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나이트> 단평
※ 본 리뷰에는 <그린 나이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린 나이트>는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이다.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과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난 녹색 기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배경 지식 없이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 나이트>는 상당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크리스마스 파티 날,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된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 그들이 모인 곳에 갑자기 거대한 도끼를 든 녹색 기사가 나타나 자신의 목을 치는 자에게 명예와 재물을 주지만 그와 동시에 그로부터 1년 뒤에 자신의 목을 친 것과 똑같이 상대방의 목을 치겠다고 말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가웨인이 자신이 하겠다고 대답한다. 칼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가웨인은 아서왕에게 칼을 빌려 녹색 기사의 목을 친다. 그 뒤 목이 떨어진 그린 나이트는 1년 뒤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도끼를 내버려 둔 채 잘린 목을 들고 성을 빠져나간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1년 뒤가 다가오고, 가웨인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색 기사를 찾기 위한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사실 모험을 떠나기 전 가웨인은 무능한 인물에 가깝다. 그는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에셀과 노닥거리다가 어머니께 미사를 갔다 왔다고 거짓말하고, 딱히 제대로 된 직업조차 갖고 있지 못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녹색 기사가 왔을 때, 다른 기사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자 그가 나서서 하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용기를 가진 인물이라 서라기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에 가깝다. 즉, 그는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서 계속 기사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기사가 되지 못했던 나약한 인간인 것이다. 기사의 목을 치고 나서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났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 등 떠밀려 머나먼 모험을 떠나게 된다.
가웨인은 험난한 모험을 하는 동안 그는 조금씩 기사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여기서 기사의 면모란 중세시대 기사들이 갖춰야 할 행동 규범이라기보다는 '사람다움'에 가깝다. 가웨인의 초반 모습은 사회에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간에 가깝다. 이러한 무능력한 인간의 모습은 그가 모험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초반 전쟁터에서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 그는 전쟁터에 남아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신경 쓰지도 않고 지나가려고 한다. 특히 그 어린아이가 다른 패거리와 함께 갑자기 강도로 변해 그를 습격했을 때, 그는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며 자신을 기사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에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은 기사가 아니라고 말하며 강하게 부정한다. 이후 빈집에서 만난 한 유령이 자신의 머리를 찾아달라고 할 때도 가웨인은 자신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면 그 대가로 무엇을 해줄지 물어보지만, 유령이 그것을 왜 물어보냐고 말하자 그에 대해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연못으로 들어가 겨우 유령의 머리를 찾아준다. 즉, 속된 말로 한다면 가웨인은 자신의 주장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그렇다고 용감하게 누군가에게 맞서지도 못하는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찌질한' 인간에 가까웠다.
이러한 가웨인의 모습은 우연히 발견한 성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에 들어가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가웨인은 성주가 녹색 예배당이 이곳에서 멀지 않으며 크리스마스 아침에 출발해도 늦지 않는다고 하는 말에 스스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기서 눌러앉아 버린다. 가웨인에게 계속 묘한 눈길을 보내던 성주의 부인은 가웨인이 잃어버렸던 녹색 허리띠를 주려하고 가웨인은 이를 얻기 위해 부인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넘어가지만 눈을 붕대로 감은 늙은 하녀가 자신과 성주의 부인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성을 급히 빠져나간다. 가웨인이 겪은 여러 일련의 모험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정말 '기사'에 가깝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에셀이 준 방울을 그대로 성주 부인에게 빼앗겨 버리고 그의 유혹에 쉽사리 빠지는 모습, 스스로 모험을 떠났으면서도 다른 이의 말에 쉽게 휘둘리는 모습은 가웨인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약하고 주체성이 없는 인물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가웨인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인간이 '사람답다'라고 말하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성장이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 끝에 가웨인은 드디어 녹색 예배당에 이른다. 그전까지 그는 자신을 따르던 여우가 자신을 막아설 때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녹색 예배당에서 녹색 기사가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가웨인은 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날 그가 드디어 눈을 뜨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리치려 할 때,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며 건넨 녹색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며 계속 주저한다. 그는 결국 녹색 기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간다. 가웨인이 녹색 기사로부터 도망친 뒤 벌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들은 말 그대로 '굴욕의 역사'이다. 그는 살아남아 결국 왕위에 오르지만 그 시퀀스 속에서 벌어지는 행동들은 그를 인간성을 상실한 비겁한 말로에 이르게 한다. 마치 환상처럼 일련의 장면들이 지나간 뒤, 가웨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녹색 기사에게 자신의 목을 내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그 환상을 겪고 난 뒤, 가웨인은 비로소 자신이 붙잡고 있던 녹색 허리띠를 풀어내고 녹색 기사는 그런 가웨인을 향해 칭찬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녹색 허리띠는 가웨인을 지켜주는 마법이 들어있는 보호구라고도 볼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가웨인이 붙잡고 있는 모습을 통해 삶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삶에 대한 열망과 집착을 놓아버림을 통해 가웨인은 기사의 마지막 덕목인 용기를 얻고 진정한 기사=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단순히 과거에만 머물러 있던 '기사'라는 존재를 다시 끄집어내 진정한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영화이다. 다소 불친절한 연출과 시적이면서도 연극적인 화면으로 인해 대중영화처럼 쉽게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렵고, 원작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면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 나이트>는 스크린에서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는 영화임이 분명할 것이다.