이 아닌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가깝다는 점에서 전 세계에서 오직 루이스만이 그들과 대화(對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컨택트> 스틸


루이스가 이 외계인들과 접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대척점에 선 그녀의 호기심은 이 미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단순히 정보를 알아내려는 수단으로 이들과 언어를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의 행동들보다 훨씬 더 확장된 범주로 이들을 바라보며 대했고, 이러한 그녀의 넓은 시각은 외계인들과의 소통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외계인들 사이에 놓인 것을 그들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로 보지 않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으로 보았다. 그들이 나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이라고 명백하게 구분 짓는 것이 아닌, 그들을 나와는 다른 측면을 가진 존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계인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 가려져 있던 무의식과도 같다. 나 스스로도 모르는 나 자신의 심연의 세계. 모든 것이 뿌옇고 그 속에 있는 존재마저 명확한 실루엣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루이스는 그들이 쓰는 미지의 언어로 그들을 알아낸다. 그 모습은 마치 거울 저편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몰랐던 외면을 알아채는 것과도 같다.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도 오직 그녀만이 그들을 자신과 다른 존재라 배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스는 우주선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그녀도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두려움에 떨며 우주선의 내부로 들어섰지만, 그녀는 그들과 자신을 구분 짓는 우주복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렇기에 그녀만이 그들 우주선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몰랐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깨닫고, 이 세계를 위험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자신도 몰랐던 능력으로 세계를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것은 굉장히 진부한 서사이지만, 타인을 통해 몰랐던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게 됨으로써 삶을 누리는 것만큼이나 개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녀><컨택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에 대해 이야기한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존재는 내가 한 차원 더 높은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주기도 하고,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는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일깨워주기도 한다. <그녀><컨택트>는 다른 지점들이 많은 영화이지만, 나 자신을 찾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비슷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자기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것. 사만다가 떠난 뒤에도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테오도르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서 자신의 딸이 병을 죽게 될 것을 알게 되고도 현재의 삶을 살아나가는 루이스처럼. 흔히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나 자신이 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라는 존재는 타인이 있을 때 인식이 가능하다. 타인의 시선은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게 해주며, 이를 통해 진짜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두 영화는 어쩌면 이런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한 여행을 내부가 아닌 외부를 향해 떠나기 시작한다. <컨택트>에서처럼 때로는 그 모습이 외계인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녀>에서처럼 때로는 형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로만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외형을 바꿔가면서도 영화는 여전히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비슷한 언어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도 모른다.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청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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